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이 지갑을 열 때
글 강보라 / 라이프스타일&컬처 칼럼니스트, 프리랜스 기자. 14년간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로 일했다.
가족의 미래를 염려하며 현금을 묶어 둘 필요가 없는 ‘리치 싱글’들의 눈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2020년을 살아가는 마케터들의 공통된 숙제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30대 중반 싱글녀 A는 지난 2018년 일본 도쿄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가 한 작가의 작품에 홀딱 반했다. 입구 쪽 작은 전시실 하얀 벽에 설계도면을 닮은 도화지 크기의 흑백 작품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한 발짝 다가가 보니 풍경화 같았고, 한 발짝 더 다가가 보니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음표의 집합처럼 보였다. 그림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작품 태그를 확인하니 1985년생. 작가인 분야 유카리는 A와 동갑내기였다.
출처: 유카리 분야 홈페이지 yukaribunya.com
A는 아이폰 사파리를 열어 분야 유카리를 찾았다. ‘아트시(Astsy)’라는 미술품 거래 사이트에서 해당 작가의 작품을 발견했다. 지금은 매물이 올라와 있지 않지만 불과 몇 년 전, 어느 개인이 그리 높지 않은 금액에 유카리의 작품을 산 흔적이 있었다. 거래 이력을 검색해보니 그 시기를 기점으로 작품 가격이 크게 올라있었다. A가 미술 작품 컬렉팅에 관심을 두게 된 순간이다.
요새 A가 사들이는 작품은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이름 있는 작가들의 리토그래프(석판 인쇄). A는 “한정판으로 프린트되고 유명 작가의 서명이 날인된 판화는 가격이 오르지는 않을지언정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라며 “예를 들어 2,500달러에 사서 5년 후 2,000달러에 판다고 해도, 500달러를 내고 5년 동안 감상한 셈이니 손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아트시 홈페이지 www.artsy.net의 유카리 분야 갤러리
출처: 아트시 홈페이지 www.artsy.net의 후안 미로 갤러리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사이 개인의 의식주가 안정되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족을 꾸리기로 선택한 이들은 좀 더 큰 집을 사고 자녀의 교육 자금을 목적으로 자산관리를 시작한다. 월급 주머니가 두둑해져도 개인의 여유는 오히려 줄어든다.
가족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은 다르다. 월급은 늘어나는데 의식주를 키우거나 교육 자금이 필요한 아이도 없다. 한마디로 여윳돈이 생기기 시작한다. 특히 지난 30년 사이 비혼 여성 비율은 10배 이상 늘었다.* 동일 연령 및 계층 대비 스스로를 위한 소비에 높은 구매력을 지닌 이들의 관심사와 선택지에 시장의 촉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A는 “나의 경우는 작품 매매에 중점을 두지만, 렌탈 개념으로 즐기는 사람도 있다”라며 “내 친구들은 ‘핀즐’이나 ‘오픈갤러리’ 같은 작품 렌탈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 통계개발원 계간지 ‘KOSTAT 통계플러스 2020년 봄호’에 실린 우해봉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1974년생 여성 중 만 40세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비율은 12.1%, 1964년생이 40세까지 비혼으로 남은 비중은 4.2%, 1944년생의 경우 1.2%로 집계됐다(통계청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20% 표본자료 분석 결과).
30대 후반의 프리랜스 마케터 B에게는 그 대상이 가구다. 20대 때 ‘미스터포터(온라인 남성 편집숍)’를 들락거리며 명품 브랜드 옷을 사는 게 취미였던 싱글남 B가 요즘은 미국과 북유럽 각지의 미드센트리 시대 가구를 취급하는 ‘원오디너리맨션’ ‘컬렉트’ 등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수시로 드나들며 새로 들어온 가구를 확인한다. 핀율의 제자인 아르네 보더의 접이식 데스크, 카이 크리스티안센의 캐비닛이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구찌와 발렌시아가에서 핀율과 루이스 폴센으로 취향이 옮겨간 것이다.
B의 소비 방식 역시 A와 닮은 구석이 있다. B는 “빈티지 가구도 예술 작품과 비슷하다. 500만 원을 주고 산 데스크는 잘만 관리하면 10년이 흘러도 500만 원 이상 받고 되팔 수 있다. 같은 금액이면 그 기간 동안 ‘전세’로 사용하는 셈이고 더 비싸지면 사용하고도 ‘투자 수익’을 남기는 셈”이라 말했다.
출처: 원오디너리맨션 인스타그램
몸에 대한 투자는 새롭지도 않다. 올해로 40대에 접어든 싱글남 C가 문득 자신의 몸이 가진 기계적 특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건 지난 1월 자신이 다니는 증권회사 화장실에서였다. 20대 때는 아메리칸 스탠다드 도기를 깨부술 듯 ‘쏴’ 하고 우렁찼던 방뇨 소리가 언젠가부터 ‘졸졸졸’로 바뀌어 있는 걸 깨달았다. 비뇨기과에서 받은 진단은 노화에 따른 전립선 비대증. 처방을 받아 다시 젊음의 소리를 되찾긴 했지만 그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에 덜컥 사로잡혔다. 사람 몸도 결국 기계이고 기계는 어쩔 수 없이 낡아간다는 진리의 현타가 온 것이다.
의사는 “일단 성인병 진단을 받으면 못하는 게 많아진다”며 “못하는 몸이 되기 전에 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대처”라고 말했다. C는 내일 즐길 한우 갈비살에 소주 한잔을 위해 오늘은 건강한 식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닥터키친’에 가입했다. 그가 주문한 품목은 다음과 같다. 콩가루로 만든 짜장면, 곤약면을 찍어 먹는 분짜, 귀리 곤약, 서리태 곤약, 현미 곤약 밥. 타 업체의 반조리 식품에 비해 1.5배 정도 비싸지만 “내 가장 큰 자산인 몸에 투자한다”며 기꺼이 지불한다. 닥터키친은 싱글족을 노린 반조리 식품에 유기농, 글루텐프리, 저지방 등의 건강식 개념을 더한 밀키트 배달 서비스다. 특히 식단 조절이 필수인 당뇨환자들을 위한 식단이 잘 갖춰져 있다. 병원에서 만든 마켓컬리인 셈이다. 최근에는 닥터키친과 유사한 서비스인 ‘그리팅’도 출시됐다. 당질 제한 식단, 저칼로리 다이어트 식단 등을 한 끼에 약 8,000원 대로 정기구독할 수 있다.
남성 라이프스타일&패션지 피처 디렉터인 싱글남 D는 “리치 싱글이라고 가성비도 따지지 않고 아무 데나 돈을 쓰는 사람은 없다”며 “결국 리치 싱글의 소비를 이끌어내려면 합리적 유인책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때 가장 유혹적인 게 바로 ‘투자’ 개념”이라고 말했다. 앞서 말한 부유한 싱글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없이도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