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에서 타니카와까지
안도현 없었으면 연탄,
어쩔 뻔했어?
이광수 | The SOUTH 제작그룹 CD auster.lee@cheil.com
자기희생을 말하는 이 구절, 유명하다. 학생도 좋아하고 직장인도 좋아하고 죄다 좋아한다.
한번은 신문에서 전 복지부장관이 이 시를 가장 좋아한다는 글도 읽었다. 다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 은행의 TV광고에까지 등장했다.
시를 쓴 안도현이란 시인을 모르고, 시 제목인‘너에게 묻는다’도 금시초문인 사람들이 이 시구만큼은 들어봤다고 말한다.
평소엔 보이지 않다가 한 겨울이 되어야, 그것도 허름한 산동네 골목쯤은 되어야 대문가에 허연 몸뚱이 웅크리고 있던 그 연탄.
하루 몇 장이면 방도 데우고 밥도 지어 먹고 비에 젖고 눈에 언 신발도 녹이고 말리고 했던 원소스 멀티유즈의 그 고마운.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불을 갈 시간을 깜박 놓치면 얄짤없이 냉방을 만들어 버리고 쿨럭,쿨럭, 그 독한 가스로 숱한 어린 생명들을 골로 보냈던, 그 서럽던, 연탄.
요즘 사람들에게야 먼 옛날 추억의 한 장면이거나 그도 아닌 어린 나이에겐 TV드라마에서나 봤음직한 물건인데… 이 시 때문에 연탄이 좋아졌다는 사람 많이 봤다.
야… 연탄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머리 뿌리가 흰 파뿌리 되도록 한 세기를 불타올랐더니 결국 빛 봤다, 빛 봤어.
어떤 문화 콘텐츠가 그 소재를 좋아하게 만드는 일, 사실 흔하디 흔하다. 연탄시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원래 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시구 때문에 국수를 더 좋아한다.
멸치 국수든, 바지락 칼국수든 내겐 차이가 없다. 심지어는 냉장고에 남은 아무 재료나 모아 넣고 부글부글 끓여낸 뜨끈한 국물에도 국수 면만 들어가 있으면, 나는 국수라 불러주고 맛있게 먹는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가 말했다. 나는 국수라는 음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국수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거라고.
연탄이 그저 방바닥을 데우는 시커먼 석탄덩어리고 말면, 국수가 그저 길다란 밀가루면으로 만들어 내는 음식이고 말면, 그렇게 정색을 하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그 안에 가슴을 데우는, 영혼이 입맛을 다실 만한 뭔가 담겨 있지 않다면 말이다.
사실 지금 나는 우스꽝스럽도록 당연한 이야기를 마치 새로운 이야기인 양 시치미 떼고 하고 있다. 붉은 장미로 사랑을 고백하는 까닭은 그것의 꽃말이 열정적인 사랑이기 때문이고, 여자들이 다이아몬드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그것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된 사물에는 표준화된 겉인식- 표의와 끊임없이 생성되고 구축되고 변화하는 속인식-함의가 있다.
평범했던 뭔가가 크리에이티브한 것으로 변하는 순간은 함의와 관계가 깊다. 표의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이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식이다. 그것을 마음대로 바꾸면 소통 자체가 어려워진다.
앞서 이야기한 연탄을 보자. 연탄이 뭐냐고 묻는다면, 우선 무연탄을 주원료로 만든, 타고 나면 흰색으로 변하는 난방원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이는 스물 몇 개의 구멍으로 연탄을 말할 수 있겠고, 또 어떤 이는 겨울 언덕마다 부수어 뿌린 미끄럼방지제로서의 연탄을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다 연탄의 표의다. 연탄의 겉모양이나 쓰임새 등에 대해 사회적으로 약속하거나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연탄의 함의라 말할 수 있는 건 어떨까. 안도현 이전에는 글쎄…
고마운 연탄이든 서러운 연탄이든, 연탄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심상들은 가난, 과거, 달동네와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자기희생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안도현이란 한 시인이.
함의는 언제든 새로 생성되고 구축된다. 세상이 바뀌는 만큼 새로운 함의가 만들어질 뿐 아니라,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얼마든지 새로운 함의는 만들어질 수 있다. 무한하다.
세상 사물들의 함의가 무한하다는 것이 바로 크리에이티비티가 무한할 수 있는 한 이치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그 무한한 크리에이티비티의 발화점에 대한 것이다. 뻔하고 평범했던 뭔가가 크리에이티브한 것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새로운 함의를 갖게 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오규원이란 분이 그랬단다.
“기계적인 우리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을 현대시작법이란 책에서 ‘미적 인식’이란 말로 쌈빡하게 정리하셨단다.
안도현은 자기의 시작법(詩作法) 책에서 오규원을 소개하며 “당신이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말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비타민C의 역할을 밝혀 노벨상을 받은 알베르트라는 분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크리에이티비티의 내용은 달라도 작동방식엔 유사성이 있는 것이다.
미적 인식의 반대말은 추한 인식이 아니라 죽은 인식이다. 미적 인식은 평범한 소재를 특별하게 살리고, 아무리 좋은 소재라도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새로움을 잃고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죽은 인식과 미적 인식. 쉽게 말하면 촛불과 연탄되겠다.
신석정 이후로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상투적인 자기희생의 오브제, 촛불. 물론 처음엔 놀라웠을 것이다. 촛불을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러나 반복되고 반복되면 상투성만 남게 되는 것. 초등생 미화전의 시에 등장하면 모를까….
자기희생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촛불밖에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표현력의 부족 이전에 새로운 인식능력, 오규원에 따르자면 미적 인식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세상 사물을 보고‘딴’생각을 너무 안 하면서 살아서 그런 것.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우리는 왜 좀 더 자주 ‘딴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 이유를 로저라는 분이 <크리에이티브 씽킹(Creative Thinking)>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
이를테면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할 때, 거울을 보거나 차에 시동을 걸거나 신호등 앞에 멈춰 설 때 굳이 ‘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아마 사무실에서 일을 할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을 포함한 우리의 일상은 습관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좀 더 공정하게 말하면 ‘지배’가 아니라 ‘도움’이다.
오랜 시간 문명이 발전하고 문화가 축적되면서 아주 짧은 시간에‘그런 고난이도의 행위를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도록 ’우리가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사고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도 필요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딴 생각’이 필요한 창의적인 일을 해내야 할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바로 바로 필요한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 필요한‘계산’을 위해 덧셈을 배웠고, 사장님의 연설문을 교정하기 위한 국어 교육은 받았지만, 그때까지 배워온 학교 교육이라든지 그 어떤 교육에서도‘딴 생각’과목 따위는 없었단 말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군대를 갔다 오니 배워야 할 과목이 바뀌어 버린 나이든 복학생처럼 꾸역꾸역 다시 공부할 밖에.
이런 광고라면 위로가 될까. 나를 비롯한 모든 늙은 직장인들아, 학교도 졸업했으니 이제 공부합시다!
김선우라는 시인이 산문집에서 이렇게 썼다.
“고여 있던 촛물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나 주르륵 흘러 넘칠 때, 그것이 오래 울음을 참은 이의 눈에서 느닷없이 터지는 한 줄기 굵은 눈물임을.”
촛불=자기희생의 진부한 메타포를 지나 촛물=눈물의 새로운 함의를 확보하는 문장 되겠다.
평범했던 뭔가가 크리에이티브해지는 순간, 그것은 바로 미적 인식을 통해 새로운 함의를 발견했을 때이다.
좋은 광고의 뼈대가 되어준, 미적 인식을 통한 새로운 발견이 돋보이는 시 두 편을 소개하겠다.
윤제림이란 사람, 멋지지 않은가? 바닷가에서 바다만 바라본 게 아니다. 회를 집어먹고 소주를 들이키며 수평선만 본 게 아니다.
타니카와 라는 사람, 멋지지 않은가? 캄챠카로 시작하는 이 시가 당신의 마음에 내려앉는 순간, 당신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아침의 릴레이를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