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ESSAY] 코펜하겐에서 길을 잃다.
봄은 봄대로 예쁘고 가을은 가을대로 예쁘다. 저렇게 요란한 빛깔들이 뽐내듯이 출렁이는데도 볼썽사나움이란 걸 찾아볼 수 없으니 단풍을 보는 내내 경외감만 일 뿐이다. 옆에 서 있던 친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말은 눈이 보았던 아름다움을 빼앗지요’ 라는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언어로 덮어쓰기를 하지 않기. 그냥 그대로 보고 느끼기. 그래야 그 아름다움들과 좀 더 친해질 수 있고 그것들을 더 환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비로소 그가 사라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언어는 본질을 규명하는 도구일까 본질을 가리는 도구일까.
코펜하겐이라는 말은 무역이 이루어지는 부두란 뜻이라고 한다.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으로 불린다. 어쨌든 우리 말로 하면 무역항이라는 말인데 그곳에서 무역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름이 그냥 무역항이 되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밤골, 해가 잘 들지 않아 마을이 어둡다 해서 어둔리라고 불리우는 식인데, 그래도 이건 왠지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나라 수도 이름이 무역항이라니. 단순함의 극치다. 거리에서도 이런 식의 상호를 쉽게 볼 수 있다. 꽃집은 그냥 꽃집이고 쵸코렛을 파는 가게는 그냥 쵸코렛이다. 새롭게 만든 항구의 이름은 그냥 새로운 항구(니하운)고, 젠틀멘스 클럽의 이름은 플레져(기쁨)라는 한 글자만 써 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걸까. 생각의 끝까지 가봐서일까. 일주일 남짓, 촬영 때문에 코펜하겐에 머물면서 대체로 단순성이 그 나라 사람들의 고유성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에도 건축에도 생활 속에도 불필요한 장식이 없다. 척박한 땅과 한랭한 기후와 싸워야 하는 환경 때문에 장식하고 꾸미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장식은 인간사로 들어오면 가식이 되고 위선이 된다. 잘난 체하고. 있는 체하고… 그들은 그런 짓에 몸과 마음을 쓰지 않는 습성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정직성과 실용성이 이름다움과 부딪히는 영역에 그들의 디자인이 있다. 북구의 디자인이 각광 받는 이유다. 그들이 만든 몇 몇 의자들과 테이블들이 여전히 머리 속에서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절제미와 정제미로 말을 걸지만 뻐기며 가르치려는 느낌 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하다. 최후의 언어를 만난 느낌이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을 만난 느낌이다.
모든 언어를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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