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개봉했던 영화 <소공녀>를 아시나요? 안정적인 직업도, 자기 몸 하나 누울 집도 없지만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사랑하는 남친이 있어 행복한 주인공 미소의 라이프스타일에 많은 2030세대가 깊이 공감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빈테크’는 요즘 젊은 세대의 이러한 현실을 자양분으로 태어난 트렌드입니다.
티끌모아 티끌, 이제는 저축보다 빈테크
2030세대는 더이상 ‘티끌 모아 태산’을 믿지 않습니다. 모아 봐야 집도 못 사는 저축보다 순간의 행복을 위한 지출이 더 소중할 때도 있죠. 2030세대에게 이러한 ‘소확행’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니까요. 하지만 돈을 쓰는 만큼 생활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허리띠를 졸라매며 예산을 줄이고 절약하는 소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빈테크는 이러한 상황과 만나 빛을 발하게 됩니다.
빈테크의 의미는 ‘貧(가난할 빈)+기술(Technology)’.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거나 비용을 절약해야 하는 사람들이 최신 기술을 활용해 돈을 버는 활동을 말하는 신조어입니다. 빈테크가 어떻게 청년들의 소비문화와 융합하는지는 가까운 일본의 예를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불황을 맞은 일본에서 탄생한 빈테크 서비스
소위 ‘아베노믹스’라는 경기 부양책으로 일본 경기가 호황이라고는 하지만, 2030세대의 구매력은 여전히 낮은 편입니다. 이들이 결국 합리적인 소비를 하려면 중고 물품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지요. 이러한 수요가 빈테크와 결합하면서 온라인 중고 거래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의 패션 의류 중고 거래 플랫폼 '메루카리'(출처: 메루카리 공식 홈페이지)
대표적인 예가 ‘메루카리’(メルカリ)입니다. 물론 일본에도 이미 ‘야후 옥션’ 등 중고 거래 장터 서비스가 있었지만 경매 형식으로 구매 확정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죠. 메루카리는 판매자가 가격을 결정하도록 하는 동시에 전용 앱과 모바일 결제를 도입해 스마트폰에서 원스톱으로 쇼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창업 5년 만인 2017년 한 해 매출 1천 2백억 원에 영업 이익 320억 원을 달성하는 동시에 2016년 7월 미국 앱스토어 무료 앱 순위 3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당장 구매력이 부족한 고객층을 위한 서비스도 생겨났습니다. 일본의 인터넷 의류 판매 기업 ‘조조타운’(ZOZOTOWN)은 1998년 창업해 20년을 훌쩍 넘기며 시가 총액 1조 엔을 넘어선 신화적인 업체입니다. 최근에는 사용자가 입기만 하면 신체 사이즈를 알아서 재주는 ‘조조슈트’를 무료로 배포해 ‘직접 입어볼 수 없다'는 온라인 쇼핑의 한계까지 넘보고 있다고 해요.
▲2개월 외상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며 어느새 일본 유니클로를 넘어선 조조타운(출처: 조조타운 앱 소개 화면)
그런 조조타운이 2017년 3월부터 특이한 서비스를 도입해 이슈가 되었습니다. 바로 ‘외상 결제’ 서비스로, 조조타운에 가입한 회원들은 제품 대금 지불을 최대 2개월까지 미룰 수 있답니다. 제품을 받아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 걱정 없이 편하게 반품할 수 있어 굳이 외상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까지 찾는다고 합니다. ‘이번 달의 나와 다음 달의 내가 힘을 합치면 뭐든지 살 수 있다’는 명언(?)을 가장 잘 증명한 사례가 아닌가 싶네요.
한편, ‘폴카(Polca)’ 앱은 얼핏 보면 평범한 모바일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입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캠프파이어(Campfire)’에서 관리하는 서비스이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 폴카는 빈테크에 최적화된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SNS 친구 기반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폴카'(출처: 폴카 앱 소개 화면)
프로젝트의 설명과 후원 금액, 이미지를 업로드한 후 사람들에게 펀딩을 받는 구조는 폴카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 대상인 일반 크라우드 펀딩과는 달리, 폴카는 펀딩을 오픈한 사람이 지정한 SNS 친구들에게만 내용이 공유되고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펀딩 총액 역시 최소 300엔부터 최대 10만 엔으로 비교적 소소한 수준이며 기간도 30일 이하입니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친구 결혼 선물을 준비하거나 원데이 클래스 등 공동의 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용도로 쓰인다고 합니다.
인터넷 선진국에서 자생한 중고 거래 문화
▲국내 최대의 밴드 악기 동호회 '뮬'의 중고장터(출처: 뮬 커뮤니티)
일본보다 일찌감치 인터넷 환경이 앞서나간 한국은 이미 중고 거래의 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초창기부터 카메라 동호회 ‘SLR클럽’, 악기 동호회 ‘뮬’, IT 기기 커뮤니티 ‘클리앙’ 등 커뮤니티에서 중고 거래가 활발했으며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죠. 특히 2003년 문을 연 네이버 카페 ‘중고나라’는 가입자만 1,7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으며, 거래 품목도 의류와 전자기기 등 생필품에서 자동차와 부동산 등 사람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제품이 거래됩니다.
이제 중고 거래는 모바일로 넘어와 ‘번개장터’ 등 중고 거래 앱이 대세입니다. 단순히 거래를 중개하는 기능을 넘어 사용자들이 안심하고 직거래하도록 가까운 거리의 판매자와 구매자를 매칭하는 ‘당근마켓’, 판매 지역이나 품목별 카테고리 기능을 제공하는 ‘헬로마켓’ 등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돈 되는 '한정판 빈테크 아이템
해외 유명 명품의 가격이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오른다는 점을 이용해 시세차익을 남기는 일명 ‘샤테크’가 몇 년 전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중고 거래 플랫폼은 단순히 원하는 물품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을 넘어,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빈테크 거래 플랫폼’으로 활용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2017년 12월~2018년 11월까지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거래된 것은 방탄소년단 앨범, 레드벨벳 포토 카드, 워너원 응원봉 등의 아이돌 굿즈였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템이 중고로 거래되는 게 2030세대에게 무슨 빈테크가 되겠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돌 굿즈는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수요가 공급을 훨씬 웃돌게 마련이니, 웃돈을 주고라도 중고 제품을 구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정가 33,000원인 ‘방탄소년단’ 응원봉 ‘아미밤’(Army Bomb)은 중고 사이트에서 보통 4~5만 원에 거래되고 있었는데요. 해외 중고 거래 사이트 ‘이베이’에서는 최고 135달러짜리 매물도 있습니다. 정가 4만 원대의 방탄소년단 기념 DVD ‘2014 섬머 패키지’는 최고 19만 원에도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나이키 에어 조던이나 에어포스, 아디다스 이지 부스트 등 다양한 한정판 제품이 품절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중고 거래 플랫폼에 올라오곤 합니다.
짠테크의 진화로 나타난 리퍼의 인기와 상품권/포인트 판매
무심코 나가는 지출을 줄여 소액을 꾸준히 모으는 ‘짠테크’는 빈테크의 영향으로 합리적인 소비와 안 쓰는 재화를 정리해 2차 수입을 만드는 영역까지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리퍼’는 IT 분야에서 주로 쓰이던 용어로, 성능에 문제가 있어 반품된 물건을 이상 없이 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리퍼 제품은 외관과 기능은 똑같지만 새 제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서 빈테크 세대에게 인기가 많은데요. 이제는 ‘올랜드아울렛’처럼 아예 다양한 분야의 리퍼 제품만을 판매하는 오프라인 스토어도 있을 정도입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리퍼’나 ‘반품’을 검색하면 IT 기기뿐만 아니라 가구, 안경, 주방용품, 신발 등 다양한 리퍼 제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기프티콘, 상품권은 물론 남는 모바일 데이터까지 거래되는 ‘니콘내콘’(출처: 니콘내콘 앱 화면)
생일 등 특별한 날이 되면 선물 받은 기프티콘이 스마트폰에 쌓이곤 합니다. 보내준 정성은 고맙지만, 그걸 꼬박꼬박 챙겨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니콘내콘’ 앱에서는 잘 쓰지 않는 기프티콘이나 상품권, 영화 티켓 그리고 남아도는 통신 데이터까지도 판매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는 안 쓰는 아이템을 정리해 현금화하고 구매자는 원하는 기프티콘 등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으니 서로 Win-Win이 아닐까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빈테크는 불황의 그늘에서 탄생한 트렌드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청춘들의 노력과 아이디어가 모여 탄생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힘들 때일수록 함께 힘을 모아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의미이죠. 끝맺음은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조셉 쿠퍼의 대사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