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활자를 접하게 된다. 그 활자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 매체 속 활자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소통하고자 한다. 친구 사이의 소통, 가족 간의 소통, 조직에서의 소통, 기업과 소비자의 소통… 이처럼 소통의 매개가 되어주는 활자가 최근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이 현상이 광고 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가능성을 짚어 본다.
글 | 박윤정 윤디자인연구소 디자인총괄 이사
최근들어 기업들이 보다 친밀한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글꼴을 활용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현대카드, 아모레퍼시픽, 네이버, 비씨카드, 하나금융그룹 등 국내 많은 기업들이 앞 다투어 소비자와의 소통을 넘어, 기업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각인시키고자 기업서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영국의 Times나 미국IBM의 City Medium, 런던지하철의 Underground, 파리 지하철의 Parisine 등 우리 보다 앞서 기업이나 기관의 서체를 개발해 적용하고 있던 외국의 사례들보다 적극적으로 국내 기업들이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통합하는 중요한 요소로 서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인 일이다.
한글, 기업의 문화적 코드로 부상
이러한 기업서체의 큰 흐름에도 사용범위나 목적 등에서 몇 가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매개로 기업의 문화적 코드로 부각시켜 기업이미지를 상승시키는 유형이다. 네이버의 나눔고딕과 나눔명조나 조선일보 서체, 공기관인 서울시의 서울한강과 서울남산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개발한 글꼴을 해당 기업에서만 독점으로 사용치 않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료로 배포한 사례는 해당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두 번째, 기업이미지와 매치되는 전용서체 개발로 기업이미지를 확고히 한 유형이다. 현대카드의 유엔아이(Youandi)체, 하나금융그룹의 하나체처럼 기존 로고타입에 충실하게 개발되어진 전용서체로 단순한 활자가 아닌 하나의 기업 정신으로 보고 내·외부 사인(Sign)류나 광고물, 제품 등 회사 전체 글자 정보 체계에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물론 개발된 기업서체는 철저한 관리하에 회사 관련 홍보물이나 광고 등에 전용으로 사용된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어 CI(Corporate Identity) 개념의 확장, 혹은 연장선상에서 기업서체를 활용한 사례로 전형적인 기업전용서체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SK 뫼비우스체나 비씨카드의 비씨카드체 등의 경우로 위의 두 사례의 절충형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서체 개발 후 기업의 전용서체로 광고, 홍보물 등에 활용하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업사이트를 통해 무료 배포 하는 형식으로 고객과 만나는 다양한 접점에 적용하는 체험 마케팅의 새로운 도구로 서체를 할용했다. 문화 기업으로써의 이미지도 충족하고 내부 임직원들이 가지는 자부심까지 얻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렇듯 우리는 활발한 기업서체의 움직임을 접하고,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유행처럼 무작위로 개발되거나, 트렌드에 부응하느라 급하게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발하고자 하는 기업의 사용목적과 범위, 기업의 이념에 적합한지 검토해 봐야 하고, 기업 내에서의 표준화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이에 앞서 개발된 기업 서체는 서체가 가지는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글이 가진 조형미를 최대한 살려야 하고, 활자가 가진 기본 역할인 가독성에 전혀 무리가 없는, 그리고 해당 기업만의 독특한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서체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세 가지 방향에 충실한 기업 서체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하고 활용될지는 눈여겨봐야겠다.
런던 지하철의 언더그라운드(London Underground)
영국 런던의 지하철은 붉은색의 둥근 원을 배경으로 군청색바 위에 하얀색의 산세리프 글자가 지명을 보여 준다. 이것이 에드워드 존스턴(Edward Johnston)이 만들고 런던을 상징하게 된 존스턴 산스(Johnston Sans)이다. 1930년에 만들어진 후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글자가 수정됐고 런던 운송국이 이를 상업용으로 사용하도록 개방하면서‘런던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존스턴서체는 1970년대에 들어 다른 서체로 대체될 운명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수정, 보완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존스턴의 서체는 기업이미지를 위한 최초의 서체라는 의미와 함께 영국이라는 대도시의 구석 구석을 누비는 얼굴이 되고 있다.
서울시의 서울한강체, 서울남산체
문화가 경제적 부가가치를 지닌다는 컬처노믹스를 새로운 발전전략으로 삼은 서울시에서 문화선진도시로서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펼치고 있는 공공디자인 개선정책 중 하나로 개발된 서울이 가진 역사성, 전통성, 문화성, 사회성 등의 심층적 고찰을 바탕으로 두 서체는 세련되고 소프트한 현대적 감성을 담았다. 한강체와 남산체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며, 단순한 구조와 간결한 형태는 여유로운 멋과 편안함을 보여주고 있다.
윗쪽으로 정리된 무게중심은 가로쓰기 환경에서의 가독을 좋게 하였다. 국내에서 개발된 기관 서체로는 가장 폭넓게 활용되고 있고 범용적인 활용을 위해 현재 추가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지속 가능한 디자인 실현을 위한 행보가 기대된다.
더 타임스사의 타임스(Times)
영문 서체 중 세리프 서체의 대표라 할 수 있는‘Times체’는 영국의 대표적 일간지 더 타임스사가 스탠리 모리스에 의뢰해 만든 기업서체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견고하고 사무적인 느낌으로 디자인 되었기 때문에 신문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의 본 뭄 타이포그라피에까지 훌륭하게 적용되고 있다. ‘Times체’는 개발 후 1년만 독점 사용권을 가진 다음 일반 대중에게 공개, 보급 되었다.
비씨카드의 비씨카드체
비씨카드 기업서체는 새롭게 제작된 비씨카드사 CI의 영문로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비씨카드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감각적인 영문과 숫자를 포함,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가진 서체이다. 견고한 구조와 획 끝 부분의 굴림, 정원에 가까운‘ㅇ’꼴, 비대칭적인‘ㅁ’, ‘ㅂ’꼴의 형태가 특징인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의 서체로, 신뢰감 있는 기업의 고객지향 커뮤니케이션을 표현한다.
BC카드 전용서체는 도입 후 로고와 사인물, 고객 이메일 서비스 등에 사용되어지면서 점점 그 사용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타사에 비해 영문과 한글의 조형감과 디자인적 특징이 잘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 장점으로, 샘플 이미지에서와 같이 한 광고물 안에 한글과 영문이 조화롭고 일관되게 사용되어 BC카드만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의 하나체
하나체의 경우에는 기존 하나금융그룹의 로고타입을 기준으로 현대적인 미감에 맞게 수정, 보완하여 개발한 사례이다. 기존 기업서체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 로고 타입에서 본문으로 사용가능한 서체, 한정된 공간에 활용이 편리하도록 폭이 좁은 서체등으로 확정된 서체가족군(Ultralight, Light,Medium, Bold, Condensedmedium)을 개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객 접점의 온·오프라인 환경에 일관된 서체를 활용하고, 캠페인 위주의 TV 광고에도 기업이미지와 조화로운 전용서체를 적절하게 잘 사용하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