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ㅣ 박석민 (작사가)
얼마 전 파주 헤이리 예술인 마을에 갔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들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렀던 전시장. 어린 시절 익숙했던 문방구와 완구점, 그리고 서점의 모습들을 재현한 곳이었다.
서점 쇼윈도 안에는 그 당시 내가 즐겨 보았던 어린이 잡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표지에 적혀있는 기사 제목들 한 줄 한 줄 유심히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난 책을 읽고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 상상력에 불을 지펴준 것이 바로 어린이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 잡지 속에 담겨 있던 기사 내용들도 흥미로웠지만 내게 더욱 흥미를 끌고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들은 바로 광고 페이지들이었다.
수많았던 광고들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광고는‘8비트 삼성 컴퓨터’광고였다. 이미 어린이 SF소설과 만화들을 섭렵하고 있던 나에게 이 컴퓨터라는 물건은 태권 V 같은 로봇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도 한 번에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컴퓨터만 있다면 정말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가의 컴퓨터를 가질 수 없었던 난 그저 마르고 닳도록 광고 속 사진만 들여다보며 상상할 수밖에….
그렇게 상상만 하던 컴퓨터를 처음으로 만져보는 일은 중3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컴퓨터만 조금 배우면 음악을 만들 수 있을거란 생각에 부모님을 졸라 다니게 되었던 동네 컴퓨터 학원.
MS도스(DOS) 디스켓을 넣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16비트 컴퓨터에 GW베이직(Basic)이란 프로그래밍 언어로 구구단 프로그램 짜는 것을 배우고, 화음은 커녕 ‘도레미파솔라시도’ 조차 무미건조한 소리로 간신히 들려주는 컴퓨터를 보면서 내 환상은 점점 깨지게 되었다. 편하고 쉽게 꿈을 이루고자 했던 내가 프로그래밍 언어를 잘 할 수 없다면, 작곡을 배우고 악기를 익히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컴퓨터는 그저 ‘깡통’에 불과했다.
깡통 컴퓨터를 사용한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음악을 만들고 싶던 소년은 작사가가 되었다. 이제 컴퓨터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컴퓨터는 여전히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알아서 척척 만들어 주지 못한다.
하지만 컴퓨터 없이도 잘 굴러가던 세상에서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굴러갈 수 없는 세상으로 변하는데 20년이 걸렸으니까, 내 어릴 적 상상을 이뤄줄 수 있는 컴퓨터로 발전하는데 20년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혹시 작곡과 노랫말 모두 컴퓨터가 알아서 뚝딱 만들어 버리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