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움.이] 세상은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글 김경태 프로 GCSC 2팀 gokt.kim@samsung.com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 이 숫자는 원주의 길이와 지름의 비율인 원주율(π)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이런 걸 배워서 어디에 써 먹지?” 원주율을 나타내는 일련의 숫자들은 모두 다른 숫자들입니다. 얼핏 이 숫자들은 시작에 불과하고, 무한히 이어지며 반복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숫자들의 조합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원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
한 번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지 않는 이 원주율 안에는 생일이나 비밀번호, 주민등록번호나 행운의 숫자 등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숫자들을 문자로 바꾼다면, 존재하는 모든 가능한 조합으로 이뤄진 단어들이 되겠지요. 여러분이 태어나서 처음 말했던 단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가장 오랫동안 추억되는 아름다웠던 시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 이 세상 모든 무한한 가능성들이 원 하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걸로 뭘 할 것인지, 무엇에 쓸 것인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겠지요.” 미국 드라마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Person of Interest)>에 나오는 세상을 감시하는 시스템 개발자 핀치 해롤드의 말처럼, 원에 숨어 있는 불규칙한 숫자의 조합으로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읽는 것. 우리는 그렇게 연관되지 않을 듯한 것들의 파도를 타고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와 예기치 못한 일들에 도전하곤 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마에삼, 그리고 마!라이트
최근 굿컴퍼니솔루션센터에서 부산 경찰과 함께 진행한 ‘마!라이트’ 캠페인은 부산 시민들이 24시간 안심하고 부산 전역을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요구에서 출발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나 어두운 밤길에서 주위의 무관심과 방치를 관심과 참견으로 만드는 솔루션의 시작은 바로 ‘빛’이었습니다. 밤거리 어둠의 공포에 맞서 안심을 주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조언은 바로 SF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에 의해서였습니다. 아시모프의 단편 <최후의 질문(The Last Question)>에서 컴퓨터가 엔트로피의 역전에 대한 최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억겁에 걸친 연구 끝에 내뱉은 첫 마디. “빛이 있으라!” 이 말이 바로 ‘마!라이트’의 중심이 되는 빛의 모티브가 됐습니다.
야구팬이라면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미국전 선발로 등판했던 손민한 선수의 호투를 기억합니다. 특히 당대 메이저리그의 최고 타자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즈(A-Rod)를 공 세 개로 삼진을 잡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이른바 ‘마에삼(마, 에이로드 삼구 삼진 잡아봤나)’이라는 전설적인 유행어가 그때 생겨났습니다. 수년 전 유행어였던 ‘마에삼’이 바로 ‘마!’가 만들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범죄예방을 위해 CCTV를 더 설치하거나 인력과 예산을 추가로 투입하는 등의 물리적인 수단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아이디어는 없을까? 부산의 지역성을 잘 나타내면서도 부산 사람들에게 재미와 공감, 그리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제 해결의 단초가 ‘마!’였습니다.
‘마!’는 부산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아 다양한 열린 해석을 하게 했습니다. 부산 시민들을 지켜주고 말을 건네주는 똑똑한 불빛인 ‘마!라이트’는 JTBC <마녀사냥>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명소화되고 있습니다. 아시모프에서 손민한으로, 부산 경찰에서 ‘마!라이트’로 이어지는 과정은 언뜻 연관되지 않는 것 같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모두 서로에게
중요한 인과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몇 가지의 엉뚱한 연결이 예측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만들듯,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때로는 아이디어의 씨앗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연결돼 있는지 모릅니다.
1. 테러를 방지하는 ‘예측 기계’를 통해 뉴욕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해결하는 여러 에피소드를 담은 미드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facebook.com/PersonOfInterestCBS
2,3. 부산경찰과 GCSC가 함께한 마!라이트 설치 과정.
주변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
지난해 진행했던 업사이클링 캠페인에 대한 아이디어 역시 그간 눈여겨보았던 SF(Science Fiction)의 모티브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제품의 수명이 다해서 사라지게 되면, 육신은 사라지지만 제품과 소비자가 함께 오랫동안 추억을 쌓았던 영혼과 DNA는 사라지지 않고 주인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유명한 SF작품인
<노인의 전쟁(Old Man’s War)>에 나왔던 유전학적 설정을 토대로 업사이클링의 관점을 생각해 보니, 재활용되는 제품과 주인의 정서적 애착을 담은 스토리텔링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어떤 상상이 누군가에는 또 다른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다른 어떤 솔루션을 위한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기도 하며, 때로는 어떤 실수라도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좋은 솔루션에서는 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모든 것들이 이렇게 연결돼 있다고 믿습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두고 어떻게든 연결돼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수많은 숫자들이 조합된 원주율처럼 모든 것을 품고 있습니다. 한 부분이라도 지워지면 더 이상 원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때로는 거침없어 보이는 무모한 시작도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이겨낼 힘을 주는 듯합니다. 너와 나, 그리고 이어져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존재하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임을 믿습니다.
4,5. 브라운관을 보도블록으로 재활용한 업사이클링 캠페인 <삼성전자 TV로드>.
6. 존 스칼지의 SF 시리즈 <노인의 전쟁>은 75세가 된 노인이 젊은 육체를 얻어 우주 전쟁에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amaz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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