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History] 1938년, 한국 최초의 광고 크리에이티브 컨테스트
‘제1회 전조선 상업학교 생도 상업미술전람회 포스터, 신문광고도안 대모집’
퍽 긴 이름의 광고 크리에이티브 현상 모집이었다. 한국 최초의 광고 크리에이티브 현상 모집이었으니 그 내용을 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과제 광고에 대한 크리에이티브상이었다. 이듬해 7월 19~21일 3일간 동아일보에 게재된 12개 회사의 광고가 과제인 셈이었다<그림 1, 2, 3>. 이 12개 회사는 당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제1회에 참가한 12개 회사는 다음과 같다.
회사에 따라서는 제작상 요망사항을 적었고 참고자료도 제공했다. 출품자격은 중학교가 5년제이던 당시 상업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일제시대 상업학교에서는 상업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9월 28일에는 입상/입선자가 발표되었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부문별 입상/입선자의 수는 특선과 1, 2, 3등 각각 1개씩이고, 가작은 포스터 부문이 5개, 신문광고 부문이 4개인데 비해 입선작은 포스터 부문이 43개, 신문광고 부문이 15명이다. 수상자 가운데는 일본인 학생도 상당수 있었다. 10월 1일부터는 수상작을 매일 2작품씩 신문지면에 보도했다. 특선작 상금 50원이란 금액은 오늘날에 비하자면 대기업 사원 한 달 봉급에 해당되는 ‘거금’이다.
광고주들이 얻은 것이 무엇일까? 대기업이란 이미지, 그리고 입상작 보도에서 얻는 노출 효과와 화신갤러리에서 작품이 전시된다는 부가가치도 있었을 것이다. 왜 화신백화점이었나? 아마도 서울에 유일한 한국인경영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종로네거리, 전차 정류장이 있는 곳이라는 장소의 이점도 있었을 것이다. 광고의 타겟으로서 1938년에 동아일보를 읽는 계층은 지식층이자 영향력 있고 구매력이 높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광고상은 1939년, 1940년 두 차례 더 있었다. 다만 1940년 8월 1일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문을 닫았다. 그로써 광고상도 끝났다. 일제의 언론통폐합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일 한 가지가 있다. 평양, 남포, 그리고 서울 종로네거리 보신각 맞은쪽에 있던 화신(和信)백화점은 사라졌다. 주인은 박흥식. 친일파였다. 일본의 한국 경제 침략의 첨병이던 남대문로의 옛날 미츠코시(三越)백화점 -지금은 신세계(구관)- 는 서울시 문화재로 남아 있다.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더 자세히 보려면 동아일보를 검색하면 된다. 뜻있는 아트디렉터가 있다면 한국 최초의 이 광고상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업계 ‘선배’에 대한 경의 표시라기보다 혹시 인사이트라도 있을는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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