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병이 있다. ‘향수병을 모으는 병’. 작고 예쁜 향수병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렸고, 그렇게 하나씩 모으던 향수병은 점점 늘어났다. 예쁜 향수를 보면 갖고 싶어 어쩔 줄 몰랐다. 급기야 향수병에 내가 끌려다니는 것 같아서 애써 모은 향수병을 전부 갖다 버리는 행동까지 했었다.
그렇게 향수병의 모양에만 집착했냐, 절대 아니다. 향수병 모양만큼 향기에도 엄청나게 집착했다. 유명하다는 브랜드의 향기는 대부분 알고 있었고, 누군가 지나가면 ‘아, 그 향이구나’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향기에 집착해서 좋은 점이 있다. 향기로 그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힘든 순간이 오면 가장 좋아하는 향을 뿌리면서 좀 더 기분 좋게 만든다거나, 즐거운 시기가 오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아하는 향을 뿌려준다. 그러면 몇 개월 후 그 향기는 나에게 많은 추억들과 함께 더 진하게 기억된다.
가을이 짧아졌다. 이 가을은 금세 지나가겠지만 오래 기억할 수 있는 향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향기가 누군가의 가을을 더 여운 길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 가을날 저녁 5시 30분, 노을 지기 전의 느낌으로
추천 향수: Van Cleef & Arpels <상탈 블랑>
출처 vancleefarpels.com
꼭 찬바람이 불어야 한다! 이 향수는 찬바람 불 때 잔향이 스윽 스치는 것이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제품을 검색하면 ‘크리미한 무화과향’이라고 적혀있지만 F의 감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향수를 뿌릴 때마다 꼭 찬바람 부는 노을진 하늘이 생각난다. 그 사이에 살짝 보이는 노을 묻은 하늘색, 그리고 이 향수가 더해지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무한정 걷고 싶어 진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잘 어울리지만 사실 나는 사계절 내내 쓰곤 한다.
# 묵직한 가을 컬러 같이, 마음도 조금 묵직한 날에는
추천 향수: pesade <New Error>
추천 향수: pesade <New Error>
출처 @pesade_official
나는 기본적으로 나무, 풀, 이끼 등의 베이스 향을 좋아한다. 이 향수는 남녀불문 어울리는 향으로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깊은 가을의 컬러감을 떠올려보면 된다. 아주 진한 와인색, 짙게 물들어 쌓여 있는 낙엽들 같은 향이다(그런데 그 낙엽은 꼭 비에 젖은 낙엽이라야 한다).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 이 향수를 뿌리면 마음이 잘 잡히고 정돈된다. 그리고 용량 대비 가격도 합리적인 편이이라 향덕 초입자가 접근하기도 쉽다.
# 아무도 모르는 향기로 나 혼자 기분 좋아지면 어떨까?
추천 향수: Histoires de Parfums <1969 TURNS FIFTY>
추천 향수: Histoires de Parfums <1969 TURNS FIFTY>
출처 @histoiresdeparfums
출처 @histoiresdeparfums
나무향, 풀향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 향수는 ‘복숭아, 장미, 패츌리’ 등이 더해져 있다고 적혀있지만 그 설명은 너무 어렵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향기들이 다 조금씩 묻어 있다고 보면 된다. 여성스러운가? 그렇지 않다. 남성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이 향수를 뿌리면 답답함이 해소되는 느낌의 향이다. 그렇다고 시원한 느낌은 아니다. 여름 같지 않고, 딱 가을의 적당한 선선함 정도의 향이다. 전환점이 필요한 하루라면 이 향수를 뿌려보기를 추천한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취향이 있다. 향기는 특히나 취향을 탄다. 나에게 좋은 향이 누군가에게는 과할 수 있다. 그런데 향에 대한 취향은 신기하게도 계절을 탄다. 이 계절에는 별로였는데 다른 계절에는 무척 좋아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향 앞에서 ‘절대’란 있을 수 없다. 같은 향도 사람마다, 공간마다, 시간마다 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계절, 나에게 좋은 향이 당신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닿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