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구분이 엄격했던 패션에서 성별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유니섹스 모드가 유행하면서부터였다.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우리는 아예 여성복과 남성복이란 구분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 시대’에 진입했다. 그리고 이런 젠더리스 문화는 웹툰과 영화 등 대중문화는 물론 언어 생활에까지 용해되면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패션의 기준은 이제 성별이 아니다
성별 파괴 현상의 첫 징조였던 유니섹스의 투사(鬪士)는 기존 질서에 반감을 드러낸 히피들이었고, 특히 여성이 남성복이나 남성의 헤어스타일을 차용하는 양상을 보였다. 남성 주도의 역사와 문화에 반기를 든 여성이 그 주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거세게 불고 있는 젠더리스 열풍의 주체는 일방적이지 않다.
평소 치마를 즐겨 입는다고 알려진 젠더리스 패션의 세계적 아이콘은 다름 아닌 할리우드 배우 윌 스미스의 두 아들이다. 젠더리스의 아이콘이 비단 바다 건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이 주목하는 가수 지드래곤과 배우 강동원은 특유의 감각과 매력을 앞세워 젠더리스 현상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패션을 통해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입느냐가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적어도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사회적 성별과 나이가 아닌 ‘스웨그(Swag)’가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꽃무늬는 남녀 모두를 위한 것”이라 일갈했고,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신은 디자인할 때 “젠더가 아닌 ‘피플’을 생각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밝힌 바 있다. 그런 철학과 의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핑크’와 ‘꽃무늬’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남성의 패션은 화려해지고, 여성의 패션은 파워가 강조되는 추세다. 그러니 총량은 같다고 해야 할까.
다양하고 화려한 꽃무늬가 돋보이는 구찌의 남성복 컬렉션. ⓒgucci.com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모호한 프라다 제품들. ⓒprada.com
사람들은 돌잔치 초대를 받으면 반사적으로 아기의 성별부터 확인해 왔다. 남자아기면 청색 계열을, 여자아기면 적색 계열의 옷을 선물로 준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유아복 선택의 기준이 성별이 아닌 디자인과 실용성, 기능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복식만큼 보수적인 분야도 없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여성이 남성 복장을 하는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었다. 패션이 젠더리스 문화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그만큼 금지의 강도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졌을 때 패션만큼이나 성 구별이 엄격했으나 시동이 더디 걸린 분야가 있다. 바로 향수다. 하지만 이 보수성 강한 분야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남녀 브랜드의 경계가 명확하게 양분됐던 향수 업계에 향을 전문으로 다루는 니치 퍼퓸(Niche Perfume)이 등장하면서 성별 구분이 무의미해졌고, 남녀 선호 향수 브랜드가 동일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성화인가, 제3의 성의 출현인가
남자 배우가 여성 속옷 브랜드나 여성용품의 광고 모델을 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파격이 아니다. 그래서 이른바 ‘힙통령’이라 불리는 장문복이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화장품 모델이 됐다고 해서 대중은 놀라지 않는다. 그만큼 젠더리스 문화가 일정 수준 우리 일상으로 파고 들었다고 봐도 좋다. 이제 화장과 패션, 미용 등으로 스스로를 한껏 꾸민 젊은 남성과 길거리에서 만난다고 이상할 것이 없는 사회가 됐다. 비비크림 정도는 기본이고 아이라인까지 소화해 내는 것이 21세기의 한국 남성들이다.
여성들의 변화는 ‘걸크러시(Girlcrush)’라는 하나의 단어로 축약돼 설명된다.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두고 맞은편에 있었던 양성은 이렇게 마주보며 젠더리스를 향해 달리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두고 ‘중성화’라고 부르든, ‘제3의 성’의 출현이라고 정의 내리든 분명한 것은 양성이 강한 운동성을 보이면서 스스로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젠더리스 현상은 비단 패션이나 미용 등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담론과 이슈로 확산되고 있다. 런던과 뉴욕의 시민단체들에 의해 추진됐던 ‘성 중립 화장실(Gender Neutral Restroom)’이 국내 모 대학과 카페 등에서 다발적으로 시도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있다.
추진 주체 측은 “성소수자들을 위한 인권 차원의 접근”이라며 동조를 권하고 있다. 그런 명분과 함께 변기를 제외한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비좁은 도심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앞세운다. 그러나 “성범죄에 노출될 우려가 크다”는 반대 여론의 목소리도 크다.
성 편견을 없애는 캠페인으로 확장된 사례다. ⓒciud/shutterstock.com
다양한 분야에서 이슈와 담론을 양산하고 있는 젠더리스 문화의 확산은 급기야 사전을 바꾸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경찰(Policeman)’이란 단어에서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는 ‘Man’을 ‘Office’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나, 자궁(子宮)을 아들 ‘자(子)’ 자 대신 세포 ‘포(胞)’ 자를 써서 포궁(胞宮)이라 부르자는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는 이름만으로는 성 구별이 안 되는 이름 짓기가 유행이다. 이른바 ‘중성적 이름(Post Gender Names)’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다. 신세대 부모들에 의해, 누가 봐도 성을 알 수 있는 기존의 이름 대신 테이텀(Tatum)이나 로리(Rory) 같은 중성적 이름이 선호되고 있다고 한다.
중성적 이름 짓기에 대해 소개한 기사. ⓒnameberry.com
‘#젠더’가 바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사회 문화적 현상을 빠른 호흡으로 반영하는 웹툰에서도 젠더리스는 핫이슈다. 여혐 논란을 불러 일으킨 몇몇 작품들이 별점 폭격을 맞으면서, 한 대학의 만화창작과에서는 ‘젠더 감수성’ 특강을 열기도 했다. 스스로 개방적이며 평등한 시각을 추구한다 자임한다 해도 자신이 젠더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 놀랄 것이다. 그만큼 인류의 성차별 역사는 그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다.
따라서 아예 “성의 경계를 허물자”는 다양한 방식의 시도와 젠더리스 현상은 앞으로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이전과 다르게 만들 것이다. 젠더리스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경계의 담장을 허물어 융합과 조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많은 서류에서 성별을 묻는 항목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젠더리스 문화로 인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떠나고 나면 말이다.
글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