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때가 있었습니다. 마흔 넘은 팀장님이 경제?경영서가 아닌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제겐 ‘그 남자’가 다시 보였습니다. 밥벌이에 인생을 다 내주지 않은, 자신만의 결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입니다. 해서, 이 달엔 소설입니다. 가을은 소설 읽기에도 좋은 계절이니까요.
이 달의 소설은 김훈의 신작, <흑산(黑山)>입니다. 소설 얘기를 하기 전에 그의 문체 얘기를 잠시 할까 합니다. 그의 글은 매우 단문(短文)입니다. 짧은 문장들을 쫓다 보면 읽는 저 자신의 호흡이 빨라질 만큼 그의 문체는 가파릅니다. 설명을 생략한 채 곧바로 한가운데로 나아가죠. 그렇게 고른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엔 비장미마저 흐릅니다. 우회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 대결만을 펼치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요. 군더더기 다 잘라내고 정수(精髓)만을 말하는 그의 문장이 저는 좋았는데, 그의 이런 문체야말로 이 소설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길게 설명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저 짧게 묘사하고 읽는 사람이 느끼게 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소설 <흑산>은 한 마디로 이조 말기의 엄혹한 천주교 박해이야기입니다. ‘사학쟁이’ 정약용의 형, 약전의 흑산도 귀양을 한 축으로 하되 조카 사위, 황사영 등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하죠. 글도 모른 채 입으로 입으로 천주교를 전해 듣고 귀의한 수많은 민초들이 나옵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다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이들을, ‘서캐보다 못한 천한 것들’의 내면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묘사합니다. 어떻게 해서 천주를 믿게 되었는지를요. 한데 이러한 구성에 이 소설의 개성이랄까 약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디테일을 잡다보니 전체를 놓쳤달까요. 사건과 서사가 맞물리고 등장 인물들의 운명이 연결되어 전체 그림이 그려져야 장편 소설이라 할만 할텐데 각각의 인물들은 타자의 운명에 별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연결이 덜 되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장편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제가 논할 게재가 아니고 저는 다만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서도 그 길로 나아가게 했는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순전한 마음을 지키는 자와 결국은 돌아서는 자로 갈리는 그 갈림길에도 눈길이 갔는데, 생을 마다하고 먼 길 향해 떠나는 자, 그들의 그 간절한 마음에도 가 닿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선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중 넷째 정약용이 아닌, 약전이 중심입니다.
흑산이기 때문이겠지요. 약전은 사학쟁이로 잡혀 국문 당하다 겨우 사형을 면하고 흑산도로 귀양 갑니다. 당시의 시대상이기도 한 어두움. 캄캄함. 그 캄캄한 섬, 흑산도(黑山島) 말입니다. 그리곤 다시는 살아 나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거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소설 제목이 ‘흑산도’가 아니라 ‘흑산’인 것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흑산도가 흑산이 되는 순간 구체적인 지명을 떠나 추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반도 남쪽의 섬이 아니라 어둡고 암울한 세상, 한 마디로 희망 없음 말이죠. 이런 캄캄함 속을 당대의 지식인, 약전은 물고기를 관찰하는 것으로 통과합니다. 그 속에 모든 한과 분노와 안타까움을 담고서 말이죠. 이렇게 해서 그가 남긴 물고기 생태 관찰 기록이 자산어보(玆山魚譜) 입니다. 그의 동생, 정약용 또한 천주를 부인하고서야 살아남은 뒤 18년간 수많은 책을 지어 실학을 집대성합니다. 그렇게 그는 분노의 세월을 건너 대실학자로 살다 갑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화가 차 오르고 앞이 막막한 세월과 마주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캄캄한한때, ‘산’을 어찌 건너시는지요. 위대한 인물들은 각자의 흑산을 에너지 삼아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새로 쓰기도 합니다. 평범한 이들에게도 인생의 크고 작은 흑산은 그것을 극복하고 삭이는 과정에서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열어 주는 지렛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흑산을 건널 방법,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하겠지요.
십일월이 되도록 후덥지근하더니 이제야 하늘 높고 바람 찬것이 늦가을 답네요. 저는 일년 중에 이맘때가 제일 좋은데 이달도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소중한 건 늘 얼마 되지를 않나 봅니다. 아끼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