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도영 / 네이버 브랜드 기획자, 저서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 <기획자의 독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나 텀블러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해볼까 해. 그리고 그렇게 판 돈의 일부는 기부할 거야. 자선사업의 형태로”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아마도 “오, 그래 멋진 아이디어다 정말!”이라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대신 “세상에 널린 게 텀블러야. 그리고 너도 나도 환경을 외치고 상생을 얘기하는데 그걸로 어떻게 사업을 하니?”라는 말을 던질게 불 보듯 뻔하죠. 좋은 의도와 실력을 갖췄더라도 이를 세상에 증명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영역에 해당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포화된 시장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개척해가는 사람들,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다는 평가에도 기어코 새로움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말이죠. 애플의 아이폰이 그랬고, 발뮤다의 선풍기가 그랬듯 자신들의 문법으로 시장을 재정의하는 사례는 그래서 더욱 짜릿한 법입니다
미국 시애틀에서 탄생한 라이프스타일 제품 브랜드 미르. 텀블러를 비롯해 커피용품, 주방용품 등의 제품을 판매한다. / 출처 miir.com / 좌우로 클릭해 더 보기
진심은 담는 게 아니라 ‘풀어내는’ 것
흔하디 흔하다는 텀블러의 세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 Z세대로부터 사랑받는 ‘미르(MiiR)’가 그 주인공이죠. 미르의 창업자 브라이언 페페는 18년 전인 2006년 어느 날 마치 열반의 경지에 오르는듯한 깨달음과 마주합니다. ‘사람들이 내 장례식에 온다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 순간 파페는 남은 인생을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돕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세계가 선순환할 수 있는 사이클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 결심은 사람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2010년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디자인하는 회사 ‘미르’를 창업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듣고 환호보다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 정도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진 이른바 착한 브랜드는 차고 넘치거든요. 아마 미르보다 더 기구한 사연을 모은다고 해도 적지 않은 이야기가 쌓일 것이 분명하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미르에게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얼마나 멋진 진심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진심이 얼마나 체감되도록 만드느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알고 보니 착한 기업이더라’, ‘제품도 훌륭한데 멋진 일까지 하는구먼’이라는 반응을 끌어내는데 머물지 않고 선순환 사이클에 있는 모든 접점의 사람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 사이클의 정점에 있는 대상은 당연히 소비자입니다. 자신의 제품을 선택함과 동시에 자신의 비즈니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던 겁니다. 미르는 텀블러계의 애플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능적인 디자인의 끝을 보여주는 브랜드로 유명합니다. 최소한의 디자인 요소를 바탕으로 가장 편하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텀블러의 중요한 기능들이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도록 설계하는데 모든 역량을 동원하기 때문이죠. 미르의 고객들이 새로운 미르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다른 라인업의 제품까지 사용하기 위해서이거나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경험의 끝까지
지금이야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문화가 너무도 익숙해진 세상이지만 사실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보면 내가 구매한 착한 제품들이 정확히 어떤 착한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나마 커피 한 잔을 주문하며 ‘공정무역을 통해 구매한 원두를 사용해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느 농가가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를 공유할 뿐이니까요.
그러나 미르가 추구하는 기부 프로젝트는 차원이 다릅니다. 모든 제품에 기부 코드를 부여해 구매 고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불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추적할 수 있거든요. 깨끗한 물을 확보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기금에는 어느 정도가 지불되는지, 지속가능성을 추진하는 커뮤니티에는 얼마가 지원되는지, 하물며 미르가 더 안전하고 무해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연구비로는 어느 정도가 쓰이는지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또한 본인들이 진행하는 기부 프로젝트 전체를 투명하게 공개함과 동시에 현재의 기부 상황과 파트너 현황을 공식 웹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제품을 구매한 사람들은 마치 미르의 주주가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됩니다. 그러니 가치 있는 소비를 위해 미르를 선택한 사람들에겐 그 소비의 끝까지 가볼 수 있는 차별화된 경험을 선물하고 있는 겁니다. 지구를 위한 기업이라고 목청 높여 외치기보다는 자신들이 선보이는 활동 속으로 고객을 초대하는 개념인 거죠.
브랜드의 본질 속으로 고객을 이끌다
미르는 다양한 브랜드, 아티스트와 협업해 더 폭넓은 분야에서 고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위 좌부터 시계방향) 네스프레소, Claima, TimetoVote, 블루보틀, stepfrae, Blue Sparrow Coffee, 파타고니아 / 출처 @miir
미르가 선보이는 브랜딩 활동의 차별점은 콜라보레이션에서도 이뤄집니다. 미르는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파트너들과 OEM 형태의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이는데요. 스타벅스나 블루보틀, 스텀프타운 같은 글로벌 커피 브랜드는 물론이고 파타고니아, 만다리나덕, 심지어 전기차 브랜드인 리비안과도 협업을 이어가며 해당 브랜드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과 재질, 기능을 갖춘 제품들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무리해서 미르라는 브랜드를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파트너의 브랜드를 훨씬 더 부각하면서 본인은 멋진 도화지가 되기를 자처한다는 사실입니다. ‘필요한 만큼만, 과하지 않게’라는 그들의 브랜드 메시지를 뼛속까지 실천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 미르가 가진 브랜드 가치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객을 그저 브랜드 접점의 어딘가에 놓아두는 게 아니라, 브랜드의 본질 속으로 초대해 자신들의 모든 경험을 나눠주고 체감하도록 만든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지만 어쩌면 앞으로는 이런 브랜드들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고객들은 더 이상 똑똑해질 수 없을 만큼 똑똑해져 있으니 진짜 메시지와 가짜 메시지를 본능적으로 구분해 낼 수 있고, 본질에 다다른 것과 그저 흉내만 낸 것을 마치 입 속에서 과일씨 분리해내듯 가려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말이죠. 어떤 크리에이티브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 것이냐 보다 우리가 진정으로 실천해 낼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해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새롭지 않은 것으로도 또 한번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