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일'의 반대말?
우리가 세계 최빈국이었던 시절, 일 없이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딱히 할 일이 없다면 하다못해 집 앞 골목길이라도 쓸어야 이웃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누군가가 “놀이를 통해 상상하는 것이 생산력이다”라고 말했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백과사전에도 놀이가 ‘일과 대립하는 개념을 가진 활동’으로 정의돼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제 놀이가 생산적 에너지의 원천이자 상상력을 자극하는 행위임을 인정하는 세상이 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놀이는 모든 문화의 원형이다. ‘사라짐’은 놀이의 가장 원초적 형태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향유되고 있다. 이를테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숨바꼭질’ 등이 그러하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아이들은 술래가 돌아보기 전까지 자세나 위치를 바꾸고, 술래가 돌아보는 찰나 움직임을 멈춘다. 놀이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술래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영민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생각의 나래를 펼친다.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도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오래 숨어 있을지에 대해 나름대로 창의력을 발휘한다.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매번 보는 이들을 흥분시키는 마술은 사라짐 놀이의 최상급이라 할 수 있다. 마술이 시시하지 않으려면 크리에이티브가 발현돼야 함은 당연하다.
호모 루덴스의 시대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가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의 속성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한 것은 1938년의 일이다. 그는 놀이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그간의 통념을 뒤집고, 문화적 창조력의 근원임을 주장했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 가까이 돼서야 인류는 스스로가 놀이를 통해 성장해 왔음을 자인했다. 놀이는 재미와 동의어인 동시에 심리학적으로는 창의력과 동의어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삶에서 재미를 잘 찾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창의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가 2024년까지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적어도 그가 상상력을 발휘하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적 성취는 수학과 물리학을 놀이처럼 즐긴 몇몇 괴짜들 덕분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인이 놀이에 특화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셋만 모이면 화투판을 까는 우리는 자고로 잘 ‘놀아 왔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조흥윤 교수는 그런 우리 민족을 두고 “호모 루덴스의 전형”이라면서 한국인의 놀이 문화가 ‘일 속의 놀이’, ‘여가 속의 놀이’, ‘신앙 속의 놀이’라는 세 가지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고 파악했다.
감자를 캐다가 부르던 노동요, 약장수와 사물놀이패, 각종 민속놀이, 샤머니즘까지가 한국인의 유전적 형질에 포함된 놀이의 흔적이라는 얘기다. 그런 주장에 동의한다면, BTS를 위시한 K-Pop이나 대중예술 분야의 한류 열풍도 그런 DNA 덕분일 것이다. 확실히 “노세 노세 젊어 노세”를 외쳤던 조상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산업혁명 이후 신성한 노동을 해치는 빌런 취급을 받던 놀이는 이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주목받을 것이다. 그런데 광고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유희(遊戱)의 시대가 반갑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광고라야 눈길을 보내고, 즐겁지 않으면 발길을 돌리는 소비자들…. 게다가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와 즐거움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자신’을 지표로 삼아 놀이 같은 소비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을 어떻게 하면 만족시킬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지만,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마케터들도 상상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일단 잘 놀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