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현실이 되다.
TEXT. Jeong Ji Hoon (Futurologist, Head of Myongji Hosp. IT Fusion Research Institute)
작년에 히트친 10대 상품 중 하나가 '차량용 블랙박스'란 사실을 아는지? 범죄가 줄고 사회가 안정화될수록 사람들은 '안전'에 더욱 신경 쓰게 된다.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차단하고 안전 센서를 가동하여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것. 'Precrime'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뜨겁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로 유명한 20세기를 대표하는 SF소설의 거장 필립 K. 딕(Philip K. Dick). 그는 정말 미래에라도 다녀온 것일가. 그가 소설에서 그려낸 미래가 차츰 현실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최근 다시 화제가 된 것이 있으니, 톰 크루즈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제작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배경은 2054년의 워싱턴. 이 도시에는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여 사전에 차단하는 최첨단 치안 시스템 '프리크라임'이 가동 중이다. 언제나 선두에 나서 예비 범죄자를 제압하는 프리크라임의 팀장. 존 앤더튼(톰 크루즈 분)의 활약으로 도시는 언제나 조용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크라임이 도저히 믿기 어려운 범죄를 감지한다. 바로 존 앤더튼 자신이 누군가를 살해하는 장면. 이때부터 앤더튼은 자신의 살인을 막기 위해, 또 숨겨진 음모를 파헤쳐 미래를 바꾸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프리크라임의 감시하에 계획적 살인 대신 우발적 살인만 존재하는 세상,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보여준 미래다.
<가타카>는 근미래에 유전자의 기록을 바탕으로모든 것을 재단한다는 측면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크라임과 맥락이 같다. 프리크라임은 앞으로 일어날 범죄를 미리 알아내 범죄자를 체포하고 시민을 보호하는 ‘안전’을 강조한다. 단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산타크루즈 경찰청은 최근 과거의 범죄기록을 바탕으로 범죄를 예측하는 소프트웨어를 업무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프레드폴’이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와 산타크루즈 대학 연구소에서 공동개발한 이 시스템은 과거 범죄기록과 시간, 장소 등을 입력하면 이를 범죄행동인류학 데이 터를 이용하여 분석, 어떤 범죄가 어느 지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 예측해준다고 한다.
최근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해소하는 기술도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일본의 방사능 지도다.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방사능 확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일반인도 쉽게 방사능 측정이 가능한‘가이거 계수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이거 계수기 만드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우샤히디(Ushahidi)’ 플랫폼을 활용해 그 위치를 공유했다. 이 웹 지도를 기반으로 한 오픈 소스 플랫폼과 집단지성의 결합은 일본 정부의 대응보다 월등히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페이스북 역시 비슷한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릴 때를 떠올려보자. 마우스가 페이스북 친구의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하여 태그까지 달아준다. 이는 페이스북이 인수한 ‘페이스닷컴’의 얼굴인식 프로그램이다. 심지어 페이스북에 허락을 받지 않은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페이스딜스(Facedeals)’라는 기기도 있다. 페이스딜스는 가게 입구에 설치, 들어서는 손님의 얼굴을 인식해 페이스북에 체크인한다. 그리고 가게는 손님이 그간 페이스북에 눌렀던 ‘좋아요’ 기록들을 분석하여 취향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후 손님에게는 해당 가게의 할인
정보 등이 페이스북으로 전송된다. 실제 한 칵테일 바에서 페이스딜스로 손님이 좋아하는 칵테일이나 맥주를 미리 바텐더에게 알려주는 서비스를 시연하기도 하였다.
이런 종류의 기술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더욱 각광받을 가능성이 높다. 안심사회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범죄 자체는 줄어들고 있지만, 범죄에 대한 불안은 더욱 늘어난다는 한 조사결과가 이런 심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프리크라임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거리에는 수많은 CCTV가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 경찰과 국가기관, 막강한 인프라를 가진 기업 등이 사람들을 주시하는 감시사회, 그리고 이에 따른 프라이버시 침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윤리적인 측면도 문제다. <가타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리 단정하는 것이 개개인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급격한 기술의 발전은 자칫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존엄과 윤리적인 부분을 해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 과학자와 공학자, 정책책임자가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하며, 시민들은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여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첨단기술을 적용하려는 곳에서는 프리크라임의 부정적 측면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타카>, 앤드류 니콜, 1998 <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티븐 스필버그, 2002
02. SMELLS LIKE YOURSELF
우리시대 그루누이들의 향수
TEXT. Kim Tai Min (iPublics)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태어난 남자, 그러나 불행히도 자신의 향은 갖고 있지 않은 남자가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 이야기다. 소설은 냄새, 향기로 표현되는 그루누이의 정체성 찾기를 보여준다. 그루누이는 말한다. "말이나 눈빛, 감정이나 의지보다 향기가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고. 힘이 센(?) 향기를 찾으려는 그루누이처럼 지금 우리 시대 그루누이들은 자신만의 향을 찾으로 백화점 1층으로 모여들고 있다.
나를 위한 작은 사치품
최근 백화점 1층이 변하고 있다. ‘아닉구딸(Annick Goutal)’ ‘르라보(Le Labo)’ ‘조말론(Jo Malone)’ 등 이름조차 생소한 프리미엄 향수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입점하고 있는 것. 이 브랜드들은 기존 향수 제품들에 비해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출시 첫날 고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설 정도로 예상 외의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한 백화점 통계에 따르면 고급 향수의 매출은 일 년 새 30~40%가량 신장했다. 같은 기간 전체 화장품 규모가 5% 정도 신장한 것에 비하면 향수 시장의 성장세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하다.
사실 국내에서 향수의 인기는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껏 기초 제품 위주로 성장해온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향수는 브랜드의 럭셔리 아이템 정도로 구색을 맞출 뿐이었다. 불황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고가의 향수 브랜드를 앞다투어 론칭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혹자는 이런 현상을 소비자들이 불황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평한다. 불황기에 소비자들이 명품 가방이나 옷보다 비교적 적은 돈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채울 수 있는 고급 향수에 눈을 돌렸다는 것. 하지만 새로 론칭한 향수 브랜드들은 단순히 고급 향수라는 데 머물지는 않는 것 같다.
‘소녀의 붉은 뺨’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났을 때’ 등 살면서 느끼는 특별한 감성을 표현한 향수, 고객이 원하는 향기를 믹스해 만든 단 하나뿐인 향수, 향수병에 이름과 메시지를 새겨주는 맞춤형 향수, 사람 냄새를 지워 좀비의 공격을 방지하는 향수, 딸기향 혹은 피자향 향수 등 그 발상이 독특하고 희소가치가 높은 향수들이 유독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샴푸나 섬유유연제 등 생활용품의 향 또한 더욱 다양해졌으며, 향기 관련 제품들을 한데 모은 편집숍이 우후죽순 생길 정도로 제품군 또한 풍부해졌다. ‘나를 위한 작은 사치품’으로 충동적으로 향수를 구매하던 소비자들이 이제 자신의 개성에 맞는 향을 직접 골라 즐기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향기가 나를 채우다
소설 <향수>에서 그루누이는 자기 나름의 체취가 전혀 없어서 무리에 끼어도 아무도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동물조차 그에게 다가와 냄새 맡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누구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좋은 향수를 만들어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고독한 그루누이가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마련한 처절한 처세술이었달까.
아마도 그루누이는 인간의 뇌는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후각이 시각보다 더 오래 뇌에 기억된다는 사실도. 체취가 없던 그루누이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한 것일 게다. 스쳐도 아무 전율없는 밋밋한 낱장짜리 인물. 대부분의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런 밋밋한 낱장짜리 존재로 기억되기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 그루누이들은 상대가 나라는 존재를 좀 더 입체적으로 기억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양 귓불 아래 살짝 향수를 뿌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향수’라 부르는 ‘오드투왈렛(Eau de Toilette)’ 풍의 향수는 1370년 발명되었다. 이는 헝가리의 엘리자베스 왕비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헝가리 워터’라 불렸다는데, 이와 관련해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당시 70세가 넘는 나이였던 왕비가 이 향수를 바르고 폴란드 왕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것! 아마도 향기의 힘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또한 향수를 선물하는 데는 ‘나를 잊지 말아라’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니 혹시나 누군가에게 향수를 선물 받는다면 절대로 그를 잊지 말자. 하긴 당신의 코가 그 향수를 맡을 때마다 저절로 그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향기는 힘이 세니까.
‘절대후각’을 타고 난 영화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 자신의 가장 순수한 본능에이끌려 지상 최고의 향기를
만들려 했던 그의 욕망은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닮아있다.
무한 경쟁 시대는 현대인을 피곤하게 한다. 격무에 지친 우리가 최고급 향수를 장만하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가 숨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유명 브랜드부터, 아는 사람만 아는 희소한 브랜드까지, 다양한 향기가 오늘도 우리를 유혹한다.
03. LUCKY STRIKE!
나에게 주는 깜짝 선물, 럭키백
TEXT. Oh Hae Jin (Brand Communication Institute, INNOCEAN Worldwide)
여기 방금 구입한 물건의 포장을 급하게 뜯어보면서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해하고 설레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물건을 받는지도 모르면서 돈부터 내고 즐거워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걸까? 이들이 진짜 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여 있던 선물 상자. 퇴근하는 아빠보다 더 반갑게 맞이했던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안에 내용물이 좋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 설레었던 건 상자를 발견하고,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어 열어보기 전까지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시간이었다. 이처럼 무엇을 받을지 몰라 생기는 두근거림, 이 두근거림을 자극하는 마케팅 활동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달 전, 출근길 강남대로에서 버스정류장보다 훨씬 긴 사람들의 행렬과 마주쳤다. 바로 프리스비에서 진행한 럭키백(Lucky Bag) 이벤트 때문이었다. 럭키백은 내용물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고 임의의 세트를 구성해 실제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판매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날 프리스비는 선착순 500명에게 애플 정품이 들어 있는 3만 원짜리 럭키백을 판매했다. 각 세트마다 구성이 다르고, 운이 좋으면 고가의 상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애플 마니아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일까. 판도라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상자를 열어보았듯이 럭키백을 열고자 하는 마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밤까지 지우새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들에겐 그 기다림조차 축제였고, 밤새워 나눈 얘기는 추억이었고, 한정된 수량을 ‘득템’한 것은 자랑거리가 되었다. 개봉한 럭키백의 내용물을 SNS에서 공유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스타벅스의 럭키백 5000세트가 반나절 만에 팔려나간 것을 보면, 럭키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당분간 뜨거울 것 같다. 기업에 서는 50% 이상 할인해도 판매가 어려운 재고를 럭키백에 담아두면 기꺼이 사가는 소비자들이 신기하고 또 고마울 것이다.
한편, 이런 기대감과 호기심을 이용해 지속적 수익을 창출하는 케이스도 있다. 서브스크립션 커머스(Subscription Commerce)라 부르는 이 서비스는 잡지를 구독하듯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특정 주제에 부합하는 다양한 상품을 구성, 정기적으로 소비자에게 배달한다. 비록 내가 돈을 지불했을지라도 어떤 물건을 받을지 모르는 의 외성에 매달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든다.
화장품 전문가들이 엄선한 제품을 제공하는 ‘글로시 박스’나 ‘미미 박스’처럼 처음에는 뷰티 업계가 중심이 되어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기용품, 남성 속옷, 공연 티켓을 서비스하는 업체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 판매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한 예로 마케팅 컨설팅업체 엠앤에스파트너스의 ‘스마트 체험 박스’는 월 9900원을 지불하면 아이와 엄마를 위한 5~6만 원 상당의 건강식품, 생활용품 세트를 제공한다. 이달에 친환경 수저와 포크, 오스트레일리아산 베이비 워터, 저자극 자외선 차단제 등을 받았다면 다음 달에는 홍삼,비타민, 아이용 쌀과자, 뇌기능 검사권, 마스크 팩 등으로 구성된 박스를 받는 식이다. 한 가지 브랜드의 상품으로 구성된 럭키백과는 달리 다양한 브랜드, 그리고 아는 사람만 아는 희소한 브랜드의 제품을 다룬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무료로 샘플을 제공하는 방식의 경우 기업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다. 소비자에게 전달된 제품이 자연스럽게 홍보나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 사람에게 소문을 내거나 SNS를 통해 온라인 리뷰를 올리고, 샘플로 받은 것의 실제 제품을 구매하는 사례가 많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경제 불황 때문에 미래의 불확실함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또 다른 불확실함에 열광하고 즐거워하니 말이다.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라는 노랫말처럼 일상적인 구매행동에 약간의 흐릿함을 더했을 뿐인데 소비자가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 줄 누가 알았을까.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판매 방식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할지 사뭇 기대된다.
04. PAST, NOW and FUTURE of HAND-D RIP COFFEE
잠재된 심성 우려내는 느림의 미학
TEXT. Ji Young Gu (Chief Editor of Coffee&Tea)
커피바람이 뜨겁다. 국내 커피시장은 지난 5년간 연 15% 내외의 가파른 성장률을 보여왔다. 전체 시장에서 커피전문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약 1조 7,000억 원 규모로, 순수 원두커피 시장은 약 8,000~9,000억 원 수준. 10년 전에 비해 7배가량 늘어난 수치이다. 최근 이 뜨거운 커피 시장에서 조용한 반란이 일고 있다. 골목길을 따라 커피 원두 볶는 향과 함께 느릿느릿 한 잔의 커피를 우려내는 핸드드립 커피가 그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앨리 스토리’란 카페가 있다. 대로변을 살짝 벗어난 뒷골목에 자리한 로스터리(자가배전) 카페로, 60제곱미터의 작은 규모에 실내 장식도 수수한 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카페가 드립커피를 찾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점심 때는 물론, 저녁 무렵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는 단지 수도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이른바 ‘대가’, 혹은 ‘장인’이라 일컫는 초창기 커피인들이 포진해 있는 지역(특히 강릉과 원주, 포항, 울산, 부산 등지)에서는 일찌감치 핸드드립 커피가 ‘진정한 커피’의 대명사처럼 자리 잡았다. 이들은 때로 ‘일본식’이란 비아냥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직·간접으로 이들 ‘선생’들로부터 핸드드립 커피의 비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속속 카페를 내면서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도시 기반의 에스프레소(디지털) 문화에 대한 지역문화의 역습이자 아날로그의 반격인 셈이다.
로스터리 카페는 주인이 직접 볶은 커피를 핸드드립 위주로 내린다는 면에서 기존의 커피전문점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대개의 로스터리 카페가 로스터기를 잘 보이는 곳에 보란 듯이 모셔둔(?) 것도 고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로스터에게 있어서 로스터기는 크든 작든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고가품이자 밥줄이다. 그것은 카페의 전문성을 살리는 동시에 은근하고 강력한 흡인력까지 발휘하는 소중한 존재이기도하다.
지역 커피축제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이른바 고수들의 핸드드립 장면이 매스컴을 장식하면서 로스터리 카페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2007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대중으로 하여금 젊고 생기발랄한 바리스타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에스프레소에 열광하게 만들었다면, 최근 들어 각종 매체와 인터넷, SNS를 통해 비춰지는 다양한 핸드드립 모습은 그것이 일반 소비대중 속으로 폭넓게 확산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년 사이 필터를 이용한 드립커피가 미국과 유럽, 호주 등지에서 갑자기 화두로 떠오른 것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다. 인터넷을 통한 유튜브 동영상 정보가 1차적인 원인이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2007년 도쿄에서 열린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에서 일본식 핸드드립 커피와 로스터리 카페가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11년 월드커피이벤트(WCE)에서 제1회 브루어스컵(Brewers Cup) 대회를 열면서 전 세계 바리스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필터드립 커피는 유럽에서 발원한 추출 방식이다. 에스프레소 커피에 눌려 한동안 뒷전으로 밀어둔 사이에 일본이 집중적으로 개발 발전시킴으로써 종주국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런 필터커피가 서양권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베리에이션 커피에 식상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직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달리 에스프레소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커피의 꽃이자 최대 성과라 일컬어지는 에스프레소 커피가 고개를 내민 것은 탈레랑 사후 63년 후인 1901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베체라(Luigi Bezzera)에 의해서였다. 독일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멜리타 벤츠(Melita Bentz)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여과식 필터커피를 개발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인 1908년의 일이다. 멜리타를 세계화시킨 주인공은 일본이다. 일본은 핸드 드립 커피가 강세인 나라이다. 최근 그 수가 많이 줄긴 했으나, 독특한 스타일의 커피를 추구하는 개성적인 카페가 많이 남아 일본 커피의 저력을 이어가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멜리타 외에도 칼리타(Kalita), 고노(Kono), 하리오(Hario) 등 모양과 원리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핸드드립 기구가 개발되고 보급되었다. 또 이런 내수 기반을 바탕으로, 일본의 드립 기구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잠재된 심성 우려내는 손흘림, 느림과 누림의 미학
2013년 현재, 우리가 핸드드립에 점점 더 이끌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커피 마니아들은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을 우선으로 꼽을 것이고, 감성주의자들은 핸드드립 커피 속에 담겨 있는 정성과 마음씀씀이를 내세울 것이다. 개중에는 잘 내려서 멋진 잔에 담긴 커피의 우아함과 고즈넉함을 높이 평가하는 낭만주의자, 칼로리와 다이어트를 먼저 떠올리는 젊은 여성도 적지 않으리라.
핸드드립은 ‘느림의 미학’이다. 바쁘다고 서둘러서는 제맛을 내기 어렵다. 일사분란하게, 빨리 빨리 움직이는 것이 최선인 문화코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아날로그적이고, 수동적이다. 스타벅스 이후 15년 동안 우리나라 커피시장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반면, 미국식과 이탈리아식, 일본식이 혼재하면서 적지 않은 갈등도 동시에 겪었다. 그러나 갈등은 ‘우리식’을 찾고 가꾸기 위한 또 하나의 실험 과정이기도 했다. 그 오랜 진통의 결과물이자 대안이 바로 원두커피요, 핸드드립이다.
아직 국내 원두커피 시장에서 가정용 원두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전체 커피시장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격이다. 하지만 전국 4,000여 개 로스터리 카페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커피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와 커피향이 만만치 않다. 앞으로 3~4년 후쯤이면 이들 스몰 로스터들의 커피, 다양하고 개성적인 원두커피가 가정과 사무실의 인스턴트를 상당량 밀어낼 것으로 보인다. 그때쯤이면 우리나라의 핸드드립 커피와 로스터리 카페 문화도 조정기를 거쳐 성숙기로 접어들 것이고, 뛰어난 손기술과 창의적인 두뇌, 특유의 근면성과 융통성을 바탕으로 중국은 물론 이탈리아와 미국에서도 또 하나의 한류를 형성하며 꽃피게 될 것이다.
05. GREEN WAVE AGRIT AINMENT
도시에서 남으로 창을 내고, 호미로 김을 매지요
TEXT. Ahn Myung Jun (Landscape Architecture Critic)
녹 색 바 람 이 불 면 서 ‘도 시 농 사 (Urba n Agriculture)’가 주목받고 있다. 자연 상태의 흙을 흔히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외부에서 먹을거리를 공급받는 도시에서 농사라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시농사는 도시 커뮤니티의 성장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도시의 공공정원 기능을 하면서 텃밭으로 인한 커뮤니티 형성과 도시 경관 향상, 녹지 네트워크 강화, 환경복지 증진 등 공적 임무를 새롭게 수행하기 때문. 오래된 미래, 도시농업과 함께 우리의 앞날을 들여다 본다.
정원의 재발견과 도심 가드닝
도시에 사는 우리의 삶을 예술로 만들려는 노력이 ‘정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삶이 관조의 태도가 아니라 참여의 생성적 태도에 있음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문화로 접어든 것이다. 여기에 정원이 통념처럼 거대하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나 손쉽게 가까운 마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생산과 여가가 통합된 도시의 재탄생이 사회적으로도 중요해졌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텃밭의 가치가 부각되는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도시농업보다 도시농사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이해되고, 도시농사가 창조적인 도시 정원문화를 형성하고 있음이 보이고, 비로소 우리 도시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다.
첫째, 도시(Urbanism)가 바뀌고 있다. 개인이 소비하는 공간(객체성)에서 점차 소통하며 나름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생산 공간(주체성)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것. 전통적으로 도시는 생산과는 거리가 먼 교류와 소비의 공간이었으나, 최근의 도시이론은 시민사회 또는 커뮤니티 중심의 도시 주체(Urban Actors) 활동에 초점을 둔다.
둘째, 농업 역시 전환이 이루어졌다. 전반적인 생산 활동이 경제성보다 심미성을 추구하고 있다. 1차 산물을 통한 직접적 성과보다는 녹색관광, 농촌체험 등과 같은 2, 3차 성과에 더 초점을 두기도 한다. 이는 농업이 가진 참여와 체험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농사를 문화로 먼저 이해하고 그것이 공간 또는 장소와 잘 융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셋째, 정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정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공공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정원은 본래 구획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즐김(Pleasure)의 공간으로, 공간과 자연의 사유화로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도시 공원과 정원이 재부각하며 시대적 변화를 예고했는데, 최근에는 노동과 예술이 통합되는 장이자 문화와 자연의 접점(문화적 자연)이라는 측면에서 ‘제3의 자연’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시대 공공정원의 가능성
산업화 이후 극도의 효율성을 강조한 직주분리 형의 기계적 도시, 많은 사람이 빽빽이 모여 사는 좁은 주거 공간, 직장에 따라 손쉽게 옮겨가는 주거지…. 오늘날 현대인에게 장소와 삶이 맺는 다양한 관계성, 기억과 추억, 사촌 같은 이웃등은 모두 옛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농촌사회의 공동체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서구 사회가 200여 년에 걸쳐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약 50년이라는짧은 시간에 겪으면서 문화적 변화가 아직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다. 서구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이익사회의 문화로 접어들었다면, 아직 우리는 농촌사회의 특성을 가진 채 산업화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의 아파트 문화, 아줌마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공동체성의 단면이다. 참으로 얼마나 다행인가.
여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 변화가 정원과도시 가꾸기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있다. 과거 ‘조각미남’, ‘컴퓨터미인’ 등 형식적 아름다움(The Beauty)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내용적 아름다움(The Aesthetic)이 중요한 시대다. 즉, 객관적 아름다움보다는 주관적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이런 변화는 ‘생태, 기억, 참여, 지속’이라는 네가지 사회적 관심 주제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주제와 방향은 정원을 통해 종합적으로 체험되고 발현된다. 그것은 공원과같은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원은 참여하는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며, 누구나 사색을 통해 정원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기 때문이다.
도심의 정원화가 정원과 공원의 공진화(Co- Evolution)를 이끌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시대 도시농사는 그 결과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먼저 의미를 두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얼마나 크게 많이 생산해낼 것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게 길러내느냐에 더 초점이 있는 경작문화(Cultivation)인 것이다. 기르는 과정에 먼저 의미를 둔다는 것은 그것이 결국 정원문화의 하나임을 강조해준다.
그러다보니 도시농사라는 주제는 우리 도시의 대표적 자연인 정원과 공원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세분된 일상에 통합을 요청하기도 한다. 유리된 일상과 도시를 통합하고, 기계적 공간과 정서적 감흥을 통합하고, 세대 간 소통을 이루며, 나아가 소비와 생산을 융합하고, 깊이에만 몰두하고 있는 분야를 인접 분야와 먼저 교류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로지르기를 통한 공진화의 시대에 정원이 그 대표적인 교류의 장이자 소통의 매체로 부각되는 이유다.
도시농사와 정원문화의 즐거움을 위하여
정원을 가꾸는 일은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함이아니다. 크게 보면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롭고 아름다운 삶의 실천 마당이면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실천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도시의 커뮤니티를 복원하고 삶의 가치를 배양하는 공공의 정원 역할을 불러와 녹색의 아름다운 도시를 구현하는 중요한 방편이 된다.
여기서 정원일이 본질적으로 과정을 중시하는자연 즐기기이자 돌보기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정원에 들이는 노력은 ‘패스트’(Fast)하게 생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점에서 정원일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를 바꿔주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정원문화란 느림의 문화이고, ‘충분히-천천히’의 문화이자, 생각과 고민의 문화다.
현대 정원은 결국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로서, 자연에 대한 본성적 복고주의이자 자연물을 통한 즐김(Entertaining)의 정원문화를 지향한다. 그것은자연물(인공물의 반대적 개념으로, 자생성이 있는 자연 속 다양한 동식물, 무기물)을 다루는 행위이자, 인간의 의지와 요구에 따라 자연물을 활용하는 방식이며, 자연물을 선택하고 배치하고 유지·관리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과 교감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이다. 우리 시대 공공정원과 애그리테인먼트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시대 그루누이들의 향수
TEXT. Kim Tai Min (iPublics)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태어난 남자, 그러나 불행히도 자신의 향은 갖고 있지 않은 남자가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 이야기다. 소설은 냄새, 향기로 표현되는 그루누이의 정체성 찾기를 보여준다. 그루누이는 말한다. "말이나 눈빛, 감정이나 의지보다 향기가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고. 힘이 센(?) 향기를 찾으려는 그루누이처럼 지금 우리 시대 그루누이들은 자신만의 향을 찾으로 백화점 1층으로 모여들고 있다.
나를 위한 작은 사치품
최근 백화점 1층이 변하고 있다. ‘아닉구딸(Annick Goutal)’ ‘르라보(Le Labo)’ ‘조말론(Jo Malone)’ 등 이름조차 생소한 프리미엄 향수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입점하고 있는 것. 이 브랜드들은 기존 향수 제품들에 비해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출시 첫날 고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설 정도로 예상 외의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한 백화점 통계에 따르면 고급 향수의 매출은 일 년 새 30~40%가량 신장했다. 같은 기간 전체 화장품 규모가 5% 정도 신장한 것에 비하면 향수 시장의 성장세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하다.
사실 국내에서 향수의 인기는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껏 기초 제품 위주로 성장해온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향수는 브랜드의 럭셔리 아이템 정도로 구색을 맞출 뿐이었다. 불황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고가의 향수 브랜드를 앞다투어 론칭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혹자는 이런 현상을 소비자들이 불황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평한다. 불황기에 소비자들이 명품 가방이나 옷보다 비교적 적은 돈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채울 수 있는 고급 향수에 눈을 돌렸다는 것. 하지만 새로 론칭한 향수 브랜드들은 단순히 고급 향수라는 데 머물지는 않는 것 같다.
‘소녀의 붉은 뺨’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났을 때’ 등 살면서 느끼는 특별한 감성을 표현한 향수, 고객이 원하는 향기를 믹스해 만든 단 하나뿐인 향수, 향수병에 이름과 메시지를 새겨주는 맞춤형 향수, 사람 냄새를 지워 좀비의 공격을 방지하는 향수, 딸기향 혹은 피자향 향수 등 그 발상이 독특하고 희소가치가 높은 향수들이 유독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샴푸나 섬유유연제 등 생활용품의 향 또한 더욱 다양해졌으며, 향기 관련 제품들을 한데 모은 편집숍이 우후죽순 생길 정도로 제품군 또한 풍부해졌다. ‘나를 위한 작은 사치품’으로 충동적으로 향수를 구매하던 소비자들이 이제 자신의 개성에 맞는 향을 직접 골라 즐기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향기가 나를 채우다
소설 <향수>에서 그루누이는 자기 나름의 체취가 전혀 없어서 무리에 끼어도 아무도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동물조차 그에게 다가와 냄새 맡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누구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좋은 향수를 만들어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고독한 그루누이가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마련한 처절한 처세술이었달까.
아마도 그루누이는 인간의 뇌는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후각이 시각보다 더 오래 뇌에 기억된다는 사실도. 체취가 없던 그루누이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한 것일 게다. 스쳐도 아무 전율없는 밋밋한 낱장짜리 인물. 대부분의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런 밋밋한 낱장짜리 존재로 기억되기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 그루누이들은 상대가 나라는 존재를 좀 더 입체적으로 기억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양 귓불 아래 살짝 향수를 뿌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향수’라 부르는 ‘오드투왈렛(Eau de Toilette)’ 풍의 향수는 1370년 발명되었다. 이는 헝가리의 엘리자베스 왕비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헝가리 워터’라 불렸다는데, 이와 관련해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당시 70세가 넘는 나이였던 왕비가 이 향수를 바르고 폴란드 왕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것! 아마도 향기의 힘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또한 향수를 선물하는 데는 ‘나를 잊지 말아라’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니 혹시나 누군가에게 향수를 선물 받는다면 절대로 그를 잊지 말자. 하긴 당신의 코가 그 향수를 맡을 때마다 저절로 그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향기는 힘이 세니까.
‘절대후각’을 타고 난 영화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 자신의 가장 순수한 본능에이끌려 지상 최고의 향기를
만들려 했던 그의 욕망은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닮아있다.
무한 경쟁 시대는 현대인을 피곤하게 한다. 격무에 지친 우리가 최고급 향수를 장만하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가 숨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유명 브랜드부터, 아는 사람만 아는 희소한 브랜드까지, 다양한 향기가 오늘도 우리를 유혹한다.
03. LUCKY STRIKE!
나에게 주는 깜짝 선물, 럭키백
TEXT. Oh Hae Jin (Brand Communication Institute, INNOCEAN Worldwide)
여기 방금 구입한 물건의 포장을 급하게 뜯어보면서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해하고 설레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물건을 받는지도 모르면서 돈부터 내고 즐거워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걸까? 이들이 진짜 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여 있던 선물 상자. 퇴근하는 아빠보다 더 반갑게 맞이했던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안에 내용물이 좋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 설레었던 건 상자를 발견하고,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어 열어보기 전까지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시간이었다. 이처럼 무엇을 받을지 몰라 생기는 두근거림, 이 두근거림을 자극하는 마케팅 활동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달 전, 출근길 강남대로에서 버스정류장보다 훨씬 긴 사람들의 행렬과 마주쳤다. 바로 프리스비에서 진행한 럭키백(Lucky Bag) 이벤트 때문이었다. 럭키백은 내용물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고 임의의 세트를 구성해 실제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판매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날 프리스비는 선착순 500명에게 애플 정품이 들어 있는 3만 원짜리 럭키백을 판매했다. 각 세트마다 구성이 다르고, 운이 좋으면 고가의 상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애플 마니아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일까. 판도라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상자를 열어보았듯이 럭키백을 열고자 하는 마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밤까지 지우새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들에겐 그 기다림조차 축제였고, 밤새워 나눈 얘기는 추억이었고, 한정된 수량을 ‘득템’한 것은 자랑거리가 되었다. 개봉한 럭키백의 내용물을 SNS에서 공유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스타벅스의 럭키백 5000세트가 반나절 만에 팔려나간 것을 보면, 럭키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당분간 뜨거울 것 같다. 기업에 서는 50% 이상 할인해도 판매가 어려운 재고를 럭키백에 담아두면 기꺼이 사가는 소비자들이 신기하고 또 고마울 것이다.
한편, 이런 기대감과 호기심을 이용해 지속적 수익을 창출하는 케이스도 있다. 서브스크립션 커머스(Subscription Commerce)라 부르는 이 서비스는 잡지를 구독하듯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특정 주제에 부합하는 다양한 상품을 구성, 정기적으로 소비자에게 배달한다. 비록 내가 돈을 지불했을지라도 어떤 물건을 받을지 모르는 의 외성에 매달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든다.
화장품 전문가들이 엄선한 제품을 제공하는 ‘글로시 박스’나 ‘미미 박스’처럼 처음에는 뷰티 업계가 중심이 되어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기용품, 남성 속옷, 공연 티켓을 서비스하는 업체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 판매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한 예로 마케팅 컨설팅업체 엠앤에스파트너스의 ‘스마트 체험 박스’는 월 9900원을 지불하면 아이와 엄마를 위한 5~6만 원 상당의 건강식품, 생활용품 세트를 제공한다. 이달에 친환경 수저와 포크, 오스트레일리아산 베이비 워터, 저자극 자외선 차단제 등을 받았다면 다음 달에는 홍삼,비타민, 아이용 쌀과자, 뇌기능 검사권, 마스크 팩 등으로 구성된 박스를 받는 식이다. 한 가지 브랜드의 상품으로 구성된 럭키백과는 달리 다양한 브랜드, 그리고 아는 사람만 아는 희소한 브랜드의 제품을 다룬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무료로 샘플을 제공하는 방식의 경우 기업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다. 소비자에게 전달된 제품이 자연스럽게 홍보나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 사람에게 소문을 내거나 SNS를 통해 온라인 리뷰를 올리고, 샘플로 받은 것의 실제 제품을 구매하는 사례가 많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경제 불황 때문에 미래의 불확실함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또 다른 불확실함에 열광하고 즐거워하니 말이다.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라는 노랫말처럼 일상적인 구매행동에 약간의 흐릿함을 더했을 뿐인데 소비자가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 줄 누가 알았을까.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판매 방식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할지 사뭇 기대된다.
04. PAST, NOW and FUTURE of HAND-D RIP COFFEE
잠재된 심성 우려내는 느림의 미학
TEXT. Ji Young Gu (Chief Editor of Coffee&Tea)
커피바람이 뜨겁다. 국내 커피시장은 지난 5년간 연 15% 내외의 가파른 성장률을 보여왔다. 전체 시장에서 커피전문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약 1조 7,000억 원 규모로, 순수 원두커피 시장은 약 8,000~9,000억 원 수준. 10년 전에 비해 7배가량 늘어난 수치이다. 최근 이 뜨거운 커피 시장에서 조용한 반란이 일고 있다. 골목길을 따라 커피 원두 볶는 향과 함께 느릿느릿 한 잔의 커피를 우려내는 핸드드립 커피가 그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앨리 스토리’란 카페가 있다. 대로변을 살짝 벗어난 뒷골목에 자리한 로스터리(자가배전) 카페로, 60제곱미터의 작은 규모에 실내 장식도 수수한 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카페가 드립커피를 찾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점심 때는 물론, 저녁 무렵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는 단지 수도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이른바 ‘대가’, 혹은 ‘장인’이라 일컫는 초창기 커피인들이 포진해 있는 지역(특히 강릉과 원주, 포항, 울산, 부산 등지)에서는 일찌감치 핸드드립 커피가 ‘진정한 커피’의 대명사처럼 자리 잡았다. 이들은 때로 ‘일본식’이란 비아냥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직·간접으로 이들 ‘선생’들로부터 핸드드립 커피의 비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속속 카페를 내면서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도시 기반의 에스프레소(디지털) 문화에 대한 지역문화의 역습이자 아날로그의 반격인 셈이다.
로스터리 카페는 주인이 직접 볶은 커피를 핸드드립 위주로 내린다는 면에서 기존의 커피전문점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대개의 로스터리 카페가 로스터기를 잘 보이는 곳에 보란 듯이 모셔둔(?) 것도 고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로스터에게 있어서 로스터기는 크든 작든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고가품이자 밥줄이다. 그것은 카페의 전문성을 살리는 동시에 은근하고 강력한 흡인력까지 발휘하는 소중한 존재이기도하다.
지역 커피축제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이른바 고수들의 핸드드립 장면이 매스컴을 장식하면서 로스터리 카페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2007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대중으로 하여금 젊고 생기발랄한 바리스타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에스프레소에 열광하게 만들었다면, 최근 들어 각종 매체와 인터넷, SNS를 통해 비춰지는 다양한 핸드드립 모습은 그것이 일반 소비대중 속으로 폭넓게 확산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년 사이 필터를 이용한 드립커피가 미국과 유럽, 호주 등지에서 갑자기 화두로 떠오른 것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다. 인터넷을 통한 유튜브 동영상 정보가 1차적인 원인이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2007년 도쿄에서 열린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에서 일본식 핸드드립 커피와 로스터리 카페가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11년 월드커피이벤트(WCE)에서 제1회 브루어스컵(Brewers Cup) 대회를 열면서 전 세계 바리스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필터드립 커피는 유럽에서 발원한 추출 방식이다. 에스프레소 커피에 눌려 한동안 뒷전으로 밀어둔 사이에 일본이 집중적으로 개발 발전시킴으로써 종주국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런 필터커피가 서양권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베리에이션 커피에 식상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직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달리 에스프레소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커피의 꽃이자 최대 성과라 일컬어지는 에스프레소 커피가 고개를 내민 것은 탈레랑 사후 63년 후인 1901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베체라(Luigi Bezzera)에 의해서였다. 독일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멜리타 벤츠(Melita Bentz)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여과식 필터커피를 개발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인 1908년의 일이다. 멜리타를 세계화시킨 주인공은 일본이다. 일본은 핸드 드립 커피가 강세인 나라이다. 최근 그 수가 많이 줄긴 했으나, 독특한 스타일의 커피를 추구하는 개성적인 카페가 많이 남아 일본 커피의 저력을 이어가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멜리타 외에도 칼리타(Kalita), 고노(Kono), 하리오(Hario) 등 모양과 원리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핸드드립 기구가 개발되고 보급되었다. 또 이런 내수 기반을 바탕으로, 일본의 드립 기구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잠재된 심성 우려내는 손흘림, 느림과 누림의 미학
2013년 현재, 우리가 핸드드립에 점점 더 이끌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커피 마니아들은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을 우선으로 꼽을 것이고, 감성주의자들은 핸드드립 커피 속에 담겨 있는 정성과 마음씀씀이를 내세울 것이다. 개중에는 잘 내려서 멋진 잔에 담긴 커피의 우아함과 고즈넉함을 높이 평가하는 낭만주의자, 칼로리와 다이어트를 먼저 떠올리는 젊은 여성도 적지 않으리라.
핸드드립은 ‘느림의 미학’이다. 바쁘다고 서둘러서는 제맛을 내기 어렵다. 일사분란하게, 빨리 빨리 움직이는 것이 최선인 문화코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아날로그적이고, 수동적이다. 스타벅스 이후 15년 동안 우리나라 커피시장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반면, 미국식과 이탈리아식, 일본식이 혼재하면서 적지 않은 갈등도 동시에 겪었다. 그러나 갈등은 ‘우리식’을 찾고 가꾸기 위한 또 하나의 실험 과정이기도 했다. 그 오랜 진통의 결과물이자 대안이 바로 원두커피요, 핸드드립이다.
아직 국내 원두커피 시장에서 가정용 원두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전체 커피시장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격이다. 하지만 전국 4,000여 개 로스터리 카페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커피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와 커피향이 만만치 않다. 앞으로 3~4년 후쯤이면 이들 스몰 로스터들의 커피, 다양하고 개성적인 원두커피가 가정과 사무실의 인스턴트를 상당량 밀어낼 것으로 보인다. 그때쯤이면 우리나라의 핸드드립 커피와 로스터리 카페 문화도 조정기를 거쳐 성숙기로 접어들 것이고, 뛰어난 손기술과 창의적인 두뇌, 특유의 근면성과 융통성을 바탕으로 중국은 물론 이탈리아와 미국에서도 또 하나의 한류를 형성하며 꽃피게 될 것이다.
05. GREEN WAVE AGRIT AINMENT
도시에서 남으로 창을 내고, 호미로 김을 매지요
TEXT. Ahn Myung Jun (Landscape Architecture Critic)
녹 색 바 람 이 불 면 서 ‘도 시 농 사 (Urba n Agriculture)’가 주목받고 있다. 자연 상태의 흙을 흔히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외부에서 먹을거리를 공급받는 도시에서 농사라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시농사는 도시 커뮤니티의 성장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도시의 공공정원 기능을 하면서 텃밭으로 인한 커뮤니티 형성과 도시 경관 향상, 녹지 네트워크 강화, 환경복지 증진 등 공적 임무를 새롭게 수행하기 때문. 오래된 미래, 도시농업과 함께 우리의 앞날을 들여다 본다.
정원의 재발견과 도심 가드닝
도시에 사는 우리의 삶을 예술로 만들려는 노력이 ‘정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삶이 관조의 태도가 아니라 참여의 생성적 태도에 있음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문화로 접어든 것이다. 여기에 정원이 통념처럼 거대하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나 손쉽게 가까운 마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생산과 여가가 통합된 도시의 재탄생이 사회적으로도 중요해졌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텃밭의 가치가 부각되는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도시농업보다 도시농사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이해되고, 도시농사가 창조적인 도시 정원문화를 형성하고 있음이 보이고, 비로소 우리 도시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다.
첫째, 도시(Urbanism)가 바뀌고 있다. 개인이 소비하는 공간(객체성)에서 점차 소통하며 나름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생산 공간(주체성)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것. 전통적으로 도시는 생산과는 거리가 먼 교류와 소비의 공간이었으나, 최근의 도시이론은 시민사회 또는 커뮤니티 중심의 도시 주체(Urban Actors) 활동에 초점을 둔다.
둘째, 농업 역시 전환이 이루어졌다. 전반적인 생산 활동이 경제성보다 심미성을 추구하고 있다. 1차 산물을 통한 직접적 성과보다는 녹색관광, 농촌체험 등과 같은 2, 3차 성과에 더 초점을 두기도 한다. 이는 농업이 가진 참여와 체험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농사를 문화로 먼저 이해하고 그것이 공간 또는 장소와 잘 융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셋째, 정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정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공공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정원은 본래 구획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즐김(Pleasure)의 공간으로, 공간과 자연의 사유화로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도시 공원과 정원이 재부각하며 시대적 변화를 예고했는데, 최근에는 노동과 예술이 통합되는 장이자 문화와 자연의 접점(문화적 자연)이라는 측면에서 ‘제3의 자연’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시대 공공정원의 가능성
산업화 이후 극도의 효율성을 강조한 직주분리 형의 기계적 도시, 많은 사람이 빽빽이 모여 사는 좁은 주거 공간, 직장에 따라 손쉽게 옮겨가는 주거지…. 오늘날 현대인에게 장소와 삶이 맺는 다양한 관계성, 기억과 추억, 사촌 같은 이웃등은 모두 옛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농촌사회의 공동체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서구 사회가 200여 년에 걸쳐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약 50년이라는짧은 시간에 겪으면서 문화적 변화가 아직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다. 서구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이익사회의 문화로 접어들었다면, 아직 우리는 농촌사회의 특성을 가진 채 산업화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의 아파트 문화, 아줌마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공동체성의 단면이다. 참으로 얼마나 다행인가.
여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 변화가 정원과도시 가꾸기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있다. 과거 ‘조각미남’, ‘컴퓨터미인’ 등 형식적 아름다움(The Beauty)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내용적 아름다움(The Aesthetic)이 중요한 시대다. 즉, 객관적 아름다움보다는 주관적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이런 변화는 ‘생태, 기억, 참여, 지속’이라는 네가지 사회적 관심 주제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주제와 방향은 정원을 통해 종합적으로 체험되고 발현된다. 그것은 공원과같은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원은 참여하는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며, 누구나 사색을 통해 정원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기 때문이다.
도심의 정원화가 정원과 공원의 공진화(Co- Evolution)를 이끌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시대 도시농사는 그 결과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먼저 의미를 두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얼마나 크게 많이 생산해낼 것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게 길러내느냐에 더 초점이 있는 경작문화(Cultivation)인 것이다. 기르는 과정에 먼저 의미를 둔다는 것은 그것이 결국 정원문화의 하나임을 강조해준다.
그러다보니 도시농사라는 주제는 우리 도시의 대표적 자연인 정원과 공원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세분된 일상에 통합을 요청하기도 한다. 유리된 일상과 도시를 통합하고, 기계적 공간과 정서적 감흥을 통합하고, 세대 간 소통을 이루며, 나아가 소비와 생산을 융합하고, 깊이에만 몰두하고 있는 분야를 인접 분야와 먼저 교류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로지르기를 통한 공진화의 시대에 정원이 그 대표적인 교류의 장이자 소통의 매체로 부각되는 이유다.
도시농사와 정원문화의 즐거움을 위하여
정원을 가꾸는 일은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함이아니다. 크게 보면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롭고 아름다운 삶의 실천 마당이면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실천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도시의 커뮤니티를 복원하고 삶의 가치를 배양하는 공공의 정원 역할을 불러와 녹색의 아름다운 도시를 구현하는 중요한 방편이 된다.
여기서 정원일이 본질적으로 과정을 중시하는자연 즐기기이자 돌보기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정원에 들이는 노력은 ‘패스트’(Fast)하게 생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점에서 정원일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를 바꿔주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정원문화란 느림의 문화이고, ‘충분히-천천히’의 문화이자, 생각과 고민의 문화다.
현대 정원은 결국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로서, 자연에 대한 본성적 복고주의이자 자연물을 통한 즐김(Entertaining)의 정원문화를 지향한다. 그것은자연물(인공물의 반대적 개념으로, 자생성이 있는 자연 속 다양한 동식물, 무기물)을 다루는 행위이자, 인간의 의지와 요구에 따라 자연물을 활용하는 방식이며, 자연물을 선택하고 배치하고 유지·관리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과 교감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이다. 우리 시대 공공정원과 애그리테인먼트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