태생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호주의 광고는 그들의 문화와 습성을 그대로 복제해내는 데 불과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 정체성이 담긴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호주 노동자의 독선적이면서 반항적인 기질을 뜻하는 ‘오커(Ocker)’에서 비롯한 ‘오커리즘(Ockerism)’이다. 이 현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주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고 있다.
글 ㅣ 윤필립(시인), 김민정(칼럼니스트)
사진 ㅣ 노중훈, 김민정
사진 ㅣ 노중훈,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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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고대와 중세의 역사 없이 근대부터 시작된 나라다. 정확하게 223년 전인 1788년, 11척의 죄수 선단이 시드니에 입항하면서 백인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유럽은 산업 혁명, 계몽주의 사상, 시민 계급 혁명이 서로 맞물린 시기였다.
‘조선의 문화 군주’ 정조가 즉위 12년을 맞아 개혁의 속도를 높이고, 훗날 유럽을 폭풍 속으로 몰아넣을 풍운아 나폴레옹이 포병장교가 되고, 모차르트는 자신의 3대 교향곡인 39, 40, 41번(주피터)을 연달아 쓰고, 비판철학을 탄생시킨 칸트가 엄숙한 윤리학 『실천이성 비판』을 발표한 해가 1788년이다. 미국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호주 식민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영국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자유와 평등 사상이 강물처럼 흐르는 새 나라를 이루는 것. 그래서 호주인 특유의 동지애(Mateship)에서 비롯한 ‘평등주의(Egalitarianism)’는 호주의 건국 이념이면서 223년 동안 이어온 국가 이념이 됐다.
독선적·반항적인 캐릭터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다
역사학자들은 호주를 일컬어 ‘계몽주의가 낳은 사생아’ 또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후예들’이라고 말한다. 식민지 건설 당시의 유럽 상황에 빗댄 태생적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세적 질서에 저항하면서 과학적·합리적인 사고로 산업 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영국이 지구 반대편 호주대륙에 죄수 유형지를 만든 까닭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드니는 우울했다. 눈부시게 강렬한 시드니 햇빛으로도 낙오자들(Underdogs)의 절망감, 모국에서의 추방과 유형(流刑)의 경험에서 생겨난 트라우마(trauma)를 지울 수 없었다. 호주가 1인당 맥주 소비량 1위, 1인당 도박 액수 1위를 기록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미친 사람들의 오락(amusement of madmen)』에서 “호주에 럭비와 맥주가 없었다면 벌써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썼듯 호주인에겐 선술집에서 마시는 맥주 그리고 주말마다 즐기는 럭비가 중요했다.
오랫동안 호주는 태생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영어권 국가인 캐나다, 뉴질랜드 등과 함께 영국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며, 20세기의 패권 국가로 등장한 미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여기에는 호주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내재돼 있다. 광고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1970년대까지 호주는 영국과 미국 광고를 그대로 복제했다. 지금처럼 저작권이 확실하게 보장되던 시기도 아니었고, 호주의 특성을 독창적으로 광고에 담아낼 만한 광고회사나 광고전문가도 거의 없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존 싱글톤이다.
호주노동자 ‘Ocker’를 광고모델로
1인 광고회사 ‘존 싱글톤 애드버타이징(John Singleton Advertising)’의 사장이었던 그 역시 처음에는 영국과 미국의 광고를 열심히 베꼈다. 그렇게 잔뼈가 굵어가던 즈음, 그의 인생 항로를 바꿔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
가 그에게 ‘싱고(Singo)’라는 애칭을 붙여주면서 “재능 있는 카피 라이터, 버릇 없는 영혼, 억제할 수 없는 타고난 반역자”라는 인물평을 한 것. 그 순간, 호주 노동자의 독선적이면서 반항적인 기질을 빗댄 단어 ‘오커(Ocker)’가 떠올랐다. 그는 당장 호주 연극계에서 ‘오커’ 바람을 일으킨 희곡 작가 데이비드 윌리엄슨을 만났다.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 20세기 최고의 소설가로 평가받는 D. H. 로렌스가 튀어나왔다.
부인과 함께 시드니 북부 지역의 아름다운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장편 소설 『캥거루』를 쓴 D. H. 로렌스는, 이 소설에서 호주 노동자의 단순하면서도 투박한 특성을 오롯이 표현했다. 특히 식민지 노동자를 상대로 은근히 목에 힘을 주는 영국인의 속물 근성을 경멸하면서,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호주 노동자의 평등 사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 대목에서 영감을 얻은 데이비드 윌리엄슨은 ‘오커’를 만들어냈고, 존 싱글톤은 ‘오커’ 캐릭터를 광고에 도입해 호주 광고의 역사를 다시 썼다.
태양과 맥주 그리고 섹스를 즐기는 전형적인 호주인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세기가 바뀌고 밀레니엄이 도래했지만 21세기 호주 광고시장에서 ‘오커리즘(Ockerism)’의 위력은 여전하다. 노동자가 소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커’ 캐릭터는 광고뿐만 아니라 호주 대중문화의 주류다. 호주 국내에서뿐만이 아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판매되는 호주 맥주광고에도 오커 캐릭터가 등장한다. 광고의 위력과 함께 사회적 책임감을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① 존 싱글톤은 이 맥주광고 시리즈로 호주 광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떤 기자는 “그의 광고 때문에 호주가 1인당 맥주 소비량 1위 국가가 됐다”고 썼다. 그의 광고는 일본의 단시(短詩)인 하이쿠 스타일의 번뜩이는 은유와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반전이 특징으로, 그 반전의 대목에는 늘 ‘오커’가 등장했다.
② 시드니의 관광지 킹스크로스의 랜드마크가 된 코카콜라 빌보드. 호주는 태생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나라로 같은 영어권 국가인 캐나다·뉴질랜드 등과 함께 영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20세기의 패권 국가로 등장한 미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호주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숨어 있다. 광고는 또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한 대중문화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광고는 집단 무의식으로 형성돼 세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독특한 정서를 낳는다.
③ 호주의 칼튼 드래프트 맥주광고. ‘Big AD’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2006년 칸 국제광고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1970년 이전까지 호주의 광고는 영국과 미국의 광고를 그대로 복제해내는 데 불과했지만, 이제 영국에서는 호주의 맥주광고가 새롭게 제작되면 기사로 다루고, 많은 미국인은 광고에서 시작된 ‘크로커다일 던디’ 캐릭터를 호주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④ 해외에 배급하는 호주 관광청 광고.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 등장해 “젠장! 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Whre the bloody hell are you?)”라는 멘트를 날리는 장면이 충격적이지만, 이 역시 마케팅의 한 방편으로, 광고 이후 호주 관광청 웹사이트 방문자 수가 50% 이상 증가했다.
① 도시 곳곳을 누비는 트램을 활용한 광고는 가장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광고수단으로 사용된다. 트램 전체를 둘러싼 래핑 스타일, 트램 윗부분에 부착된 광고보드를 활용한 스타일, 트램 정면과 후면 등 일부분에 부착된 작은 포스터 스타일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시민들 대부분은 트램광고를 통해 새로운 뮤지컬이나 공연 정보를 얻고 신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받는다. 트램을 캔버스처럼 활용한 광고는 고풍적인 도시 미관과 어우러져 단순한 광고효과 이상의 세련된 도시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② 도시의 중요 도로 곳곳에 반복적으로 설치된 깃발을 활용한 광고는 문화·예술·스포츠 등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벌어지는 각종 이벤트를 알리기 위한 중요 광고매체. 상업적인 광고를 배제한 각종 이벤트 및 페스티벌을 알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한 시즌에도 다양한 종류의 이벤트가 개최되기 때문에 같은 거리 안에서도 각각의 개성이 살아 있는 여러 종류의 깃발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③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포스터 광고는 아직까지도 호주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와 이벤트 홍보에서 각광받는 아이템 중 하나. 과감한 컬러와 디자인이 인상적으로 의류 브랜드의 세일이나 정부에서 진행하는 문화 이벤트를 알리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덕분에 비주얼 감각이 뛰어난 대형 포스터를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④ 호주 지면광고의 특징 중 하나는 일러스트 활용도가 높다는 것. 문화 예술이 발달한 만큼 디자인 감각이 탁월해 광고작품을 보는 순간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매해 같은 포맷으로 진행되는 영화제인 ‘moonlight cinema’를 홍보하기 위한 지면광고와 인터넷 폭력 및 성폭력 방지를 위해 호주 정부에서 펼치는 ‘the line’ 캠페인 지면광고 모두 일러스트를 활용해 친근한 이미지를 완성했다.
⑤ 멜버른 중심에 설치되어 있는 전광판 광고. 전형적인 사각 형태가 아닌 건물 형태에 자연스럽게 맞춘 타원형 스타일로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⑥ 시티에서 주최하는 특별 이벤트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광고부스. 시민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이벤트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도시 한복판에 작지만 기존에 없던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시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