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았지만 그는 촉망받는 화가입니다. 차가운 파리의 허름한 방안에서 시름시름 앓는 화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죽을 때만 기다립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데도 그저 지켜만 보는 사람들. 그들이 기다리는 건 화가의 사후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으면 그의 작품 가치는 희소성을 얹고 높이 뛰어오를 것이고, 그들에게 작품을 소유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될 것이기에. 결국 그는 36세에 춥고 허름한 방 안에서 병마로 요절했고, 사후 작품 가격은 500배 이상 뛰어올랐습니다. 에꼴드파리파의 한 사람인 모딜리아니의 일화입니다.
좋은 작품을 논할 때 세상이 보는 주요 기준의 하나는 희소성입니다. 그 작가는 더 이상 훌륭한 작품을 만들지 못하기에 현존하는 작품들은 새로운 가치를 얻습니다. 살아있는 작가보다 사후의 작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기준.
‘작품’을 보는 기준은 때로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차가운 현실 또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볼 것인가는 그래서 중요해 보입니다.
올해도 칸에서는 세계의 크리에이티비티를 경쟁하는 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작품을 보는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느냐에 초점을 뒀다는 겁니다. 점차 ‘좋은 마케팅’보다는 ‘좋은 세상’에 대한 세밀한 기준을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좋은 채소를 보는 기준
슈퍼마켓이 좋은 채소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생활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EU는 마켓에서 판매할 수 있는 채소와 곡물의 품종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이른 바, ‘공식 허용 품종 카탈로그.’ 이 카탈로그에 선정된 품종만이 법적으로 인정을 받고 소비자에게 판매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품종이 세계에서 생산되는 품종의 3%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머지 97%의 채소와 곡물은 재배자에게도 판매자에게도 ‘불법 품종’이 돼 벌금을 물게 됩니다. 더 이상 재배하거나 판매하기 힘들어진 거죠. 프랑스의 슈퍼마켓 체인, 카르푸는 여기서 자신들의 기준을 정했습니다. 공식 카탈로그가 정한 품종을 따르지 않고, 법에 위반되는 품종을 파는 ‘블랙 슈퍼마켓’을 열었습니다. 카르푸만의 블랙마켓입니다.
▲카르푸 블랙 슈퍼마켓 캠페인(출처: Publicis Worldwide 유튜브)
카르푸는 공식 카탈로그에 공인된 품종들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81년에 제정된 이 법은 ‘잡종 종자’에만 판매될 수 있는 자격을 줬으며, 식품안전보다는 사업자를 위한 법이라고 판단했죠. 이 법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다양한 품종을 접할 기회도 다양한 맛도 건강도 잃었습니다. 카르푸는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인쇄 광고와 TV 광고, 포스터 등을 제작 집행했고, ‘불법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들과 5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캠페인의 파급 효과는 컸습니다. 지난 5월 EU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건강한 채소만 파는 게 아닌 건강한 생각까지 함께 팔기 시작한 겁니다.
칸은 이 캠페인에 ‘Brand Experience & Activation’ 그랑프리를 수여했습니다. 새로운 본질을 보는 ‘기준’이 건강한 작물에 대한 생각, 품종의 다양성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패셔너블한 옷을 보는 기준
SNS가 활발해지면서 의류 소비율은 60%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패셔니스타로서 인플루언서로서 멋진 모습을 SNS에 올리기 위해 더 많은 옷을 구매합니다. 하지만 한번 올린 옷은 두 번 입지 않습니다. 그만큼 버려지는 옷이 많은 거죠. 노르웨이 의류 브랜드 Carlings는 쉽게 사고 쉽게 버려지는 옷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무문별하게 소비되는 의류 쓰레기가 파괴하는 환경 문제도 심각하니까요. 그리고 세상에 없던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디지털 패션 컬렉션.”
▲adDRESS THE FUTURE 캠페인(출처: Carlings 공식 유튜브)
SNS 게시용으로 옷이 소비된다면 그에 맞는 새로운 기준의 옷을 개발한 겁니다. 나는 입을 수 없지만 사진 속 나는 입을 수 있는 옷. 앱에서 옷을 선택하면 사진 속 내가 그 옷을 입어 봅니다. 구매하는 순간, 나는 그 옷을 입게 되고 그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거죠. 실제로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지만, 옷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에 집중한 겁니다. Carlings는 옷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보다 패션 의류 산업이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변화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adDRESS THE FUTURE’ 캠페인입니다.
칸은 이 캠페인을 Digital Craft 그랑프리로 선정했습니다.
신용카드를 쓰는 기준
그 어느 때보다 현금을 쓰지 않는 시대입니다. 스마트폰에 탑재된 신용카드부터 다양한 앱까지, 새로운 형태의 돈이 등장했죠. 개중 스웨덴 핀테크 회사인 Doconomy가 출시한 신용카드 ‘Do Black’은 가장 신선해 보입니다.
이 신용카드는 사용법이 조금 특별합니다. 카드 사용을 권장하기보다 카드를 스스로 정지시키니까요.
UN에 의하면 환경 변화를 막기 위해선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50%로 절감해야 한다고 합니다. Doconomy는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카드로 물건을 구매할 때마다, 스마트폰 앱과 연결돼 구매 품목을 분석합니다. 구매하는 물건의 탄소 배출량을 계산하는 거죠. 당신의 구매품목이 일정량 탄소 배출을 넘으면 카드는 정지됩니다. 탄소 배출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소비습관이 환경까지 생각하는 소비로 범위를 넓혔습니다. 지구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카드를 다시 집어넣겠죠.
▲탄소 제한 신용카드 - DO BLACK 캠페인(출처: Doconomy AB 유튜브)
이 카드는 아직 시험 단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출시돼 소비 생활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 예정입니다. 카드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 카드를 쓸수록 환경을 생각하게 만드는 카드.
칸은 이 카드에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은 Creative eCommerce 부문 그랑프리를 수여했습니다.
경쟁사 매장을 보는 기준
미국인의 75%는 맥도날드 근접권에 산다고 합니다. 2017년 기준, 맥도날드 매장은 14,000개가 넘지만 버거킹은 7,200개 수준입니다. 두 배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경쟁사의 넘치는 매장을 기회로 만들 순 없을까요? 버거킹은 새로운 시각으로 경쟁사 매장을 바라봤습니다.
버거킹은 진즉에 앱으로 와퍼를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이 앱이 이번에 새로운 무기가 됐습니다. 맥도날드 매장에서 600피트 이내 거리라면 앱을 통해 와퍼를 주문할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가격은 무려 1센트입니다. 맥도날드 매장에서 앱을 통해 와퍼를 1센트에 주문한 후, 가장 가까운 버거킹 매장으로 가서 주문한 와퍼를 찾는 시스템. 1명에게 1번의 기회만 주어지는 이 캠페인은 “Whopper Detour”입니다.
▲버거킹 와퍼 우회 캠페인(출처: David Preece 유튜브)
버거킹은 이틀간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 매장에서 와퍼를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물론 연기자들에겐 절대로 맥도날드 비하 발언이나 모욕감을 주는 발언을 할 수 없도록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맥도날드 직원들의 당황한 모습은 실제입니다. 모자이크 처리됐어도 당황한 맥도날드 직원의 모습이 리얼하게 전달됩니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버거킹 매장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이 프로모션은 작년 12월 4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됐으며, 버거킹 앱 다운로드 수는 6백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현재 애플 앱스토어에서 푸드 분야 다운로드 수는 맥도날드가 4위이고, 버거킹은 11위입니다. 규모로는 맥도날드에 많이 뒤지지만, 버거킹의 아이디어는 기발했습니다. 경쟁사를 바라보는 시선, 기회로 삼는 재치까지 새로웠습니다.
칸은 이 캠페인에 다이렉트 부문, 모바일 부문, 티타늄 부문까지 세 개의 그랑프리를 안겼습니다.
변화의 시작
변화는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겁니다. 기준이 새로워지면 세상은 그 기준에 다시 줄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칸의 수상작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현실적인 대안 혹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막연히 이미지를 바꾸는 게 아니라 직접 동참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 이에 따라 크리에이터들도 더 실질적인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고민합니다. 칸에서 주목받은 아이디어들이 실제로 모두 실행되고 호응을 얻는다면, 세상은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더 좋은 모습으로 바뀔 듯합니다.
유독 칸에선 이렇게 지구에 대한 고민, 사람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칸의 수상 기준이 ‘더 나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가’로 맞춰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크리에이터들만의 잔치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이런 생각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누군가에게 단초가 되고 시작이 되고 행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크리에이터에겐 그래서 사명감이 중요해 보입니다.
좋은 크리에이션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작품을 만드는 기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칸은 그 기준의 좋은 예시를 보여주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