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가 세상에 나오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친구들끼리 지하실에서 만들던 잡지가 글로벌한 매체가 되기도 하고,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이 거대한 출판제국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유난히 낭만적인 탄생 스토리가 많은 것도 잡지의 세계이다. 물론, 탄생은 그렇다 해도 글로벌 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유통 구조를 갖추는 단계에 이르면 여느 비즈니스와 다를 바 없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잡지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괴짜, 혹은 각종 컬렉션의 맨 앞 줄에 앉는 파워를 행사하는 편집장의 히스테리 같은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한다. 하지만 잡지는 정확하게 세상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하나의 창이다. 그래서 외국의 잡지 가판대를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잡지를 읽고 있을까?
한때 주부들을 위해 가계부를 연말 부록으로 챙겨주는 주부지들의 전성시대가 있었고, 그 이후에 보다 세련된 아파트 문화와 함께 리빙 매거진이 득세했고,그 다음 차례로 라이선스 패션 매거진들이 뒤를 이었다. 독자층의 변화와 함께 이른바 ‘걸’ 매거진으로 10대에서 20대 초반의 ‘걸’들이 시장을 점령하는가 했는데, 그 동안 잡지의 세계에서는 외면 받았던 ‘남성’의 등장으로 대한민국 잡지는 지금 신세계를 탐험 중이다. 그러나 이 신세계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중을 타깃으로 하지만, 대부분 먼 나라 이야기, 마니아들의 세계쯤으로 치부되었다. 남성 매거진의 한계는 남성 독자들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독자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짚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중 등장한 <덴>이라는 매거진은 앞선 트렌드에 주목하며 알 수 없는 외국어로 무장한 기존 매거진에 지친 독자들에게 ‘읽을 것’에 집중한 콘텐츠를 제시하며 주목 받았다. 기존의 글씨보다 크기를 키우고, 텔레비전에서도 신문에서도 소외 받고 있는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덴>은 이른바 ‘아이돌 그룹 멤버 구별하기’와 같은 현실적인 정보와 아날로그 세대에게 추억을 소구하는 방식으로 매거진 업계의 한 켠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변화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보였다.
하지만 변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프랑스 파리의 패션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요지 야마모토, 앤 드뮐미스터, 에트로 등 굵직한 브랜드의 내년 봄·여름용 남성복 패션쇼 무대에 50~70대의 백발 성성한 모델들이 등장한 것이다. 요즘 패션쇼에 서는 모델은 남녀를 불문하고 10대 중·후반이 대부분이다. 20대 중반만 해도 런웨이에 오르기 힘든 지경이니 이런 모델의 등장은 단연코 화제였다. 디자이너들이 이들 중년 모델에게 점잖은 옷을 입힌 것도 아니었다. 중년 모델은 20대가 입어도 손색없을, 오히려 젊은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감각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일본도 이런 상황은 비슷하다. ‘레옹족’이 그것이다. 중년 남성 ‘레옹’과 젊은 여성 ‘마틸다’가 등장하는 영화 <레옹>의 제목을 그대로 본뜬 매거진이 2001년 9월 일본에서 창간됐는데, 이 잡지는 중년 남성의 패션과 스타일을 다뤄 화제가 됐다. 표지에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센스’라는 문구를 넣어 중년의 소비욕을 자극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과 유머를 잃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할 줄 아는 멋쟁이 남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레옹족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모테루 오야지(인기남 아저씨)’, ‘초이와루 오야지(약간 불량한 아저씨)’라고 응용되기도 한다. 아저씨가 되었지만, 젊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남성. 그래서 약간은 불량하고 위험한 이 아저씨의 욕망이 바로 <레옹>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스타일리스트의 필독서라는 <레옹>이 한국에 상륙했다. <레옹>은 여러모로 특이하지만 확실한 매거진이다. 국내에는 흔치 않은 일본에서 온 라이선스 매거진이란 것도 그렇고, 꾸미고 싶어 하는 40~5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 롤모델로 지롤라모 판체타라는 인물의 라이프스타일을 철저히 분석하고 상품화시켰다는 것도 특이하다. 모든 독자층을 껴안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더 강력한, 21세기에 더욱 어울리는 콘셉트를 지녔다. 팔리는 매거진이 되려면 전문적이거나 꼭 그 잡지를 봐야만 얻을 수 있는 독자적인 콘텐츠가 필요한데, <레옹>은 그 코어 콘텐츠로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중년의 스타일링을 내세운다. 일본 잡지 특유의 친절한 ‘스텝 바이 스텝’ 가이드식 화법도 갖췄다. 이전의 남성지처럼 모호한 표현 속에서 그 센스를 배우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맘에 드는 스타일링이 있다면 밑에 적혀 있는 활용 팁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패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한국 남자들에게 딱이다. 한국어판 창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지롤라모 판체타는 “한국 남자들은 하드웨어(외모)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최고이지만 다이아몬드의 원석 같아 조금 더 갈고 닦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레옹> 한국어판 등장과 함께 한국의 아저씨들이 어떻게 위험해지고 멋있어질지 기다려볼 일이다. 아마 올 여름쯤에는 요트에서 신는 데크 슈즈를 신고, 리넨 소재의 반바지에 스트라이프 재킷을 매치한 레옹족 아저씨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식스 팩의 꽃미남 따위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따뜻하고 위험한 매력의 레옹족의 서울버전의 출시를 기다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