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고민해서 나온 캠페인과 슬로건이 있다. 피티를 통해 브랜드를 만든 이와 합의를 이뤘다. 영상부터 옥외까지 다양한 광고를 통해 좋은 반응과 결과도 얻었다. 하지만 일 년, 이 년이 지나면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내부 인력이 바뀐다. 새로운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현재의 슬로건을 브랜드의 자산이 아닌 전임자의 자산으로 여긴다. 새로운 캠페인을 제안해 달라고 요청하고, 다시 피티가 시작된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실적이 필요하고, 기업의 혁신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으로 새로운 캠페인을 기획한다.
급변하는 비지니스 환경 속에서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기업엔 늘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고, 광고를 통해 이를 알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업의 혁신이 브랜드의 본질까지 모두 뒤흔들만한 것인가 고민될 때가 있다. 애초부터 브랜드의 정체성이 존재하고 있는지, 한 사람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브랜드의 방향이 몇 년에 한 번 씩, 심지어는 일 년에 한 번씩 바뀌는 것이 과연 브랜드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캠페인과 슬로건은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적어도 2년 이상은 바뀌지 않고 지속된 것들이었다. 참여한 캠페인 중에 5년을 넘게 슬로건과 톤을 바꾸지 않고 이어간 캠페인이 있었다. 기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사회를 위한 메시지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꾸준히 끌고 간 캠페인은 사람들에게 기업의 이미지를 바꿨고, 기업의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브랜드 슬로건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기업 내부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우리 기업의 지향점은 이런 것입니다.’를 한 마디로 전달할 수 있는데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기업의 구성원들이 브랜드가 지향하는 바에 합의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합의의 과정도 ‘브랜딩’이다. 사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우리 기업은 이러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합의와 약속이 일정 시간을 두고 체화되고 반영될 때,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확립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를 위해서도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TV광고에서 디지털 콘텐츠로 매체 환경이 변하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단편적인 콘텐츠의 다발적 노출이 더 효율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콘텐츠의 순간적인 반응만 보지 말고, 브랜드에 대한 장기적인 고민도 진지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있는지, 없다면, 그것부터 확립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있다면, 지금의 콘텐츠가 얼마나 그것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TV로 집중되어 있던 매체가 여러 채널로 파편화될수록 모든 콘텐츠를 관통하는 아이덴티티는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순간적인 반응만을 고려하며 매년 캠페인을 바꾸는 에너지를 한 번쯤은 브랜드의 본질을 고민하는데 투입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매체 환경이 다양해지고 급변할수록, 결국 살아남는 브랜드는 아이덴티티가 확실하고, 이를 직원부터 소비자까지 확실히 알고 있는 브랜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바뀌지 않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위에서, 그 브랜드를 멋지게 빛내 줄 크리에이티브를 해보고 싶다. “어떤 브랜드의 어떤 콘텐츠처럼 해주세요. 이슈만 만들면 돼요.”라는 말보다는 “본질부터 함께 고민해볼까요?”라는 말을 듣고 싶다.
무대에 서는 입장에서 새 옷, 화려한 옷은 언제나 탐난다. 하지만 대중이 기억하는 사람은 늘 같은 옷을 입을지언정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양희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