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말 열린 제 62회 칸 광고제는 또 한 번 역대 급의 숫자를 경신했다. 개최 이래 최다인 4만 133점의 작품이 출품돼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심사위원만 무려 336명, 참관단 규모도 1만 3,000명을 훌쩍 넘었다.
과연 세계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축제다운 숫자들. 한국 입장에서도 이번 광고제는 꽤 큰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최초로 한국 국적의 퓨처라이언즈 수상자도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참관단보다도 앞서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이 전해오는 수상 소식 덕분에, 서울발 실시간 SNS 피드는 칸 현지보다도 뜨거웠다. 본 관람기에서는 주요 수상작과 세션 내용을 바탕으로 주목할만한 몇 가지 이슈들에 대해 공유해보겠다.
공공을 위한 아이디어들의 활약
기술력의 향상으로 인해 단순한 품질 경쟁이 무의미해지면서 기업이 표방하는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점점 소비자는 안전을 생각하는 전자 회사, 어린이의 건강한 식생활에 기여하는 식품 회사를 선택하고 있고, 내로라 하는 브랜드들에서부터 앞다투어 관련 캠페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올해 칸 광고제는 이러한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올해 수상의 영광을 안았던 작품들을 살펴보면 유독 공익성이 돋보이는 컨텐츠들이 많았는데, 특히 안전과 건강을 생각하는 아이디어들이 기술과 결합하여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트럭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트럭 뒤에 대형 디스플레이를 설치, 도로 상황을 생중계한 삼성전자의 “안전 트럭(Safety Truck)”을 비롯하여, 자동차 불빛에 반응하는 특수 제작된 스프레이로 자전거 사고를 예방하는 볼보의 “생명의 페인트(Life Paint)” 등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또,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터키 여성들이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만든 보다폰의 어플리케이션 “우리끼리(Between Us)”는 미디어 부문에서 터키 최초의 그랑프리를 수상해 눈길을 끌었다. 공익광고 중 우수작을 가리는 그랑프리 포 굿(Grand Prix for Good)은 ALS협회의 “아이스 버킷챌린지(Ice Bucket Challenge)”에 돌아갔다. 마지막 시상식에서는 이 캠페인의 주창자인 팻 퀸(Pat Quin)이 함께 등장하여 기립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성(性) 평등에 대한 이야기들
올해 조직위에서는 “글라스 라이언(Glass Lion)” 부문을 신설했다. 페이스북COO 셰릴 샌드버그와의 협업으로 시작된 글라스 라이언은 성(性)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항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주도해나가는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이름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이 부문명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만연한 유리 천장(Glass Ceiling)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글라스 라이언 영광의 첫 그랑프리는, 월경중인 여성이 피클병을 만지면 상한다는 인도의 미신을 깨고자 기획된 캠페인 “피클을 만져라(Touch the Pickle)”에 돌아갔다.
칸 광고제의 이런 움직임을 반영하는 듯 올해는 여성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화제가 되었다. PR 부문그랑프리 포함, 총 11개 부문에서 트로피를 품에 안은 P&G의 “#여자애처럼(#Likeagirl)”은 ‘여자애처럼’이라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바꾸는 시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운동하는 지젤번천을 통해 여성에 대한 편견 타파의 메시지를 담은 언더아머의“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I Will What I Want)” 역시 좋은 성과를 거뒀다.
기술 X 크리에이티브
몇 년 전부터 기술은 광고제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기업들은 진보된 기술, 데이터 그리고 통계를 바탕으로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있고, 이는 광고의 영역을 넘어 크리에이티브 그 자체로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칸 광고제에서는 안드로이드, 로봇, 가상현실, 빅데이터 등을 중심으로 한 세션들이 연이어 열렸고,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 컨텐츠들이 주목을 받았다.
간단한 골판지 상자로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해준 구글의 “카드보드(Cardboard)”는, 기술이 저렴한 비용으로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음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으며 모바일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외에도 마이크로소프트는 페스티벌을 훨씬 익스트림하게 즐길 수 있는 “홀로렌즈”를 선보였고, 더밀에서는 기술을 통해 비주얼 내러티브가 얼마나 더 역동성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세션을 진행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시작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라이언즈 이노베이션(Lions Innovation)”은 올해부터 칸 라이언즈와 별도로 구분되어 열렸다. 기술과 아이디어가 한데 융합된 컨텐츠들이 소개되었는데, 영예의 그랑프리는 영국의 왓쓰리워즈(What3Words)가 출품한 “세상에 주소를 만들어주는 3단어(3 Words to Address the World)”에게 돌아갔다. 이 어플리케이션은 전 세계를 가로, 세로 3m의 정사각형으로 구분한 뒤, 위도와 경도 정보를 제공하고,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상태를 3개 단어로 표기하는 네비게이션 &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이다. 주소가 없이도 빈민가나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물품 제원을 용이하게 해줄 수 있다는 인도적인 측면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첨단은 아닐지라도, 기술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편익을 증대시킨 출품작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미노피자는 트위터 사용이 많은 미국인의 트렌드를 반영, 피자 이모티콘만으로도 간단하게 주문할 수 있는 아이디어(“Emoji Ordering”)로 티타늄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어플리케이션 상에서 가상의 메이크업 테스트를 하고 바로 제품 구매로까지 연결될 수 있게 한 로레알의 “메이크업 지니어스(Makeup Genius)” 역시 기술이 실용으로 연결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칸 광고제는 기술 시연의 장이기도 했다. 덴츠는 일본의 유명 스타, 마츠코디럭스의 안드로이드 “마츠코로이드”를, 소프트뱅크는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를 현장에서 시연하며 여느 셀러브리티 못지 않은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소비자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매개체
캠페인이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였다. 이번 칸 광고제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체까지 하나의 세트로 연결되어 소비자의 움직임을 이끌어낸 출품작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프로덕트 디자인 그랑프리를 포함하여, 총 6개 부문에서 입상한 “행운의 철 물고기(The Lucky Iron Fish Project)”는 인구의 50%가 빈혈로 고생하는 캄보디아인을 돕기 위해 기획되었다. 요리에 철분을 사용하도록 가정마다 사각형 철분 블록을 공급했을 때는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으나, 캄보디아에서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물고기 형태의 철분 블록으로 대체함으로써, 실질적인 빈혈 인구를 줄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아주 살짝 비튼 아이디어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나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린이와 엄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니베아의 “니베아 인형(Nivea Doll)” 역시 타겟의 취향과 흥미를 완벽하게 캐치한 프로모션이다. 해변에서 놀기만 좋아하고 선크림은 기피하는 아이들에게, 인형을 통해 선크림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이 프로모션 역시 다관왕의 자리를 차지했다.확실한 메시지 각인을 위해 약간은 극단적인 매개체를 택한 출품작도 있었다. 에이즈 환자의 혈액으로 인쇄한 오스트리아 남성잡지 반가르디스트는 소름끼치는 작품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일상 속에서 에이즈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칸 광고제에서는 기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마케팅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은 더 새로운 것, 더 창의적인 것을 갈구하는 모두에게 좋은 대안이 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칸이 손을 들어준 쪽은 기술이 만들어내는 가치였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는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어떤 가치를 구현해낼 것인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야말로, 수상작들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