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의 주인공은 실은 나(광고주)가 아니라 상대(대중)인 것인데, 자기 사정을 알리고 하소연하는데 급급하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광고는 구체적이고 평범한 삶의 일상에 기초할 때에야 공감을 얻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평범한 삶과 구체적 현실이야말로 광고가 터해야할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광고
학교가 집에서 멀다. 10분쯤 걸어서 역에 이르러 지하철을 타고난 다음, 또 버스를 옮겨 타고서야 학교에 닿는다. 자연히 전동차 안의 광고판이나 거리에 걸린 플래카드에 눈길이 간다. 무료한 탓일까. 그저 눈길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 내용들을 곱씹게 된다.
전철 안에서 만난 광고들 가운데 눈길을 붙잡는 이런 문안이 있었다. 부산광역시에서 붙인 공익광고인데, 그 문구가 ‘마약 없는 도시, 부산’이다. 글을 읽는 순간 픽 웃음이 터진다. 개그맨 심형래가 얼굴에 점을 붙이고 바보 흉내를 내면서, “영구~ 없다~”라고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처음 부산에 온 외지인이 이 글귀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싶었다. 아마 ‘영구’를 제외하고는, ‘부산에는 마약이 없구나’라는 느낌보다 ‘부산에는 마약이 많구나’라는 반대쪽 생각이 머리를 채울 것 같다. 연이어 ‘내가 못 올 곳을 왔구나’라는 전율이 온몸을 감싸지 않을까?(ㅋㅋ) 만일 그렇다면, 이 광고문안은 실패 사례다. 부산을 광고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산을 해코지한 셈이니까. 나아가 부산시뿐만 아니라 광고를 접할 대중조차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양면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부산에는 분명히 마약이 있다. 국제항구도시여서인지 자주 ‘히로뽕 조직밀매 사건’들을 접하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도시에는 마약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건 백해무익한 광고다.
물론 대중도 광고를 진실의 직설적 표현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광고 자체의 미학도 이해하고, 또 메시지 전달을 위한 기술적 과장이나 눈길을 끌기 위한 조작도 용인한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을 말하기 시작하면 광고는 이미 광고가 아닌 것이다.
‘영구’같은 말이지만, 광고의 힘은 신뢰에서부터 나온다. 이것은 광고든 언론보도든 모든 미디어의 숙명이다. 신뢰를 잃어버리면 모두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광고는 표현욕구와 진실 사이의 아슬아슬한 소롯길을 걷는 작업이리라.
실은 공익(公益)을 내건 광고들 가운데는 ‘마약 없는 도시, 부산’과 같은 것들이 제법 많다. 한 시내의 로터리나 중소도시 입구에 큰 돌을 세워놓고 거기 깊숙이 파놓은 ‘바르게 살자’라는 문안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다.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저 ‘바르게 살자’는 구호는 문득 조폭들 어깨에 자주 보인다는 ‘차카게 살자’를 연상케 하고(ㅎㅎ) 급기야 ‘돌 값이 아깝다’는 혀 차는 소리를 초래한다. 공익을 위해 세워두었다는 ‘바르게 살자’가 전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구실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반공익적 사태를 빚는 셈이다.
두루 공공성을 무슨 추상적 가치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실패 사례들이다. 공익의 소재는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구체적인 삶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활 속의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인 가치를 공공성으로 오해하면 언제나 ‘바르게 살자’라는 하나마나한 말이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결사적이지 않아 보이는 ‘결사반대’
전철을 내려서는 버스로 갈아타야한다. 시골길을 근 30분을 달려야 학교에 닿는다. 요맘때 봄이 깃드는 들판은 볼만하다. 푸르고 붉은 기운이 산천을 휘감는 것이다. 차창으로 스치는 길가에도 다양한 광고문구가 걸려있다. 대개 음식점이나 유흥업체의 개업광고들이다. 그 중에는 ‘결사반대’를 주장하는 광고도 자주 눈에 띈다.
시골 읍내를 지나면 교회가 들어서려는지 큼직한 붉은 글씨로 ‘결사반대! 주택가에 소음을 내는 교회건축 결사반대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걸려있기도 하고, 때로는 ‘주유소 설치 결사반대!’ 또는 ‘고층 아파트 건설 결사반대!’를 외치는 구호도 있다. 한데 ‘결사반대’가 너무 흔하다보니, ‘죽음을 불사한다’는 뜻의 ‘결사(決死)’라는 말이 심드렁해진다.
‘결사반대’가 그 말의 비장함에도 불구하고 시들해진 까닭은 주유소가 설치되고 교회가 들어서도 ‘불사하겠다’던 죽음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작 ‘반대’하는 뜻에 비장미를 덧붙이는 정도의 수식어로 타락한 ‘결사’는 급기야 그것이 수식하려는 내용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말하자면 ‘결사반대’라는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심드렁해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저 사람들 보상을 더 많이 해달라는 뜻 아냐?’와 같은 의심을 동반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을 불사한다’라는 뜻을 담은 ‘결사’라는 말이 무의미한 말, 곧 죽은 언어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언어는 한 사회의 공공재다. 그런 공공재 가운데서도 대단히 농도가 짙은 ‘결사’라는 말이 죽어버리면 실제로 ‘결사반대’를 해야 할 때(가령 나라가 망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쓰지 못하는 비극적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돈이 돌지 않아서 이번 참의 경제위기가 덮쳤다면 말이 제 뜻을 잃고 인플레가 되어버리면 그보다 더 가공할 사태가 빚어진다.
급기야 ‘결사’가 코미디가 되어버린 사례를 한적한 농촌 어귀에서 발견한 것은 슬프기조차 한 경험이다. “결사반대! 상수원 보호구역에 납골당이 웬 말이냐!”
아! 물론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선다는데 그냥 가만히 있어서야 될 일이 아니다. 이때는 정말 ‘널리 알리는 일’, 곧 광고(廣告)를 통해서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생각은 핑 날라서 ‘만약에, 만에 하나 상수원 보호구역에 납골당이 설치되어버린다면 목숨을 걸고 반대한 저 사람들은 과연 어찌 할 것인가!’하는 데까지 미친다.
말대로 하자면 ‘결사반대!’를 했기 때문에, 그 말을 실천해야 한다. 곧 저 플래카드를 걸 때의 그 분하디분한 마음을 널리 제대로 알리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한데 그 뒤가 더 큰 문제가 될 것 같다. 죽은 그 몸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말이다. 결국 그렇게 죽음으로 반대했던 그 납골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좀 복잡해진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첫째, 납골당 설치를 결사반대했다. 둘째, 납골당이 설치되었다. 셋째, 결사반대를 했으므로 죽었다. 넷째, 주검은 결사반대했던 납골당에 담긴다.’ 이거 원 참. 제 혀를 제가 깨무는 격이라고나 할까. 겉말(광고)이 실제(뜻)와 어긋날 때 빚어지는 메시지의 타락상을 시뮬레이션해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에까지 이른다.
돈의 값어치가 인플레되면 화폐가 제 기능을 잘하지 못하듯, 말도 품은 속뜻이 희석되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죽어버린다. 그러니까 광고(널리 알린다)에만 집착하고서 강하고 색다른 표현만을 찾다보면 처음에는 눈길을 끌지 모르나 도리어 언어시장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는 것이리라.
‘선’을 넘은 외침
요즘엔 조그만 지방도시에도 사교육 열풍이다. 각종 학원 선전판들이 길거리에서 사람 눈을 끈다. 그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하루 학습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집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비장하고 결연하기는 한데, 그 비장함을 실천하려면 아마 학원은 여관을 겸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함께 드는 것이다. 이건 다른 학원과 차별화하려는 뜻이 지나쳐서 일상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 경우가 되겠다. 선을 넘어버리면 아무리 문구의 표현이 강하고 비유가 절실하더라도 대중들 가슴을 울리지는 못한다.
한군데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전달하려는 속뜻을 해치는 이런 자해적 표현은 TV광고에서도 보인다. 연전에 사람들 입방아에 올랐던 외국계 보험회사의 광고가 그랬다.
생명보험을 든 남편이 죽었는데, 혼자 남은 아내의 집에 ‘잘 생긴’ 보험회사 직원이 손을 흔들면서 찾아오는, 참 묘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광고였다
현실을 등진 광고의 공허함
학교 가는 길에 발견한 이들 광고의 공통점은 자기 생각에 골똘히 빠졌다는 데 있다. 광고의 주인공은 실은 나(광고주)가 아니라 상대(대중)인 것인데, 자기 사정을 알리고 하소연하는데 급급하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광고는 구체적이고 평범한 삶의 일상에 기초할 때에야 공감을 얻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평범한 삶과 구체적 현실이야말로 광고가 터해야할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평범한 삶, 구체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가 말했다는 “진리는 역설로 이뤄져있다”는 말이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삶과 현실은 겹으로, 이중으로, 아니 다면으로 이뤄져 있는 구성물이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진실로 알면, 언제나 숨어있는 진실로부터 뒤통수를 맞게 마련이다.
우리 생명 자체가 그렇지 않던가? 유전자(D.N.A)가 ‘이중 나선구조’로 이뤄진 것은 생명체의 구조가 서로 다른 청실과 홍실이 겹쳐져 짜인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디 생명체뿐이던가. 우주조차 그러하다. 동양에서 우주를 상징하는 다이어그램은 태극이다. 태극기의 한 가운데 그려진 원의 구조가, 대립된 것이 도리어 함께 어울려 있음을 잘 보여준다. 생명이 이중나선이요 우주가 음과 양의 상보적 구도로 짜인 것이라면, 사람관계야 말할 것이 있으랴.
삶의 진실도 음과 양, 여성과 남성, 강함과 약함, 밤과 낮이 엉켜 존재하는 것이리라. 아! 사랑의 진실조차 이중적이지 않던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보면 겹쳐드는 마음의 행로. 만나서 기쁘면서도, 동시에 겹쳐드는 헤어질까 두려운 마음! 사랑의 진실이란 곧 반가우면서도 또 두려운, 이 이중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곧 기쁨 속에는 슬픔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성, 한 사태에 겹쳐있는 ‘뫼비우스의 띠’가 삶의 진실이다. 이 겹의 진리를 잊어버리면 한 곳에 집착하게 되고 또 전체를 왜곡시킨다. 광고는 이 삶의 진실에 기초할 때에야 구체적이면서 보편적인 힘을 얻는다. 반면 하나에 집착하면 왜곡되어 버리거나 비틀어지고 도리어 그 틈새에서 미진한 제 욕망이 발각될 뿐이다. 노자도 일면에 집착하다가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결과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 바 있었다. “집착하면 잃는다(執者失之)”라고.
삶의 전모, 곧 겹으로 이뤄진 삶의 패러독스를 감안하지 않고 현상에만 집착하면 자신의 욕망(속내)만 드러낼 뿐 상대의 마음에까지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광고는 하지 않음만 못하다.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광고
학교가 집에서 멀다. 10분쯤 걸어서 역에 이르러 지하철을 타고난 다음, 또 버스를 옮겨 타고서야 학교에 닿는다. 자연히 전동차 안의 광고판이나 거리에 걸린 플래카드에 눈길이 간다. 무료한 탓일까. 그저 눈길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 내용들을 곱씹게 된다.
전철 안에서 만난 광고들 가운데 눈길을 붙잡는 이런 문안이 있었다. 부산광역시에서 붙인 공익광고인데, 그 문구가 ‘마약 없는 도시, 부산’이다. 글을 읽는 순간 픽 웃음이 터진다. 개그맨 심형래가 얼굴에 점을 붙이고 바보 흉내를 내면서, “영구~ 없다~”라고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처음 부산에 온 외지인이 이 글귀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싶었다. 아마 ‘영구’를 제외하고는, ‘부산에는 마약이 없구나’라는 느낌보다 ‘부산에는 마약이 많구나’라는 반대쪽 생각이 머리를 채울 것 같다. 연이어 ‘내가 못 올 곳을 왔구나’라는 전율이 온몸을 감싸지 않을까?(ㅋㅋ) 만일 그렇다면, 이 광고문안은 실패 사례다. 부산을 광고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산을 해코지한 셈이니까. 나아가 부산시뿐만 아니라 광고를 접할 대중조차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양면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부산에는 분명히 마약이 있다. 국제항구도시여서인지 자주 ‘히로뽕 조직밀매 사건’들을 접하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도시에는 마약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건 백해무익한 광고다.
물론 대중도 광고를 진실의 직설적 표현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광고 자체의 미학도 이해하고, 또 메시지 전달을 위한 기술적 과장이나 눈길을 끌기 위한 조작도 용인한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을 말하기 시작하면 광고는 이미 광고가 아닌 것이다.
‘영구’같은 말이지만, 광고의 힘은 신뢰에서부터 나온다. 이것은 광고든 언론보도든 모든 미디어의 숙명이다. 신뢰를 잃어버리면 모두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광고는 표현욕구와 진실 사이의 아슬아슬한 소롯길을 걷는 작업이리라.
실은 공익(公益)을 내건 광고들 가운데는 ‘마약 없는 도시, 부산’과 같은 것들이 제법 많다. 한 시내의 로터리나 중소도시 입구에 큰 돌을 세워놓고 거기 깊숙이 파놓은 ‘바르게 살자’라는 문안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다.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저 ‘바르게 살자’는 구호는 문득 조폭들 어깨에 자주 보인다는 ‘차카게 살자’를 연상케 하고(ㅎㅎ) 급기야 ‘돌 값이 아깝다’는 혀 차는 소리를 초래한다. 공익을 위해 세워두었다는 ‘바르게 살자’가 전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구실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반공익적 사태를 빚는 셈이다.
두루 공공성을 무슨 추상적 가치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실패 사례들이다. 공익의 소재는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구체적인 삶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활 속의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인 가치를 공공성으로 오해하면 언제나 ‘바르게 살자’라는 하나마나한 말이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결사적이지 않아 보이는 ‘결사반대’
전철을 내려서는 버스로 갈아타야한다. 시골길을 근 30분을 달려야 학교에 닿는다. 요맘때 봄이 깃드는 들판은 볼만하다. 푸르고 붉은 기운이 산천을 휘감는 것이다. 차창으로 스치는 길가에도 다양한 광고문구가 걸려있다. 대개 음식점이나 유흥업체의 개업광고들이다. 그 중에는 ‘결사반대’를 주장하는 광고도 자주 눈에 띈다.
시골 읍내를 지나면 교회가 들어서려는지 큼직한 붉은 글씨로 ‘결사반대! 주택가에 소음을 내는 교회건축 결사반대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걸려있기도 하고, 때로는 ‘주유소 설치 결사반대!’ 또는 ‘고층 아파트 건설 결사반대!’를 외치는 구호도 있다. 한데 ‘결사반대’가 너무 흔하다보니, ‘죽음을 불사한다’는 뜻의 ‘결사(決死)’라는 말이 심드렁해진다.
‘결사반대’가 그 말의 비장함에도 불구하고 시들해진 까닭은 주유소가 설치되고 교회가 들어서도 ‘불사하겠다’던 죽음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작 ‘반대’하는 뜻에 비장미를 덧붙이는 정도의 수식어로 타락한 ‘결사’는 급기야 그것이 수식하려는 내용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말하자면 ‘결사반대’라는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심드렁해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저 사람들 보상을 더 많이 해달라는 뜻 아냐?’와 같은 의심을 동반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을 불사한다’라는 뜻을 담은 ‘결사’라는 말이 무의미한 말, 곧 죽은 언어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언어는 한 사회의 공공재다. 그런 공공재 가운데서도 대단히 농도가 짙은 ‘결사’라는 말이 죽어버리면 실제로 ‘결사반대’를 해야 할 때(가령 나라가 망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쓰지 못하는 비극적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돈이 돌지 않아서 이번 참의 경제위기가 덮쳤다면 말이 제 뜻을 잃고 인플레가 되어버리면 그보다 더 가공할 사태가 빚어진다.
급기야 ‘결사’가 코미디가 되어버린 사례를 한적한 농촌 어귀에서 발견한 것은 슬프기조차 한 경험이다. “결사반대! 상수원 보호구역에 납골당이 웬 말이냐!”
아! 물론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선다는데 그냥 가만히 있어서야 될 일이 아니다. 이때는 정말 ‘널리 알리는 일’, 곧 광고(廣告)를 통해서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생각은 핑 날라서 ‘만약에, 만에 하나 상수원 보호구역에 납골당이 설치되어버린다면 목숨을 걸고 반대한 저 사람들은 과연 어찌 할 것인가!’하는 데까지 미친다.
말대로 하자면 ‘결사반대!’를 했기 때문에, 그 말을 실천해야 한다. 곧 저 플래카드를 걸 때의 그 분하디분한 마음을 널리 제대로 알리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한데 그 뒤가 더 큰 문제가 될 것 같다. 죽은 그 몸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말이다. 결국 그렇게 죽음으로 반대했던 그 납골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좀 복잡해진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첫째, 납골당 설치를 결사반대했다. 둘째, 납골당이 설치되었다. 셋째, 결사반대를 했으므로 죽었다. 넷째, 주검은 결사반대했던 납골당에 담긴다.’ 이거 원 참. 제 혀를 제가 깨무는 격이라고나 할까. 겉말(광고)이 실제(뜻)와 어긋날 때 빚어지는 메시지의 타락상을 시뮬레이션해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에까지 이른다.
돈의 값어치가 인플레되면 화폐가 제 기능을 잘하지 못하듯, 말도 품은 속뜻이 희석되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죽어버린다. 그러니까 광고(널리 알린다)에만 집착하고서 강하고 색다른 표현만을 찾다보면 처음에는 눈길을 끌지 모르나 도리어 언어시장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는 것이리라.
‘선’을 넘은 외침
요즘엔 조그만 지방도시에도 사교육 열풍이다. 각종 학원 선전판들이 길거리에서 사람 눈을 끈다. 그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하루 학습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집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비장하고 결연하기는 한데, 그 비장함을 실천하려면 아마 학원은 여관을 겸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함께 드는 것이다. 이건 다른 학원과 차별화하려는 뜻이 지나쳐서 일상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 경우가 되겠다. 선을 넘어버리면 아무리 문구의 표현이 강하고 비유가 절실하더라도 대중들 가슴을 울리지는 못한다.
한군데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전달하려는 속뜻을 해치는 이런 자해적 표현은 TV광고에서도 보인다. 연전에 사람들 입방아에 올랐던 외국계 보험회사의 광고가 그랬다.
생명보험을 든 남편이 죽었는데, 혼자 남은 아내의 집에 ‘잘 생긴’ 보험회사 직원이 손을 흔들면서 찾아오는, 참 묘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광고였다
현실을 등진 광고의 공허함
학교 가는 길에 발견한 이들 광고의 공통점은 자기 생각에 골똘히 빠졌다는 데 있다. 광고의 주인공은 실은 나(광고주)가 아니라 상대(대중)인 것인데, 자기 사정을 알리고 하소연하는데 급급하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광고는 구체적이고 평범한 삶의 일상에 기초할 때에야 공감을 얻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평범한 삶과 구체적 현실이야말로 광고가 터해야할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평범한 삶, 구체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가 말했다는 “진리는 역설로 이뤄져있다”는 말이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삶과 현실은 겹으로, 이중으로, 아니 다면으로 이뤄져 있는 구성물이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진실로 알면, 언제나 숨어있는 진실로부터 뒤통수를 맞게 마련이다.
우리 생명 자체가 그렇지 않던가? 유전자(D.N.A)가 ‘이중 나선구조’로 이뤄진 것은 생명체의 구조가 서로 다른 청실과 홍실이 겹쳐져 짜인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디 생명체뿐이던가. 우주조차 그러하다. 동양에서 우주를 상징하는 다이어그램은 태극이다. 태극기의 한 가운데 그려진 원의 구조가, 대립된 것이 도리어 함께 어울려 있음을 잘 보여준다. 생명이 이중나선이요 우주가 음과 양의 상보적 구도로 짜인 것이라면, 사람관계야 말할 것이 있으랴.
삶의 진실도 음과 양, 여성과 남성, 강함과 약함, 밤과 낮이 엉켜 존재하는 것이리라. 아! 사랑의 진실조차 이중적이지 않던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보면 겹쳐드는 마음의 행로. 만나서 기쁘면서도, 동시에 겹쳐드는 헤어질까 두려운 마음! 사랑의 진실이란 곧 반가우면서도 또 두려운, 이 이중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곧 기쁨 속에는 슬픔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성, 한 사태에 겹쳐있는 ‘뫼비우스의 띠’가 삶의 진실이다. 이 겹의 진리를 잊어버리면 한 곳에 집착하게 되고 또 전체를 왜곡시킨다. 광고는 이 삶의 진실에 기초할 때에야 구체적이면서 보편적인 힘을 얻는다. 반면 하나에 집착하면 왜곡되어 버리거나 비틀어지고 도리어 그 틈새에서 미진한 제 욕망이 발각될 뿐이다. 노자도 일면에 집착하다가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결과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 바 있었다. “집착하면 잃는다(執者失之)”라고.
삶의 전모, 곧 겹으로 이뤄진 삶의 패러독스를 감안하지 않고 현상에만 집착하면 자신의 욕망(속내)만 드러낼 뿐 상대의 마음에까지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광고는 하지 않음만 못하다.
배병삼 | 영산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 boccaccio@hanmail.net 한겨레신문 고정 칼럼리스트로 활동중이고, 동양사상들을 ‘현재 한국사회’로 초청하여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전2권).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고전의 향연>(공저),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산문집> 등 여러 저서가 있다. 유도회(儒道會) 부설 한문연수원에서 수학했고,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