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웹서밋 하이라이트 ? web summit.net
디지털은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이 디지털은 아니다
이번 웹서밋의 서브 컨퍼런스 중 특히 디자이너, 콘텐츠 제작자, 에이전시, 미디어 종사자들이 집결하는 <크리에이티프(Creatiff)>와 <콘텐츠메이커스(ContetnsMakers)>는 웹서밋을 이루는 거대한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올해는 IDEO의 디자인 디렉터 앤 파스칼과 할리우드 배우이자 히트레코드 설립자인 조셉 고든 레빗이 연사로 참여하며 열기를 더했다.
만 이틀 또는 사흘에 걸쳐 진행된 크리에이티프와 콘텐츠메이커스는 나머지 컨퍼런스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일관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블리파 CEO 앰버리시 미트라의 말을 인용하자면, “디지털은 모든 것이나 모든 것이 디지털은 아니다(Digital is everything but not everything is digital).” VR, MR 및 다양한 인터랙티브 솔루션이 발전하면서 콘텐츠 제작자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술에 빠져들지만, 기술 자체에 지나치게 몰입하기보다는 새로운 기술의 특징을 활용해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 앰버리시 미트라 세션 <Augmented Reality: Why everything is not all digital?>
?twitter.com/rishmitra
이번 웹서밋에서 앰버리시 미트라의 말이 여러 세션을 통해 거듭 반복됐다는 점은 일견 아이러니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이미 다양한 콘텐츠 테크놀로지가 단지 발화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일반 사용자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중이며 심도 있는 논의를 동반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발전하는 콘텐츠 테크놀로지, ‘기술은 스토리를 따라간다’
블리파는 AR과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해, 실제 이미지를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AR 콘텐츠를 제공하는 ‘비주얼 디스커버리’ 솔루션 스타트업이다. 작년 8월 약 5400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했으며, 매직리프 및 마인드메이즈와 함께 가상현실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을 가진 ‘엘리트 유니콘 스타트업’으로 꼽히고 있다.
▲ 이미지를 인식시킬 경우 현실 위에 가상 이미지를 ‘얹어서’ 보여주는 블리파 플랫폼 ?Blippar
이 회사의 CEO 앰버리시 미트라는 콘텐츠의 핵심은 AR, VR, MR 같은 기술이 아니라 스토리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혁신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콘텐츠를 제작할 때도 ‘디지털로 환원할 수 없는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지 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AR은 현실 위에 디지털 이미지를 ‘얹는(Augment)’ 기술이고 MR은 현실과 디지털을 ‘융합(Mix)’하는 기술이므로, 가상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유리되지 않게 하는 점이 중요하다. 둘 다 얼마나 현실과 디지털을 설득력 있게 결합시키는지 여부가 콘텐츠의 질을 판가름한다. 즉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매끄러운 연결이야말로 사용자들의 주목도를 높이고 몰입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리파의 강점은 둘을 이어주는 스토리텔링에 있으며, 하이네켄과 함께 진행한 <전설의 7인(The Legendary 7)> 캠페인이 일례다. 블리파는 농부들의 삶을 AR 콘텐츠로 제작할 때 실제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등지에 거주하는 농부 7명의 삶을 기반으로 삼아 소비자가 더 깊이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했다.
▲ 블리파의 하이네켄 캠페인 <전설의 7인>
MR과 AR이 VR보다 우세한 이유, 자연스러운 UX
VR은 2016년 초 MWC, CES, SXSW 등에서 열풍을 불러일으킨 ‘열광적 기술(Fanatic technology)’이며, 게임이나 영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앞으로 가장 우세를 점할 콘텐츠 테크놀로지는 AR 또는 MR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VR은 사용자에게 HMD와 콘트롤러 같은 하드웨어에 의존할 것을 요구하며, 현실로부터 사용자를 고립시킨다. 반면 AR과 MR은 별도의 하드웨어 없이 현실과 가상이 자연스럽게 겹칠 수 있도록 하며, 사람을 콘텐츠에 매몰시키기보다는 전체 환경을 구성하는 일부로 만든다.
현재 홀로렌즈를 보유한 마이크로소프트, MR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매직리프뿐만 아니라 블리파나 글리프 같은 경쟁사들은 모두 HMD 없이도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도록 사람의 안구에 직접 빛을 쏘아 상이 맺히는 기술 개발에 매진 중이다. 구글 ATAP의 이반 푸프례프는 “10년 내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며 앰버리시 미트라의 세션에 힘을 더했다. 이반 푸프례프는 <인터랙티브한 만물(Interactive everything)> 세션에서 ‘프로젝트 솔리’의 결과물인 제스처 인식 기술을 시연하며 앞으로 마우스 및 기타 콘트롤러 없이도 정교한 MR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인공지능의 도전 혹은 가능성, 인터랙티브 콘텐츠
이번 웹서밋의 거대 키워드 중 하나였던 인공지능의 발달 역시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만약 머신러닝 알고리즘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면, 그가 관객과 자유롭게 인터랙션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다음 행동을 취하게 된다면 제작자는 어떻게 스토리라인을 구성해야 할까? 주인공이 결정을 내리는 특정 지점마다 스토리는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제작자는 관객과 주인공의 인터랙션을 설계하는 데에서부터 어떤 결말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장 많은 제작자기 직면하고 있는 고민 중 하나다. 현재 VR이 게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만큼 VR을 활용한 영화 역시 게임 개발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게임에서는 이런 ‘자율적인 주인공’이 당연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기술도 점차 고도화되는 바, 영화 제작자들도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만들어 관객에게 보다 입체적인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 예컨대 스위스 기반의 콘텐츠 스타트업 CtrlMovie는 관객에게 선택권을 주는 인터랙티브 영화를 제작 및 감상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세계 최초의 인터랙티브 영화 <Late Shift> 제작을 마치고 앱스토어에 론칭하기도 했다. <Late Shift>는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 CtrlMovie의 인터랙티브 영화 <Late Shift> 메이킹 필름 ? Late Shift
커뮤니티를 공략하는 콘텐츠, 괴짜와의 연대
MR,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로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에게 인상적인 각인을 남기기 위함이고, 소비자의 감정이입은 결국 스토리에 좌우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스토리가 새로운 기술과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소비자의 몰입을 증진시킬까? 윌리엄 서전트가 예로 든 <화성 견학(Fieldtrip to Mars)> 프로젝트에서 핵심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콘텐츠와 커뮤니티의 관계를 시사하는 <화성 견학> ? Lukas-Pierre Bessis
여태껏 VR은 소비자를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시공간으로 ‘순간 이동(Teleport)’시키는 방식으로 이용됐으나, 현실과 차단된 스토리텔링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화성 견학> 프로젝트는 버스 한 대를 화성으로 순간 이동시켰다. 그러나 버스 안에 탑승한 아이들, 즉 콘텐츠 감상자들에게 오히려 ‘현실’, ‘진짜’라는 감각을 고무시킨다. 함께 콘텐츠를 감상하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사용자 경험이 강화된다. <화성 견학>은 ①현실로부터 유저를 차단하지 않는 스토리를 만든 후 ②기술의 힘을 빌려 스토리를 최적의 형태로 구현하고 ③사용자의 커뮤니티를 공략해 현실과 연결고리를 형성 및 강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취향을 가진 ‘괴짜’들을 공략하는 이미지 호스팅 플랫폼 임거 ©imgur.com
하우즈(Houzz), 팬시(Fancy) 같은 스타트업들이 이른바 콘텐츠, 커뮤니티와 커머스를 결합하는 3C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했듯이 콘텐츠와 커뮤니티가 주고 받는 영향력은 강력하다. 특정 커뮤니티의 연대를 얻는 순간 콘텐츠는 빠른 속도로 전파되며, 바이럴이 또 다른 콘텐츠를 형성하는 선순환을 낳는다.
2009년 설립된 이미지 호스팅 플랫폼 임거(Imgur) 역시 ‘모바일을 과용하는 10대 괴짜들(Teenage Geeks Overdosing Mobile’을 공략해 성공한 스타트업이다. 괴상하거나 소름끼치는 ‘짤방’ 같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틈새시장의 소비자들을 타깃팅한 바, 현재 임거는 약 30억 달러의 시장 가치를 기록하고 있다.
CEO앨런 샤프가 틈새 커뮤니티의 공략이 매우 좋은 방안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밀레니얼 세대의 약 25%가 자신을 ‘디지털 괴짜’라고 응답하고 있고,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앨런 샤프는 콘텐츠 제작자나 마케터들은 콘텐츠 기획에서 배포까지 틈새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3D 프린팅과 AI를 포함하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고민
이 외에도 3D프린팅, 인공지능, 인터랙티브 UI와 UX 등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에 부합하는 크리에이티브 및 콘텐츠에 대한 논의가 폭넓게 펼쳐졌다. ‘기계의 역량’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과 ‘인간의 역량’이라 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의 공존에 있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심도 있는 이야기가 진행됐다. 오토캐드 같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오토데스크의 대표 칼 바스는 “인간의 개입 없이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고, 드론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도시가 스스로 똑똑해지는” 사회에서 디자이너가 어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3D 프린팅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회의주의자들의 염려와는 달리 컴퓨터는 인간의 작업을 일부 대체하는 동시에 인간을 위한 새로운 직업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3D 프린팅은 칼 바스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혁신 기술로, 전통적 제조 과정에 비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자체에 대한 직업적 장벽을 낮출 수 있다. 이 경우 디자이너가 과거 수행해 왔던 업무는 분명 대체될 수 있지만, 더 복잡하고 정교한 수준의 산출물을 신속히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새로운 알고리즘을 고민하는 업무가 디자이너에게 새롭게 부여될 것이다.
▲ 칼 바스 세션 <3D printing our way to advanced manufacturing> ?Rishi Vadher
위의 두 컨퍼런스 외에도 <뮤직 노트>, <모덤>, <판다컨퍼런스>를 비롯해 그 외 컨퍼런스의 여러 세션에서 크리에이티브,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됐다. 확실히 새로운 기술들은 기존의 디자이너 및 제작자가 맡았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메칸 에릭슨 일본 지점이 제작한 <Clorets Mint> 크리에이티브는 비록 실질적인 업무를 대부분 인간이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인공지능 CD가 개입한 광고로 꼽히고 있다.
▲ 최초로 인공지능 CD가 제작한 광고로 꼽히는 매칸 에릭슨 재팬의 <Clorets Mint> ?クロレッツ
그러나 분명한 것은 콘텐츠의 중심은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에 기반한 스토리에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물리적 세계와 가상의 디지털 세계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스토리가 좋은 디지털 콘텐츠를 탄생시키며, 반대로 테크놀로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순간 콘텐츠는 윌리엄 서전트의 말처럼 “반드시 실패(Always fail)”할 수밖에 없다.
소셜 뉴스 플랫폼을 제공하는 레딧의 설립자 알렉시스 와니언은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용어로 이를 요약했다. 온갖 필터 효과로 합성 및 변조된 이미지들이 SNS에 넘쳐흐르는 지금,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진짜(Authentic things)’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내 휴가가 얼마나 멋졌는지 주변에 자랑하기 위해 꾸며진 게시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 수밖에 없다”며, 크리에이티브 및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듣고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스토리”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화려한 시각적 효과로 범람하는 디지털 콘텐츠 시장에서 유저들에게 호소하려면 ‘진짜와 진정성(Realness and Authenticity)’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을 재고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