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버넷 최혜정 CD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표정이 있지만, 불행한 사람들에겐 제 각각의 표정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리나"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이 글이 내게는, "좋은 광고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불행한, 잘못된 광고에는 천 가지 이유가 제각기 있다" 라고 들린다. 해마다 돌아오는 뉴욕, 런던, 클리오, 칸느 등 세계적인 광고제를 치르고 나면, "세계 속에 한국 광고의 현주소"란 이름 하에 많은 글들이 나온다. 광고제에서 상을 받으려면.. 이라는 부담스러운 족집게 세미나가 열리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모든 광고제에 심사기준은 분명 있다. 하지만 알고 나면 우리가 모르는 것도, 새로울 것도, 무릎을 쳐야 할 것도 없다.
이 칼럼을 맡고 나서 그리 속이 편하지 않았다. 심적으로도 꽤 부담이 되었다. 자신의 예도 아니요, 동료의, 회사의 예도 아닌 남의 나라 작품을 예로 들며 행여 우리의 현실을 초라하게 만들고, 좋은 광고를 만들지 못하는 백가지 한국적 상황에, 한가지 이유를 더 더한다고 하면 그게 어디 속 편한 일이겠는가. 다행이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최근의 나이키 미국 편을 제작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Kash Sree (전 Wieden&Kennedy 근무, 현 레오버넷 시카고 CD겸 부사장.
2002년 칸느 및 세계 광고제를 휩쓴 사람)를 면대면으로 잠깐이나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의 강연과 인터뷰 기사, 몇 가지의 대화, 그리고 몇 개의 TVC에 얽힌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번 달 컬럼을 풀어볼까 한다. 서론이 길어져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광고에는 "사람"이 들어있다, 그것도 제대로 살아서 들어있다. 좋은 광고에는 사람이 산채로 들어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나이키 광고를 통해 들여 다 보겠다. 첫째는, 나이키의 ''Beautiful''광고이다. 이 광고에는 "진짜사람"이 들어있다.
이 광고는 Just Do It 이라는 나이키의 명 캠페인 아래 만들어진 광고이다. 운동 선수들이 훈련과 경기를 통해서 얻는 신체의 변형과 몸으로 받은 훈장들을 스스럼 없이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다큐멘터리적인 광고이다. 이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짜이다. 이들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 또한 진실이다. 내추럴하다. (우린 흔히 내추럴하다를 밋밋하다 혹은 맹숭맹숭하다라고 생각하는데, 자연스럽다가 적어도 꾸미지 않았다와 같은 뜻이라고 본다면 결코 밋밋하다와 동일한 뜻은 아니다.
내추럴하게 꾸미다 보니, 내공의 힘이 약해 무미해 보이는게 문제지만...) 만약 이 광고의 인물들이 가짜들이었다면, 이 광고에서 오는 진실의 힘은 반의 반으로 줄어 들었을 것이며, 이들이 가짜임을 제작자가 알고 있다면, 이는 역시 보는 사람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낡은 가족 앨범 속의 한 인물을, 스튜디오에서 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진실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일이다. 진실은 연출이 아니라 발견이다. 만드는 사람 스스로가 감동 받아야 감동을 줄 수 있다. 이것이 Kash Sree가 말하는 좋은 광고를 만드는 방법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 사람에 대한 진실, 그리고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진실"을 담는 광고, 좋은 광고의 첫번째 조건이다. 음악은 "You are so beautiful to me.." 당신은 내게 아름답습니다라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곡을 선정하였다.
느낌을 탁탁 끊어버리는 매끄러운 성우의 멘트 없이도, 생각할 여운을 두지 않는 나레이션 없이도,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이 광고에서 비주얼은 진실을, 오디오(뮤직)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콤비는 나이키의 여러 광고에서 하나의 포맷으로 나타나고 있다. (뒤에 나올 "shade runner"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이키스러운 광고를 만드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두 번째는 나이키의 "TAG" 편이다.
이 광고에는 "놀이하는 사람"이 있다. 나이키가 "Life is a game"이라는 기치아래 펼쳤던 ''Just Do It''이란 캠페인에서 "Life is a Play"란 캠페인을 시작한 후 만든 광고이다. "TAG"란 어린시절 놀이 이름이다. 술래가 다른 사람을 좆아가 "찜"하면 그 사람이 술래가 되어 다른 사람을 쫓아가 "찜"을 하고, 사람들은 안잡힐려고 도망을 다니는 놀이로, 아마 전세계 어린이들이 다 하는 놀이이다.
이 광고가 칸느에서 상을 받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저게 뭐야 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건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캠페인 "인생은 놀이이다"라는 틀을 미쳐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어린시절 놀이를 잊었던지... 모든 어른들 속에는 아이가 들어있다라는 말처럼, 모든 사람들의 경험 속에는 놀이하던 추억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이 광고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엑스트라들의 연기이다. 동선을 그려가며 연출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연출은 의외로 간단했다고 들었는데, 연기지시를 원하는 엑스트라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무조건 잡히지 말고 뛰어" 그래서 그들은 주인공이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잡히지 않으려고 움직였다. 몇몇 컷이야 잘 짜여진 움직임이 있었겠지만, 엑스트라들의 생생한 움직임은 그들이 진짜 놀이에 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같은 캠페인하의 "shade running" 이다.
이 광고에서도 역시 "놀이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놀이하는 사람은 진지하다. 흔히 놀이라 하면 웃고 떠들고 즐겁게 어영부영 대충대충 봐주고 하는 게 놀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이들이 모여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다. 심지어 유치원마당에서 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얼마나 진지한가 하면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꽉 입술을 깨문 꼬마가 왕 구슬을 들고 거리를 재며,
박세리의 버디 퍼팅만큼 긴장하고 있고, 손에 땀이 자꾸 배어서 바지춤에 쓱쓱 거리기를 몇 번씩 한다. 자유투를 던지려는 아이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본 적 없다. 그게 진짜 놀이다. 이 광고는 그림자 밟기 놀이를 재현한 것으로, 음악은 여자의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의 "You are my sunshine"이다. 놀이는 그림자 밟기 놀이지만, 음악은 당신은 나의 햇살이다. 음악을 다 알아듣는 영어권이라면, 이 묘한 부조화 속의 손짓이 더 잘 전달되었을 것이지만, 7번 이상의 내노라 하는 유명인의 창작곡을 버리고, 다시 되돌아가 아마추어적 보이스와 악기로 편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놀이의 진지함과 개인적 감정이 음악을 통해 더욱 증폭되기 때문이다.
음악이 비주얼을 누르지도 않으면서, 나란히 가지도 않으면서, 각자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광고를 만든 사람은 이 광고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광고책 너무 많이 읽지 말고, 읽을 거면 혹시 비슷해질지 모르는 모방광고를 경계하는 차원에서만 참고하세요. 광고의 영감은 사람과 인생에서 나오며,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만 나온다고 봅니다. 아는 건만 말하세요. 모르는 건 몰라도 됩니다. 결국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지요" 라고. 네 번째는 나이키의 "Tailgating"이다. 꼬리를 쫓아 다니는 "Play" 캠페인 중의 하나로 실제의 경험을 사람으로 전환시킨 광고이다.
이 광고에 나오는 젊은 사람은 "강아지"의 대역이며, 신사어른은 CD의 대역이다. 친구 집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심심한 한 강아지가 40여분을 주인공의 꽁무니를 쫓아 다녔다고 한다. 15년 후 "PLAY" 캠페인의 놀이를 찾던 중, 추억이 생각나 만든 광고라고 한다. 그냥 추억의 경험 중 하나였다면,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경험을 통해 "아하!" 하고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 경험은 보편화 될 수 있다. 경험의 단순 복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한 깨달음의 재현이다.
무슨 화두처럼 느끼지만, 사실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깨닫는 게 있으며, 이러한 느낌은 재현을 통해 타인에게도 전달이 된다. 이 광고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보여준다. 아무도 안 놀아준다. 심심하다. 모두들 바쁘다. 놀고싶다. 정말 놀아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한번 놀아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놀지 않는다. 한번만.. 한번만.. 딱 한번만이라도..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조르듯 젊은 이는 지나가는 신사를 붙들고 늘어진다. 끈질기다. 결국 신사는 놀아준다. 나이키는 "Play"란 캠페인을 통해서 "인생은 놀이다"를 전달하고 있다. 공감을 얻는 것은 사람의 맘속에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건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여주는 방법 중의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이키 광고가 항상 성공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나이키의 "HORROR"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광고는 앞에서 말한 나이키의 예와 다른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속 살인자의 이미지로 분한 사람이 쫓아와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의 비명을 어둠 속에서 그려낸 이 호러 편을 통해서 나이키는 악동의 이미지를 얻었으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진 많은 사람들이 총총이 대행사 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 광고에 덧붙여 들은 말을 전하면, 미국의 홈런왕 기록을 보유했던 Babe Ruth는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로 스트라이크 아웃 최다 기록이다. 홈런을 치러 타석에 들어 섰다면,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힘있게 휘둘러야 홈런이 나오고, 헛스윙을 하면 아웃을 당하는 것이다. 좋은 광고는 시행착오도 따른 다는 말이다. 인생처럼 말이다. 누군가 말했다. 21세기의 광고는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Brand를 파는 것이라고. 그리고 브랜드가 살아있어야 할 곳은 사람들의 마음 속이다. 그래서 그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려면, 먼저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람들 속에 너무 섞여 있어서도 안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야외 카페에 앉아서, 아니면 야구경기장 관람석에 앉아서 서너 시간 꼼짝도 않고 사람들을 한번 관찰해 본다면 무엇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TV속에 그려지는 전형적인 사람들의 모습, 끼리끼리 너무 붙어있어 모두 다 그런 줄 아는 모습, 사람을 숫자로 표시하는 각종 조사와 데이터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 "산 사람"을 관찰해 보는 것. 그리고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산채로 광고 속에 넣어 보는 것".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말고(광고주핑계를 대지 말고), 자신의 상상력에도 넘어가지 말고 만드는 광고, 그런 광고라면 좋은 광고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 최혜정 Creative Director, Leo Burnett,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