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분다. 왔구나 겨울. 최고의 술안주가 마련됐다. 날이 쌀쌀해질수록 목을 타고 흐르는 독주는 더없이 짜릿한 맛을 안겨준다. 연말을 즐기기 위한 술이라면 역시 위스키다. 뜨거운 기운이 가득한 위스키 한 모금에 노곤해지는 몸, 풀어지는 마음, 살짝 센티해지는 기분. 그 순간에 다시 위스키 한 모금, 최고의 리듬이다.
돌아보면 위스키를 처음 마셔본 곳도, 가장 최근에 마셨던 곳도 모두 Bar였다. 위스키는 니트(neat)로 마셔도 온더락으로 마셔도 좋지만 수준급의 바텐더가 있는 Bar에서 즐긴다면 잘 고른 위스키 한 병으로 다양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어서 좋다. 늘 사람을 상대하고 말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광고인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소중해지기 마련이기에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은 Bar는 일종의 오아시스다. 혼자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Bar, 그곳에서 누리는 연말의 밤을 빛내줄 위스키 3선을 소개해본다.
광화문 바르도(BARDO)와 위스키 Infrequent Flyers
출처 alistairwalkerwhisky.com
광화문의 터줏대감 건물, 세종아케이드 지하에 위치한 바르도. 이곳은 간판과 문조차 잘 찾을 수 없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그 점이 마음에 꼭 들었다. 아무나 오진 않겠군. 미리 찾아보고 오는 사람이거나, 한번 와봤던 사람이 다시 오게 되는 곳, 혼자 마시기에 더없이 마음이 편한 곳이라는 의미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실과 단절되는 느낌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을까? 좁은 공간이지만 공간 자체의 아우라가 너무나도 강렬한, 그동안 다녔던 Bar와는 다른 분위기를 지닌 곳. 뭐랄까, 고급 취향을 가진 사람의 아지트 같은 곳이랄까.
메뉴판에 써진 바르도의 리추얼대로 칵테일과 하이볼 몇 잔을 하고 나자 먼저 왔던 손님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사장님과 단 둘이 있는 타이밍은 Bar에서 보내는 시간의 클라이맥스다. “하이볼 좋아하시나 보네요” 들어온 지 50분 만에 말을 걸어주신 사장님과 그때부터 시작된 술에 대한 대화들. 그 끝에 보물 같은 위스키를 알게 됐다. 글렌 알라키를 만든 빌리 워커의 아들, 알리스케어 워커가 만든 Infrequent Flyers가 바로 그것이다. 듣는 것만으로 괜히 초조해지게 만드는 이름, 생경해서 더 호기심이 가게 하는 레이블, “이 세상에 이 위스키는 696 보틀만 있는 거예요” 희소가치를 느낄 수 있는 스토리. 아버지 위스키인 글렌 알라키와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는 풍미와 맛. 모든 요소들이 이야깃거리가 되어 술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첫인상은 후추 맛, 쭉 이어지는 건 아몬드 맛에 가깝고 공기와 맞닿으면서 점점 다채로운 색깔을 펼치는 Infrequent Flyers. 좋은 음악과 함께 홀짝거리고 있자니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싶어지는 기분. 새삼 바르도라는 이름이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죽음과 환생 사이의 상태를 말한단다. 말 그대로다. 이 한잔으로 새삼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논현동 라운지,많과 위스키 OBAN 14
출처 @Obanwhisky @ lounge_manh
“방금 우리는 끝내주는 뉴스를 했어. 어떻게 했는 줄 알아?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정했으니까.”
대략 3,603번쯤은 본 최애 드라마 <News Room>에 나온 대사다. 변화와 도전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다짐을 앞두고 있다면 드라마의 주인공이 그랬듯 응당 OBAN 14를 마셔야 한다는 것.
논현동의 라운지,많은 나에게 집만큼 소중한 공간이다. AE 대리 시절부터 플래닝 팀장이 된 지금까지 일이 잘 풀릴 때나 안 풀릴 때, 혼자서라도 기념하고 싶을 땐 이곳으로 간다. 얼마 전 PT 승전보를 받았던 그날도 어김없이 행선지는 라운지,많이었다. “우리 팀 정말 멋있다” 수없이 했던 생각을 한번 더 되뇌며 OBAN 14를 주문한다. 기분이 달아서 그런 걸까? 술이 달다.
OBAN 14의 테이스팅 노트들을 검색해보니 허니 맛이 제일 먼저 치고 올라오는 술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달짝한 맛이 첫인상에서도 잔상에서도 가장 길게 느껴진다. OBAN 증류소가 스코틀랜드의 서부 해안 항구인 OBAN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감도 좋은 위스키 애호가들은 OBAN 14에선 바다향이 난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그 정도 애호가는 아니라서 바다향까지는 못 맡았지만 어떤 안주랑 먹으면 맛있을지는 알 것 같았다. 과메기 혹은 방어회와 같은 숙성된 해산물과 곁들이면 스코틀랜드 항구의 향은 물론이고 눅진한 단 맛이 더 감칠맛 나게 느껴지지 않을까. 서울에서도 가장 분주한 동네 논현동에서 항구를 떠올리며 각오와 승리의 OBAN 14를 맛보는 시간, 이것만으로도 연말을 행복하게 보내기에 너무나도 충분하다.
제주시 THE BOOZE와 위스키 글렌피딕
출처 @glenfiddich_kr @theboozejeju
제주 여행에서 즐길 수 있는 술 하면 한라산 소주나 오메기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 슬그머니 글렌피딕을 끼워 넣고 싶다. 이유가 있다. 글렌피딕은 스코틀랜드의 맑은 천연수인 ‘로비듀’ 만을 사용하며 133년 동안 더프타운 지역의 천혜의 환경을 양껏 활용해 만들어지고 있다. 제주에 위스키 증류소가 있다면 글렌피딕과 꼭 닮은 위스키가 탄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마시는 글렌피딕, 이 하나만을 목표로 제주 여행을 다녀와봤다.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THE BOOZE는 지도를 봐도 찾기 어렵다. 출입문부터 신박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가보고 싶은 분들은 한번 탐험해보시라. 거기서부터 THE BOOZE에서의 시간이 시작되는 거니까!
이곳의 바텐더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무엇을 주문하던 기대 이상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주문해봤다. 글렌피딕 12로 하이볼부터 갓파더까지. 마셔보니 소문 그대로였다. 니트로 마셨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풍미가 퍼지는 하이볼과 아마레또를 감싸고 만들어내는 비터스위트한 갓파더는 그 어떤 bar 보다 훌륭했다. 제주에 있다는 기분도 한몫했겠지만, 술과 고객을 대하는 바텐더들의 태도가 맛으로 이어졌다. 내가 몇 모금에 나눠 마시는지, 어떤 속도로 마시는지, 어떤 안주를 집어먹는지를 보는 척 안 보는 척 다 보면서 최고의 맛을 이끌어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에 일종의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새해를 맞이할 각오와 다짐이 생겼다. 보다 정성스럽게 살아보리라. 나도 하면 해!
연말의 남은 휴가를 소진하기 위해 제주 여행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늘 가던 제주 말고 새로운 제주를 즐기고 싶다면 꼭 THE BOOZE를 찾아가보시길. 그리고 이곳에서 스코틀랜드의 삼다수인 로비듀로 만든 글렌피딕을 곁들여보길 바란다. 혼자여서 좋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초록색 병에 담긴 현대인들의 암브로시아로 또 일 년 멋지게 살아갈 용기가 생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