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기다려 주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광고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다. 빡센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당당하게 기다리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광고에서 가장 잘해야 하는 일은 기다려주는 일이더라고요.
바쁘게 진행되는 광고 업무에서 뭘 기다려 줄 시간이 있나 싶겠지만 정신없이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서로를 기다려주는 짧은 시간들이 존재합니다. 대행사가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간, 제작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간, 감독님이 트리트먼트 할 시간처럼 말이죠. 프로세스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잠깐 잠깐씩 호흡조절 하는 것처럼, 연극에서 단막이 끝나면 잠시 암전되는 시간이 있는 것처럼 그런 기다림의 시간들이 존재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생각을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기획파트가 전략을 세워 오티 방향을 정리하고 제작과 공유합니다. 제작이 아이디어를 내도록 기다려주는 시간 동안 다시 한번 점검을 하는 거죠. 이 방향이 맞는지, 놓친 건 없는지 잠시 여유를 가지고 체크하고 일정도 잘 점검하고. 제작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감독님이 트리트먼트를 하는 동안 만들어낸 아이디어에 대해 점검하면서 한 템포 쉬는 거죠. 그런 기다리는 시간들의 총합이 광고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괜히 걱정돼서 잘하고 있는지 걱정도 해보고 혹시 놀고 있는게 아닌지 언제 되냐고 추궁하기도 하고. 혹시 내가 방향을 잘못짚어 줬나 불안하기도 하죠. 차분하게 기다려주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 CD 10년 차 정도 되다 보니 이제서야 조금 차분하게 기다리는 척은 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근데 요즘은 그 기다려주면서 복기하는 시간들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 너무 아쉽습니다. 제작 방식이 디지털로 넘어가면서, 제품이나 서비스의 출시 일정들도 빨라지면서 전반적으로 모든 일정들이 타이트 해지고 있거든요. 아
이디어를 내는 시간도 전략을 짜는 시간도 점점 짧아집니다. 덩달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요. 체감상 거의 두 배 정도 빨라지는 것 같네요. 이렇게 달리다가 번아웃이 오지 않을까, 뭔가 놓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점점 사라지는 기다리는 시간들
비단 광고 제작에 관한 얘기만은 아닌 거 같아요. 저 같은 아날로그 세대들이 보기엔 요즘은 전반적으로 ‘시간을
내어 뭔가를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나왔다고 해보죠. 요즘이야 “아 그래? 들어볼까?”라고 마음만 먹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바로 들으면 되지만. 예전에는 그 앨범이 우리 동네 레코드 가게까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요. 몇 주를 기다려 손에 넣은 그 LP를 들고 집으로갈 때 느끼는 그 기분, 조심조심 먼지를 닦고 턴테이블에 소중하게 올려놓기 전 그 두근거림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기다림들은 뭐랄까 위스키를 숙성… 아니다 너무 주정뱅이 같으니 다른 비유를 들어보죠. 음… 메인디시 전에 나오는 애피타이저 같은 게 아니었나 싶어요. 이 앨범은 어떤 곡으로 채워져 있을까. 속지에 리뷰는 누가 썼을까. 세션은 누가 했을까.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잡지를 뒤져보기도 하고 음악 잘 아는 친구한테 귀 동냥도 듣고 하면서 점점 기대가 증폭되다가 듣게 될 때의 그 감동. 크… 그렇게 즐겼던 음악들은 몇십 년이 지나서 들어도 그때 그 느낌이 또렷하게 되살아나더라고요. 기대감에 물리적인 시간을 더하면 풍미가 생기는 그런 건가 봅니다. 숏폼 콘텐츠의 창궐로 도파민에 절여진 요즘 그런 두근거리는 기다림이 그리워지네요.
짧지만 반드시 필요한 시간들
어찌 되었건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광고를 하면서 만나는 소소한 기다림의 시간 들을 충실히 보냈으면 합니다. 기획이 피드백 정리하는 시간이라던가, 편집실 렌더링 기다리는 시간. 새벽 두 시쯤 컷이 바뀌고 조명 세팅하느라 걸리는 시간 같은 거 말이죠.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담당자들이 편하게 해 낼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게 어떨까 합니다.
기다려 주면서 해야 하는 건 ‘믿어주는’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든 가이드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상대방이 잘할 거라고 믿어주고. 그 두 가지 믿음이 충분하다면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움이 되는 거 아닐까 싶네요.
점점 빨리 돌아가는 광고 프로세스를 보면 뭐랄까요? 애피타이저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스테이크를 먹는 기분이랄까 암튼 요즘은 좀 그렇다는 늙은 광고인의 넋두리입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이렇게 시작하는 황지우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구글링하면 1초 만에 나오겠지만 시간이 있으시다면 날도 좋은데 서점이나 도서관에 마실 가셔서 한번 찾아 읽어 보심이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