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ㅣ 이민희 (음악 칼럼니스트)
<세시봉>은 노래를 부각하는 한편, 노래하는 인물과 함께 노래에 깃든 이야기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음악에 감동하는 오늘의 방식을 문득 일러주기도 했다.
드러내면서 우리가 음악에 감동하는 오늘의 방식을 문득 일러주기도 했다.
언젠가 미사리 카페에 간 적이 있다. 먹을 것 마실 것 모두가 비쌌는데도 자리는 꽉 차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등을 돌리니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아니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이 지긋한 언니들이 아름답고도 슬픈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해 전, 한 바에서 음악을 트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곡에 공들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따라부르거나 발을 살짝 구르는 것으로 노래에 누군가 반응하는 반가운 순간은 성의껏 고른 신선한 노래가 아니라, 내가 알고 우리가 알고 세상이 아는 익숙한 노래가 흐를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은 노래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또 나온다고 해도 지겨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한 바에서 음악을 트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곡에 공들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따라부르거나 발을 살짝 구르는 것으로 노래에 누군가 반응하는 반가운 순간은 성의껏 고른 신선한 노래가 아니라, 내가 알고 우리가 알고 세상이 아는 익숙한 노래가 흐를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은 노래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또 나온다고 해도 지겨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MBC <놀라와> 세시봉 콘서트
아이돌 울린 추억과 반복의 노래
지난해 9월과 올해 1월 명절 시즌의 MBC <놀러와: 세시봉 콘서트(이하세시봉)>을 봤을 때 두 기억이 떠올랐다. MP3 플레이어와 라디오의 음악채널이 여전한 우리의 일상이고, 전만큼 빈번하지는 않을 테지만 간만에 노래방으로 향하는 길이 여전히 두근거릴 만큼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방식은 그리 다채롭지 않다. 한 뮤지션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수십 년을 애인처럼 추종하거나(마치 팬클럽처럼), 비슷하거나 상이한 음악을 탐구하듯 적극적으로 찾아듣는 경우는(마치 마니아처럼) 보편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어서 문신처럼 우리의 살과 몸에 새겨진 노래를, 즉 ‘우리가 찾는 노래’가 아니라 ‘우리를 찾아왔던 노래’를 즐기는 일에 보다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래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반복'이란 멀거나 가까운 여러 가지 추억과 무관하지 않다. 어린 날 들었던 만화 주제가가 고스란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처럼 과거 끊임없이 거듭해서 들었고 들렸던 음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회고와 낭만의 의미를 포괄하는 추억의 아이템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이를 음악평론가 박은석은 “음악은 추억과 결합할 때 가장 강력한시청률 22.5%.’ 복수와 정서적 폭발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9월과 올해 1월 명절 시즌의 MBC <놀러와: 세시봉 콘서트(이하세시봉)>을 봤을 때 두 기억이 떠올랐다. MP3 플레이어와 라디오의 음악채널이 여전한 우리의 일상이고, 전만큼 빈번하지는 않을 테지만 간만에 노래방으로 향하는 길이 여전히 두근거릴 만큼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방식은 그리 다채롭지 않다. 한 뮤지션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수십 년을 애인처럼 추종하거나(마치 팬클럽처럼), 비슷하거나 상이한 음악을 탐구하듯 적극적으로 찾아듣는 경우는(마치 마니아처럼) 보편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어서 문신처럼 우리의 살과 몸에 새겨진 노래를, 즉 ‘우리가 찾는 노래’가 아니라 ‘우리를 찾아왔던 노래’를 즐기는 일에 보다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래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반복'이란 멀거나 가까운 여러 가지 추억과 무관하지 않다. 어린 날 들었던 만화 주제가가 고스란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처럼 과거 끊임없이 거듭해서 들었고 들렸던 음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회고와 낭만의 의미를 포괄하는 추억의 아이템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이를 음악평론가 박은석은 “음악은 추억과 결합할 때 가장 강력한시청률 22.5%.’ 복수와 정서적 폭발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세시봉의 친구들 <김세환·송창식·윤형주·조영남>
<세시봉>이 소환했던 수많은 반복의 노래들 또한 추억의 후일담을 두고 있다. 출연했던 윤형주는 당시 ‘카페 세시봉’의 입장 티켓 가격을 일러주었다. “25원이었다. 자장면이 20원, 백반이 30원하던 시절이었다.” 송창식은 “통행금지로 낮과 밤이 바뀌었다”며 오래된 일과의 리듬을 이야기했다.
그런 반복과 추억의 노래는 아이돌을 울렸다. 설특집으로 함께 제작된 MBC <아이돌스타 육상·수영 선수권 대회> (1부 18.7%, 2부 17.6%)와 비교할 때 <세시봉>은 크게 밀리지 않는 시청률을 기록한 바 있다(9월 18.9%, 1월 1?2부 16.9%). 출연했던 이하늘과 김나영은 트윈 폴리오의 <웨딩케익>에 기꺼이 눈물을 쏟았다. 초대된 장기하는 특유의 유머감각을 버리고 시종일관 얼어 있었다. 세시봉이 무엇인지 그동안은 잘 몰랐을 까마득한 후배만 운 것이 아니다. 30년 만에 무대에 선 이장희는 그들의 젊은 날을 소환하는 따뜻한 친필 편지로 동료 송창식을 울렸다. 입장한 스튜디오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오늘의 숱한 중장년층의 눈물샘 또한 온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물 살리기
사실 비슷한 프로그램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KBS <콘서트 7080>을 비롯해 같은 방송사의 <열린 음악회>와 <가요무대> 또한 추억의 가수를 빈번하게 섭외한다. 애초의 성격, 즉 출연하는 세대는 다르지만 KBS <스케치북>과 SBS <김정은의 초콜릿> 또한 순위집계와 같은 경쟁구도와 무관하게 공연을 표방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우리에게 문득 뜨거운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세시봉>처럼 뉴스로 크게 회자된다거나 케이블 채널에 다시 전송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노래를 다루는 방식은 충분히 진지하지만, 반복과 추억이라는 감성적인 영역을 집요하게 파고들지는 않았고, 이 같은 감정의 파동을 제대로 살려주는 노골적인 연출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예능 히트작을 뒤적이는 것으로 이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해 화제의 프로그램 이었던 <슈퍼스타K2>는 케이블 시청률 최대치를 기록했고, MBC <위대한 탄생>의 제작에 영감을 주었다. 한편 탈락한 김건모에게 이례적으로 재도전의 기회를 주며 논란을 야기한 MBC <우리들의 일밤: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는 파장 이후 PD 교체와 결방이라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릴 만큼 시청자를 자극하고 있다. 때에 따라 ‘문제작’이 되기도 하는 이와 같은 화제작은 기량의 보컬리스트를 동원해 우리가 ‘아는 노래’로 회를 구성한다. 신예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들 또한 아는 노래를 소화한다. 그리고 아는 노래를 축으로 출연자의 당락이 결정되는 냉정한 심판이 따른다.
익숙한 노래를 기둥으로 하지만 노래에만 몰입하지 않는 것, 즉 노래로 누군가를 띄우기도 하지만 노래로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즐거운 긴장과 불안을 안겨주는 것, 이는 노래를 메인으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세시봉>은 온화한 결정을 내렸다. 인물을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살리는’ 방식을 택했다. 타국에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인 이장희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강근식 같은 생소한 듯 중요한 기타리스트를 재조명했다. 연속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라 애초부터 명절용 단발성 이벤트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윤곽이다.
여기에 깨알 같은 후일담을 예능의 방식으로 털어놓는 일이 추가됐다. 음악이 핵심이지만 노래의 나열이 지루해지지 않도록 진행자는 농담을 쏟아냈고, 당시 세시봉 카페를 출입했던 시대의 증인으로부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재치와 생동감을 곁들이는 연출로 <세시봉>은 노래에 대한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KBS <콘서트 7080> / MBC <우리들의 일밤>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 / Mnet <슈퍼스타K> 시즌3
'들려주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요구
<세시봉>이 선사했던, 예능과 결합한 반복과 추억의 노래는 우리가 소화하고 소비하는 오늘의 노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TV를 점령하고 있는 오늘의 아이돌과 내면적이고 자전적인 성향의 싱어 송라이터가 들려주지 못하는 노래를 그들은 선보였다. 조금도 녹슬지 않은 <세시봉>의 노래는 자극과 거리가 멀었다. 주로 어쿠스틱 기타와 육성의 화음이 주도하는 간결한 사운드였고, 가사를 한땀 한땀 뜯어보게 되는 문학적인 시어였다. 공연용 음악이기도 했지만, 태생적으로 카페의 음악이었고, 여느 카페의 BGM처럼 누구의 일과도 거스르지 않는 평온의 음악이었다. 아울러 동시대의 증인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노래였고, 오늘의 세대에게는 발견의 노래였다.
그렇게 <세시봉>은 노래를 부각하는 한편 노래하는 인물과 함께 노래에 깃든 이야기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음악에 감동하는 오늘의 방식을 문득 일러주기도 했다. 반복해서 들었던 음악은 추억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창구는 많지만 그 많은 창구가 ‘보도’와 ‘재방’으로 이어질만큼 유의미한 자극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이색 시스템이 따르지 않는 한, 즉 예능과 같은 비음악적인 이벤트가 음악을 택하는 절충의 연출이 동반되지 않는 한, 반복과 추억의 노래는 힘을 가지고 회자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게 <세시봉>은 단순한 추억의 환기를 넘어 미디어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방식의 변화를 요구했다.
<세시봉>이 선사했던, 예능과 결합한 반복과 추억의 노래는 우리가 소화하고 소비하는 오늘의 노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TV를 점령하고 있는 오늘의 아이돌과 내면적이고 자전적인 성향의 싱어 송라이터가 들려주지 못하는 노래를 그들은 선보였다. 조금도 녹슬지 않은 <세시봉>의 노래는 자극과 거리가 멀었다. 주로 어쿠스틱 기타와 육성의 화음이 주도하는 간결한 사운드였고, 가사를 한땀 한땀 뜯어보게 되는 문학적인 시어였다. 공연용 음악이기도 했지만, 태생적으로 카페의 음악이었고, 여느 카페의 BGM처럼 누구의 일과도 거스르지 않는 평온의 음악이었다. 아울러 동시대의 증인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노래였고, 오늘의 세대에게는 발견의 노래였다.
그렇게 <세시봉>은 노래를 부각하는 한편 노래하는 인물과 함께 노래에 깃든 이야기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음악에 감동하는 오늘의 방식을 문득 일러주기도 했다. 반복해서 들었던 음악은 추억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창구는 많지만 그 많은 창구가 ‘보도’와 ‘재방’으로 이어질만큼 유의미한 자극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이색 시스템이 따르지 않는 한, 즉 예능과 같은 비음악적인 이벤트가 음악을 택하는 절충의 연출이 동반되지 않는 한, 반복과 추억의 노래는 힘을 가지고 회자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게 <세시봉>은 단순한 추억의 환기를 넘어 미디어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방식의 변화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