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글 안소현 카피라이터|Wieden and Kennedy Tokyo
두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어김없이 마감은 다가왔다. 지난 두 달간 프레젠테이션과 촬영 준비 때문에 문화생활이라고는 잠들기 직전 유튜브를 스크롤 하는 게 전부였던 터라 도통 무슨 주제로 칼럼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하얀 화면 위에서 비웃듯 깜빡거리는 커서를 보며 난감해하고 있을 무렵, 유튜브 알고리 즘이 고맙게도 잊고 있던 영화 한 편을 추천했다. 제목은, ‘꽃다 발 같은 사랑을 했다.’ 내가 왜 이 영화 생각을 못했지? 그나저 나 구글은 내가 이 영화가 필요한 걸 어떻게 알았지?
작년, ‘콩트가 시작된다’를 감명 깊게 본 나는 드라마에서 좀처 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넘쳐흐르는 팬심을 주체 못하고 주연배우들 근황과 전작까지 찾고 있던 나는, 주인공이었던 스 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가 한 로맨스 영화에 연인으로 나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영화는 바로 일본에서 무려 귀멸 의 칼날을 누르고 6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였다. ‘콩트가 시작된다’에서는 러브라인의 ㄹ도 없었던 둘이었기에 나는 이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뭐, 주연 배우가 선남선녀이니 둘이 사랑을 하겠지, 그 사랑이 꽃다발처 럼 아름답겠지, 정도... 무엇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이 두 배우가 다시 함께 나온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침내 웨이브에 영화가 올라오던 날, 망설이지 않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이마무라 나츠코의 소설을 좋아하고, 같은 컨버스 흰색 잭 퍼셀 을 신고, 같은 공연을 예매할 정도로 취향이 비슷한 스물한 살 의 무기와 키노. 막차를 놓친 것을 계기로 우연히 만나게 된 둘. 관심사와 취향이 비슷한 둘의 대화는 밤이 깊도록 끝나지 않고, 당연하게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함께 여행을 가고, 함께 노래 방에 가고, 함께 밤 산책을 하고. 결국 함께 살기로 한 둘. 말 한 마디에도 심장이 저릿하고, 말 한마디 없이도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함께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고, 함께 걸으면 한 시 간이 1분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 모든 사랑에 빠진 이들이 그렇 듯 무기와 키누도 시간을 초월하며 그 찬란한 순간이 영원할 것 처럼 즐긴다. 하지만.
“연애는 살아 있는 거라서 유통기한이 있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시간은 사랑의 편이 아니다. ‘사랑해’ 는 언제나 ‘(영원히) 사랑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사랑해’ 다. 숱한 음악과 영화, 소설에서 영원하고 고결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사랑 은 변한다는 것이다. 대학생이던 무기와 키누는 대학을 졸업하 고, 취업을 하면서 점차 현실에 부딪친다. 현실은 녹록치 않고, 제 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돈을 벌어주진 않는다. 그렇게 현실에 지쳐가면서, 한때 둘을 사랑에 빠지게 했던 그 많은 공통분모들 은 그 색이 바래간다. 둘이 좋아하던 만화책 신작이 나와도 무 기는 어느새 읽지 않는다. 둘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로 가득했 던 책장은 어느새 먼지가 하얗게 쌓여간다. 신입사원이 되어 고 군분투하는 무기에게 중요한 건 키누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 하 지만 키누에겐 더 이상 과거처럼 찬란하지 않은 현재가 보인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없지만, 시간은 그들의 사랑을 서서히 시들 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소하면서도 미세한 변화들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 긴다. 컨버스 신발이 정장 구두로 바뀌고, 읽는 책이 자기계발 서로 바뀌면서 그렇게 서서히. 극적인 사건은 없다. 그냥 하루 하루 꽃이 시들 듯 그렇게 시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의 생로병사 가 가장 현실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러니 영화를 보며, 자신이 했던 사랑을, 혹은 하고 있는 사랑을 떠올리지 않 기란 불가능하다. 키누와 무기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가 우리 모 두의 가장 보편적인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사랑의 생로병 사가 전 세계를 막론하고 이토록 똑같을 수 있다니.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제각기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사 랑’을 할 때만큼은 비슷비슷해지는구나. 너도, 쟤도, 키누도, 무 기도 모두 똑같이 겪는 사랑의 과정이라는 걸 알고 나니 어쩐지 조금은 위안이 되는 기분이다. 물론 그래도 서글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지만.
“시작이라는 건 끝의 시작. 만남은 항상 이별을 내재하고 있고
연애는 파티처럼 언젠가는 끝난다.”
연애는 파티처럼 언젠가는 끝난다.”
사랑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해피엔딩이 결혼이라고? 결혼이라 는 제도는 꽃다발을 잘 말려서 보관하는 드라이플라워에 지나 지 않는다. 사랑은 시작된 그 순간부터 끝을 향해 나아간다. 문 득 그런 의문이 든다. 모든 사랑이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아무리 찬란하고 뜨거웠어도 이렇듯 시들어버리는 것 이라면, 사랑은 정말 무의미한 걸까?
희진)
그래, 지금은 반짝 반짝거리겠지.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지금 우리처럼.
그래도 그 여자한테 갈래?
진헌)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
우리의 삶에도 해피엔딩은 없다. 우리는 끝내 늙고, 병들고, 죽 는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뚜벅 뚜벅 끝을 향해 걸어간다. 그 과정 속에서 가슴 저미는 슬픔과 가슴 벅찬 행복, 설렘과 좌절, 희열과 절망 같은 것들을 느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끝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더 충만해진다. 사랑의 의미도 그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엔 딩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그 감정들과 오 고 갔던 그 대화들. 우리가 그곳에 있었고, 사랑을 했었다는 사 실 자체.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게 아닐까. 이별 후 한참이 지나 고 구글맵에 우연히 찍힌 둘의 데이트 장면을 보며 반가워하던 무기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그거면 됐지. 그 흐뭇한 미소. 그 러니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게. 이미 이별을 했 다면, 힘껏 웃어주자. 치열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