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김익현(기자, 지디넷코리아 미디어연구소장)
헬레나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다. 호지는 이 책에서 인도 라다크 마을 사례를 통해 '오래된 미래'라는 중요한 화두르 던진다. 전통 문화를 복원할 뿐 아니라, 그것을 미래로 끌고 가자는 주장을 제기한 것. '오래된 미래'라는 절묘한 문구 속에는 먼 과거에 미래 사회의 해법이 있다는 주장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최근 한 조사 결과를 접하면서 '오래된 미래'라는 잊고 있던 문구를 떠올리게 됐다. 페이스북이 구글 트래픽을 앞질렀다는 자료였다. 뉴스 사이트 트래픽 분석 전문업체인 파슬리(Parse.ly)에 따르면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를 통해 유입되는 비중이 43%를 기록했다. 반면 구글 검색을 통한 유입 비율은 38%에 머물렀다.
언뜻 보기엔 별 뉴스 아닐 수도 있다. 구글, 페이스북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건 하루 이틀 있던 일이 아니지 않냐고 눙칠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뉴스 소비 풍속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시사하는 조사 결과다. 그동안 대중매체가 중심 역할을 하던 뉴스 소비가 이젠 또래 간의 대화를 통한 소비로 전환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뉴스 소비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다는 징조로 읽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그동안 대중매체가 던져주는 뉴스를 소비하는데 익숙했다. 그것도 대중매체가 구성한 패키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신문 뿐 아니라 방송 뉴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소비됐다. 특히 방송 뉴스는 정해준 순서대로 '선형적인 소비'를 해야만 했다.
우리에겐 상식이나 다름없는 이런 소비 방식은 사실 뉴스의 원래 모습은 아니다. 서로 모여서 함께 소식을 나누고, 관련 얘기를 덧붙이는 것이 뉴스의 원조였다. 원시 시대 이래 이런 식의 뉴스 소비는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17~18세기부터 본격화된 근대 뉴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얘기를 좀 더 깊이 하기 위해선 언론학 고전들을 잠시 뒤적여보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에는 근대 뉴스가 등장하던 초기 모습이 잘 나와있다. 잘 아는 것처럼 근대적인 뉴스의 효시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유행한 카페와 살롱이다. 그 시기 수많은 사람은 카페와 살롱에 모여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적과 흑>의 저자였던 평민 스탕달 역시 살롱을 중심으로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고 한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따르면 당시 살롱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으며, 어떤 주제도 제한 없이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금기 없는 공론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마구 모였을까? 그건 아니었다고 한다. 살롱 문화가 조금씩 발전하면서 각 살롱별로 전문 분야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A살롱은 철학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 B살롱은 스포츠에 정통한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라는 식의 평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버마스는 18세기 살롱에서 공론의 원형을 발견했다. 하지만 카페와 살롱은 근대 뉴스의 산실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뉴스란 원래 사람들이 서로 나눌 때 가치가 커지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나누면서 함께 분노하고, 또 함께 기뻐할 때 더 가치가 커지는 콘텐츠. 이게 뉴스의 '오래된 미래'였다.
대다수 독자는 '함께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공감을 나눌 때 즐거움이 더해진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목청 높여 싸우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본능 속에 잠재돼 있던 뉴스 본능이다. 이런 속성은 근대 뉴스 서비스 등장 초기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면 "전통 매체의 뉴스 유포 방식과 다르잖아?"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렇다. 분명 다르다.
우리는 그동안 대중매체가 일방적으로 취사선택한 뉴스를 소비하는데 너무도 익숙했다. 하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관점에선 오히려 대중매체 시대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산업화와 함께 사회가 분화되고, 도달 범위가 넓어지면서 '오래된 미래'가 더 이상 구현되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규모는 커졌지만 뉴스의 오래된 미래를 구현해줄 기술은 아직 등장하지 못한 상황, 그게 기술적 관점에서 바라본 대중매체 시대의 냉정한 주소였다. 하지만 '1인 미디어의 효시'였던 블로그의 등장과 함께 일방적인 뉴스 유통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워 블로거들은 웬만한 매체 못지않은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독자들과 긴밀한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트위터를 거쳐 페이스북으로 넘어오면서 이런 상황은 더더욱 심화됐다. 여기에다 스마트폰이 주된 소비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면서 뉴스 시장에서도 대화와 소통 중심의 '오래된 미래'가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소셜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전통 매체의 패키지 상품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젠 뉴스를 건별로 소비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미 포털 뉴스를 통해 언론사 개별 브랜드의 해체 현상을 겪고 있지만, 소셜 미디어 역시 이런 상황을 좀 더 심화시켰다.
내가 구글에서 페이스북으로 뉴스의 중심축이 옮겨가고 있다는 조사 결과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뉴스도 '일방향적 소비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확실하게 바뀌고 있는 한 단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통 매체 독자들에게 뉴스는 '검색의 대상'이었다. 전통 매체들이 '찾아야 할' 뉴스를 패키지로 만들어서 줬다. 하지만 SNS와 모바일이 주된 플랫폼이 되면서 뉴스는 '소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젠 친구와의 대화가 덧붙여진 뉴스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됐다. '오래된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적잖은 고민 거리를 안겨준다. 특히 뉴스 생산자에겐 변신이라는 큰 과제가 던져졌다. '소통의 시대'에 여전히 대중매체의 문법을 고수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젠 소식을 던져주는 것 못지않게, 뭔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아니 한발 더 들어가, 아예 대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스프레더블 뉴스(Spreadable News)'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터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엔 별 뉴스 아닐 수도 있다. 구글, 페이스북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건 하루 이틀 있던 일이 아니지 않냐고 눙칠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뉴스 소비 풍속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시사하는 조사 결과다. 그동안 대중매체가 중심 역할을 하던 뉴스 소비가 이젠 또래 간의 대화를 통한 소비로 전환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뉴스 소비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다는 징조로 읽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그동안 대중매체가 던져주는 뉴스를 소비하는데 익숙했다. 그것도 대중매체가 구성한 패키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신문 뿐 아니라 방송 뉴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소비됐다. 특히 방송 뉴스는 정해준 순서대로 '선형적인 소비'를 해야만 했다.
우리에겐 상식이나 다름없는 이런 소비 방식은 사실 뉴스의 원래 모습은 아니다. 서로 모여서 함께 소식을 나누고, 관련 얘기를 덧붙이는 것이 뉴스의 원조였다. 원시 시대 이래 이런 식의 뉴스 소비는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17~18세기부터 본격화된 근대 뉴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얘기를 좀 더 깊이 하기 위해선 언론학 고전들을 잠시 뒤적여보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에는 근대 뉴스가 등장하던 초기 모습이 잘 나와있다. 잘 아는 것처럼 근대적인 뉴스의 효시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유행한 카페와 살롱이다. 그 시기 수많은 사람은 카페와 살롱에 모여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적과 흑>의 저자였던 평민 스탕달 역시 살롱을 중심으로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고 한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따르면 당시 살롱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으며, 어떤 주제도 제한 없이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금기 없는 공론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마구 모였을까? 그건 아니었다고 한다. 살롱 문화가 조금씩 발전하면서 각 살롱별로 전문 분야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A살롱은 철학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 B살롱은 스포츠에 정통한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라는 식의 평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버마스는 18세기 살롱에서 공론의 원형을 발견했다. 하지만 카페와 살롱은 근대 뉴스의 산실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뉴스란 원래 사람들이 서로 나눌 때 가치가 커지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나누면서 함께 분노하고, 또 함께 기뻐할 때 더 가치가 커지는 콘텐츠. 이게 뉴스의 '오래된 미래'였다.
대다수 독자는 '함께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공감을 나눌 때 즐거움이 더해진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목청 높여 싸우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본능 속에 잠재돼 있던 뉴스 본능이다. 이런 속성은 근대 뉴스 서비스 등장 초기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면 "전통 매체의 뉴스 유포 방식과 다르잖아?"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렇다. 분명 다르다.
우리는 그동안 대중매체가 일방적으로 취사선택한 뉴스를 소비하는데 너무도 익숙했다. 하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관점에선 오히려 대중매체 시대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산업화와 함께 사회가 분화되고, 도달 범위가 넓어지면서 '오래된 미래'가 더 이상 구현되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규모는 커졌지만 뉴스의 오래된 미래를 구현해줄 기술은 아직 등장하지 못한 상황, 그게 기술적 관점에서 바라본 대중매체 시대의 냉정한 주소였다. 하지만 '1인 미디어의 효시'였던 블로그의 등장과 함께 일방적인 뉴스 유통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워 블로거들은 웬만한 매체 못지않은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독자들과 긴밀한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트위터를 거쳐 페이스북으로 넘어오면서 이런 상황은 더더욱 심화됐다. 여기에다 스마트폰이 주된 소비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면서 뉴스 시장에서도 대화와 소통 중심의 '오래된 미래'가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소셜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전통 매체의 패키지 상품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젠 뉴스를 건별로 소비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미 포털 뉴스를 통해 언론사 개별 브랜드의 해체 현상을 겪고 있지만, 소셜 미디어 역시 이런 상황을 좀 더 심화시켰다.
내가 구글에서 페이스북으로 뉴스의 중심축이 옮겨가고 있다는 조사 결과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뉴스도 '일방향적 소비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확실하게 바뀌고 있는 한 단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통 매체 독자들에게 뉴스는 '검색의 대상'이었다. 전통 매체들이 '찾아야 할' 뉴스를 패키지로 만들어서 줬다. 하지만 SNS와 모바일이 주된 플랫폼이 되면서 뉴스는 '소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젠 친구와의 대화가 덧붙여진 뉴스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됐다. '오래된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적잖은 고민 거리를 안겨준다. 특히 뉴스 생산자에겐 변신이라는 큰 과제가 던져졌다. '소통의 시대'에 여전히 대중매체의 문법을 고수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젠 소식을 던져주는 것 못지않게, 뭔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아니 한발 더 들어가, 아예 대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스프레더블 뉴스(Spreadable News)'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