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서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하나의 인생 애니메이션을 고른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건 ‘메시냐 호날두냐’처럼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지금 떠오르는 작품을 말하시면 된다’라는 독촉에, ‘아, 이거 정도면 그래도…?’ 하면서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제 머릿속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인생의 한 지점에서 특별한 작품을 만나는 순간, 그 작품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원톱’입니다. 다양한 순간들에 느꼈던 MAX의 감동을 과연, 지금 이 순간의 제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다사다난했던 2024년의 끝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요, ‘인생캐’ 질문에 한 번 제대로 답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캐릭터만 뽑는 것은 여전히 너무 가혹하기에, 사람(人)으로서의 나와 생물(生)로서의 내가 각각 하나씩 뽑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뽑아 놓고 보니, 이 두 캐릭터를 단순히 ‘최애’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단언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해드릴 <늑대아이>의 하나와 <충사>의 깅코는 제 인생의 롤모델 캐릭터입니다.
꽃밭에 누워있는 하나(花)과 벌레에 둘러싸여 있는 충사(蟲師) 깅코 / 출처: 네이버 영화 공식 이미지(좌) / 충사 공식 X(우)
사람 ‘아버지’로서의 롤모델, <늑대아이> 하나
‘나’라는 사람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선배’이자, 누군가의 ‘충실한 일꾼’... 이런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로서의 저입니다. 다른 모든 제가 힘을 합쳐 공격해도 ‘아버지’라는 저의 손가락질 하나로 다 튕겨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로서의 저를 관통하는 제1 지침이, 바로 <늑대아이> 엔딩장면에 있습니다.
<늑대아이>(원제: 늑대아이 아메와 유키)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만들어, ‘미야자키 하야오 그다음’으로 불렸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입니다. 늑대인간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늑대아이 남매를 낳은 하나. 그냥 아이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늑대로 변신해 버리는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어느 비 오는 날 남편은 늑대의 시체로 발견됩니다. 하나는 남편을 쓰레기차에 실려 보내야 했던 아픔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두 아이를 꼭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다짐합니다. <늑대아이>는, 그렇게 자란 딸 ‘유키’가 덤덤한 목소리로 전해주는, 엄마 ‘하나’의 사랑과 육아 이야기입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두 걸작. 이 두 작품에서는 어떤 흠도 찾아내기 어렵다. 최근에는 <너의 이름은><스즈메의 문단속>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더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흠을 애써 무시하면서 봐야 한다. / 출처: 네이버 영화 포스터
‘하나’(꽃)라는 이름은 ‘힘들 때나 괴로울 때도 항상 꽃처럼 웃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에도 하나는 웃다가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고, 남들과 다른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사람이 적은 시골로 이사하여, 집수리부터 농사까지 모든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농사 초보라서 힘들게 가꾼 밭을 모두 갈아엎어야 할 때도 하나는 웃습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웃는다고 뭐가 해결되나?’라고 했던 엄한 시골 어르신도 결국에 하나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삶의 고난을 울음이나 짜증이 아니라,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모습, 저도 사무실에서 매일매일 따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늑대로 변하는 아이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시골로 이사를 하고, 전혀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 그래서 혹자는 <늑대아이>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를 위한 영화라고 말한다. 난 이런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원래 늑대처럼 울고, 늑대처럼 뛰어다니며, 마치 야생동물처럼 전혀 통제할 수 없다. <늑대아이>는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를 위한 이야기이다. / 출처: 네이버 영화 공식 이미지
하나는 인간이지만, 인간과 늑대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녀들에게 절대 하나의 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늑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아들 아메가 야생 늑대와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결국 누나 유키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동생 아메는 늑대로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산으로 떠나는 아메를 보며 하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떠나려는 거야? 하지만 난 아직 너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걸…’
관객들은 이 말을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 온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니. 전 이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육아에서 가장 혐오하는 말이 ‘부모의 희생’입니다. 전 제 아이를 키우면서 1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서 기꺼이 한 일이고,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즐거웠는데, 그걸 ‘희생’이라는 말로 폄하하기 싫습니다.
희생하지 않았으니 보답도 필요 없습니다. <늑대아이>는 산속 집에서 혼자 지내는 하나의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딸 유키는 자신의 모습을 이해해 주는 친구들을 만나 중학교 기숙사에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홀로 남편의 사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멀리 산속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옵니다.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하나는 너무나 기쁘게 웃습니다. 저도 가끔 이렇게 웃습니다.
생물 ‘나그네’로서의 롤모델, <충사>의 깅코
전 ‘아버지’이지만, 그 이전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물입니다. <충사>는 생물로서 제가 느끼는 감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 시야에 이상하게 떠다니는 투명한 지렁이나,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번쩍이는 불빛들, 손을 귀로 막았을 때 들리는 용암 흐르는 소리, 매일 쓰던 베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느껴지는 이질감 등… <충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 모든 현상이 ‘벌레’에 기인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레’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걸쳐 있어, 귀신과 같은 초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벌레에게는 어떠한 의도도 없습니다. 음식물이 소화되고, 시체가 썩는 등, 언뜻 보면 당연한 자연현상의 원인에 ‘미생물’이 있는 것처럼, 지구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기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벌레’는 그렇기에, 인간을 비롯한 생물의 삶에 지속적이면서, 때로는 강렬한 영향을 미칩니다. ‘충사’는 벌레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벌레를 퇴치해 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깅코는 이런 일반적인 ‘충사’와는 또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다지 필사적이지 않습니다. 벌레를 쫓아내 주긴 하지만 딱히 이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냥 될 대로 되겠지’라는 묘한 느낌을 주는 주인공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게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합니다. 벌레는 그저 자신의 존재 양식대로 작동할 뿐입니다. 우연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벌레의 작동에 개입하여 비로소 문제를 만드는 건 오히려 인간 쪽입니다.
충사의 대표 이미지들. 깅코는 다른 무엇과도 엮이지 않는 나그네의 모습이다. 난 아버지이지만 나그네도 되고 싶다. 그래서 여행을 이렇게 자주 가는 걸까? / 출처: https://www.marv.jp/special/game/ds/mushishi/(좌), 충사 공식 홈페이지(우)
<충사>는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하나의 에피소드는 보통 깅코가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형태로 구성됩니다. 벌레의 흐름에 인간이 휘말린 사건을 하나 해결하고, 깅코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깅코는 (나중에 밝혀지는 그의 과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과 오랜 관계를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이나 벌레냐, 삶이냐 죽음이냐, 만남이냐 헤어짐이냐, 깅코는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생사가 달린 절박한 순간에도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는 ‘나그네의 모습’이 제가 깅코에게 제일 본받고 싶은 점입니다.
깅코는 홀로 떠나는 길이면, 길 가에 잠시 앉아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지구 속 깊은 기저에 흐르고 있는 원시 벌레들의 거대한 물결을 느낍니다. 자연의 경이를 마주하면, 그와 비교되는 자신의 존재는 더욱 가볍게 느껴집니다. 생명에의 집착, 고마움, 연민, 약간은 애틋한 마음까지. 사건을 해결하는 동안 쌓여 온 감정과 관계의 무게들을 몸에서 덜어냅니다.
저도 비슷한 맥락의 의례를 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의무가 너무 무겁거나, 다양한 인간관계가 저를 옥죄어 온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밤하늘을 오랫동안 응시합니다. 지구, 그 위의 우주, 우리의 은하, 은하단을 넘어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크기를 느끼려고 합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함 앞에서 제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는 의식입니다. 사실 효력은 길지 않습니다. 잠깐만 방심하면, 저에게 여러 욕망과 관계가 달라붙어, 금세 또 무거워집니다.
지구 속을 흐르는 거대한 광주(좌)와 벌레의 흐름을 느끼는 깅코(우). 광주의 흐름은 언뜻 보면 우주 속 은하수를 닮아있다. / 출처: 우루시바라 유키 트윗(좌), 충사 공식 홈페이지(우)
물론, 깅코가 이렇게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실력이 매우 뛰어난 충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경쟁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사회에서 ‘아무것도 연연하지 않고 나그네처럼 살아야지’ 하는 낭만적인 생각만으로 생존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 사회 최후의 낭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 생활의 낭만, 연애의 낭만까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적자생존 과정에 의해 ‘실력 없는 나그네’는 도태되고, 우리는 낭만 없는 개체로 진화할 것입니다. 저도 생물로서 멸종당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맨날 애니메이션과 서브컬처 얘기만 해서 좀 미덥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도 제 분야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일은 잘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깅코의 능청스러운 모습. 매번 속는 사람도 그의 실력만큼은 인정한다. / 출처: <충사>공식 X(좌), 충사 공식 홈페이지(우)
저는 보통 특정 작품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작품들인데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큽니다. 함께 보고, 함께 막 떠들고 싶은 작품을 추천할 때도 ‘저는 좋았어요’ 식으로 소심하게 의견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위의 두 작품은 용기를 내어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전문가들의 의견을 한번 믿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늑대아이>는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최초 별점 4.5점을 준 것을 후회하며, 결국 5점 만점으로 수정한 애니메이션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충사>는 일본 문화청이 선정한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 부문 모두 역대 10위 안에 선정된 걸작입니다. <충사> 아래 순위로 <공각기동대>, <이웃집 토토로>, <강철의 연금술사>, <드래곤볼>, <모노노케 히메> 같은 역사적 걸작들이 있습니다.
치열했던 1년이 끝나갑니다. HSAD는 12월 25일부터 내년 1월 1일까지 전사휴무 기간입니다. 다들 좋은 영화나 시리즈 한두 편쯤은 집에 들여놓으셔야죠.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