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9년 봄. 엑스포에서 소화제까지, 놀이동산에서 금융까지 다양한 광고주와 브랜드를 취급하는 광고게의 순돌아빠 박 아트는 출근하자마자, 여느 때처럼 메일을 보고 있었다.
'비아구라 비교자료 보내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스팸메일을 지우려는 순간, 어라? 익숙한 AE의 이름이 발신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랬더랬다. 박 아트는 남성용 발기부전치료제 인쇄광고를 진행하고 있는 중 아니던가?
광고계의 F4라 불리는 4명의 유부남과 1명의 꿈잔디로 구성된 A모 CD팀은 처음 OT를 받던 날 치료제 한 알을 가운데 두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직접 음용한 후 그 효과와 놀라운 '성능개선효과'를 알려줘야 할텐데, 건강남을 자처하는 유부남들은 코웃음을 치며 본인은 필요없다 말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박 아트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용감히 직접 임상실험에 임하는 수밖에...
물론 인사이트에 충실한 완성도 높은 광고를 만들고자 하는 100%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약효가 머리 쪽으로 전이되었는지 아이디어가 '불끈불끈' 샘솟고 카피는 '용솟음'치며 내놓는 썸네일마다 비주얼 요소가 '힘있게'자리잡은 것이, 역시 제품을 직접 경험해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했던 박 아트.
역시 때는 2009년 봄. 유난히 조심스럽게 설명을 하는 담당 AC와 눈을 반짝거리며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건강남을 자처했던 얼마 전의 그 유부남들 그리고 우리팀의 유일한 여성인 얼마 전의 그 '꿈잔디'는 제품을 만지작거리며 회의를 하고 있다. 광고할 제품의 정식명칭은 탐폰(Tampon).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한자로 지혈전(止血栓)이란다. 처음 접하는 제품만큼이나 생소한 명칭이다.
그날 회의에서 유일한 경험자인 막내 팀원 꿈잔디에게 이래저래 질문을 해보지만 도통 감이 안 오는 건 매한거지. 자료 조사의 차원에서 여성의 신체구조도를 당당하게 모니케에 띄어 놓았던 박 아트는 퇴근 후 와이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본다. 간만에 불붙은 그녀는 '남성중심 권력구조사회와 학대 받는 여성의 신체'라는 주제의 두 시간짜리 강의를 펼쳐 놓는다. 그날 박 아트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의 고충과 본인의 무지를 절절하게 실감한다.
탐폰과 발기부전치료제, 흔히 접하는 제품은 아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결국 우리가 널리 알리고 사게 만들어야 할 많은 제품 중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의 편안함과 환희를 상상하며 친철하게 알려줘야 할 가치의 집합체라 생각하면 별 감흥없이 쿨하게 진행할 수 있는 과정이겠지만 직업병처럼 제품을 책상에 늘어놓고 수사요원이라도 된듯한 자세로 프로파일링하며 생각을 다듬어가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돼서 오만가지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남의 입장에 되어보는 것은 이 직업이 주는 매력이기도 하지만 한계를 접할 때마다 높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느껴지는 답답함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착한광고는 그만! 지금부터는 세상에서 가장 '못된 광고'를 만들어보자!고 맘속으로 혼자 외쳤던 '2007 이태원선언'이 무색하게 그냥 흘려 보낸 수많은 기회들. 멋진 광고주와 독특한 소재만 걸리면 당장이라도 히트캠페인을 만들 듯 투덜거렸지만, 실컷 거드름을 떨다가도 생소한 것을 접하면 급히 꼬리를 내려버리는, 빈 구석이 더 많은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라는 영화에서 다른 이의 맘속을 읽을 수 있게 된 멜 깁슨은 영화에서 승승장구하는 광고인이지만 영화 속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준 선물은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능력으로 인해 변화된 그 자신이라는 것. 열심히 광고를 할수록, 남을 이해하면 할수록, 본연의 내 모습과 더 가까워지는 경지에 나도 이를 수 있을까? 아. 모르는 것투성인 수많은 제품과 브랜드로 가득 찬 광활한 우주! 나는 그 광대한 우주를 흐느적흐느적 우영하며 "탐폰은 하얀빛이다~"를 외치는 가가린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