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인 앤디 카우프만의 일생을 다룬 <Man On The Moon> 라는 영화가 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앤디 카우프만’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았다. 보고 나서 어떻게 하면 사는 내내 이 인물을 잊지 않으며 살 수 있을지를 조금 두려워하며 고민했을 만큼 이 영화는 나에게 아주 크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일반적인 코미디언과는 조금 다른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기발한 말솜씨를 가지고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의 기본적인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상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진짜로’ 대중을 속이고 혼란을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웃지 않아도, 심지어 불쾌해해도 개의치 않았다.
소심한 외국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인지도를 얻은 뒤 본격적으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가 시작되었다. 그는 호리호리한 자신과 극단적으로 다른 배불뚝이의 또 다른 자아, ‘토니 클립튼’이라는 캐릭터를 분장으로 창조했고, 그 모습으로 기행을 일삼았다. 또한 돌연 프로레슬러가 되기도 했으며, 방송에서 출연자와 갑자기 주먹다짐을 하며 다투어 그 모습을 지켜본 시청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후에 이 일을 진지하게 해명해야 하는 순간까지도 사전에 모의된 것이었다고 했다가 또 아니라고 했다 하면서 끝까지 대중에게 자신을 맞추길 거부했던 앤디 카우프만은 나중에 폐암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평생을 자신의 실제에 허구를 뒤섞은 퍼포먼스를 일삼았던 나머지 본인의 병마저도 쇼가 아닌가 하고 대중으로부터 의심과 의혹을 살 지경이었다.
< Man On The Moon>에서 앤디 카우프만의 역을 맡은 배우는 짐 캐리였다. 앤디 카우프만을 깊이 존경했던 짐 캐리는 어찌나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역할에 몰입했는지 이 영화를 촬영하며 카메라 밖에서도 자신이 진짜 앤디 카우프만인 것처럼 굴었다.
함께 출연하는 동료 배우와 스태프, 감독이 진짜 앤디 카우프만처럼 통제불가능해진 짐 캐리와 일하며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가 역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있다. 2017년에 만들어진 <Jim & Andy : The Great Beyond>이다.
<Man On The Moon>을 보고나서 내가 소소하게 고집을 부리며 따라 해보는 일이 있다.
무명 시절을 거쳐 어눌하고 소심한 외국인 캐릭터를 통해 인기를 얻은 카우프만이 아마도 처음 선보이는 단독 라이브 쇼 장면이었다.
그곳에 모인 수많은 인파 앞에서 그는 사람들이 보고싶어하는 예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뜬금없이 ‘위대한 개츠비’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그 생뚱맞음에 처음에 웃었던 사람들은 카우프만이 낭독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데는 아마 몇 시간이 소요되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앤디가 마지막까지 낭독을 마쳤을 때 객석에는 단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웬일인지 그 장면에 전율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이후 나 역시 ‘지나치게 긴’ 낭독에 과감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공연 중이나, 독립출판 마켓 같은 곳에서 나는 사람들이 ‘좀 길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분량의 낭독을 이어 나가 왔다.
내가 그렇게 예상을 넘어서는 시간을 들여 낭독을 이어나갈 때마다 공기는 마치 고무줄이 끊어지기 직전처럼 팽팽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가만히 앉아있지만 보이지 않게 분열하고 있다는걸 매번 느낄 수 있었다.
경청하는 일부의 사람, 너무 길게 낭독하는 거 아닌가 하고 난처해 하는 사람, 지금 나만 불편한가 눈치를 보는 사람, 대놓고 핸드폰을 힐끔거리는 사람, 은근히 내가 미워지기 시작한 사람….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낭독을 꾸역꾸역 이어가며 진땀을 흘렸지만, 그러면서도 기회만 되면 이러한 고역의 시간을 다시 반복하려고 들었다.
이 이상한 충동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예로부터 기어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여러 예술가들이 떠오른다. 고객의 요구대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창성과 상상력으로 주문받은 그림을 그려 늘 분쟁이 잦았던 화가 엘 그레코, 무서워서 끝까지 듣기 힘든 미궁이라는 곡을 연주한 황병기, 생식기에 붓을 꽂고 그림을 그리는 ‘버자이너 페인팅’ 퍼포먼스를 선보인 구보타 시게코, 또 삐삐 롱스타킹과 럭스……
예술에 임하는 정답을 논할 수 없는 여러 태도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일탈함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창의성과 유일성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절제와 성실함을 발동하며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쪽을 선택하건 예술가 쪽에서 진심으로 바라는 건 자기 자신 안에 자리 잡고 들어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놓치고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를 놓아버리고 훨훨 멀리 떠날 때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진하게 획득하게 될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일 테니까 말이다.
한창 ‘클럽하우스’ 라는 어플이 각광받던 때, 국내에서도 비슷한 애플리케이션이 론칭된 적이 있었다. (지금 그 애플리케이션은 아쉽게도 서비스를 종료했다.) 오픈 당시 홍보와 활성화를 위해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와 전문가, 인플루언서 등등에게 그 공간에서 무엇이든 활동해주기를 바라는 제안들이 있었고 나는 제안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오랜 고민 없이 그때에도 낭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홍보 없이 예정된 시간이 되었을 때 방을 만들고 들어갔다. 틀어놓은 오프닝 곡이 끝나갈 때까지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았다. 노래가 마침내 끝났고, 나는 잠시동안 망설였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입장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조용한 적막이 몇 초간 흐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
저는 어쩌다 한국에서 여성의 몸으로 잠시 살게 된 앤디 카우프만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누구 골탕먹일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여기저기를 이런저런 몸으로 여행 중인데요. 오늘은 모처럼 여기서 느긋하게 책을 읽다가 가려고 합니다. 읽어드릴 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