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섭_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애초에 레트로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서 시작되는 욕망이다. 처음 레트로 트렌드는 중년이 된 기성세대가 자신이 겪은 과거와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는 복고였다. 그런데 MZ 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가 주도한 뉴트로는 자신들의 과거가 아닌 기성세대의 과거에 반응한다. 추억 때문이 아니라 낯설고 새롭고 신기해서다. 분명 레트로는 레트로인데 기성세대와 MZ 세대는 달랐다.
기성세대의 레트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겪은 것을 추억하며 다시 즐긴다’가 된다면, MZ세대의 레트로는 ‘겪지도 않은 걸 마치 겪은 듯이 즐긴다’가 된다. 이들의 차이가 느껴지는가? MZ 세대에게 레트로는 하나의 놀이다. 마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처럼 그때 그 문화, 그 물건, 그 음악, 그 행동을 즐기며 서로 즐거워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역할 놀이하듯 과거 시점에 몰입한다. MZ 세대가 누리는 레트로 코드 중 하나가 바로 Y2K 다.
MZ 세대의 Y2K 감성과 프레피룩
최근 재결합 소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90년대 뉴요커들의 상징인 시트콤 프렌즈 (출처: 프렌즈)
Y2K는 2000년을 의미한다. 20세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21세기가 된다는 건 아주 강력한 변화다. 기성세대는 Y2K에 대한 기억이 선명할 것이다. 세기말의 암울함도, 2000년대 초반의 희망찬 분위기도, IMF 구제금융도, 닷컴 버블도 2002 월드컵도 다 기억한다. 열광과 탄식이 교차하며 뜨거웠던 시기다. MZ 세대는 이때 태어났다. 분명 Y2K 세대지만, 그들이 그때 태어나긴 했어도 그 시대를 추억하진 못한다.
하이틴 룩의 정석을 보여준 영화 클루리스 (출처: 클루리스)
지금 MZ 세대가 꽂힌 Y2K는 X세대가 알고 있고 기억하는 Y2K와는 다르다. 그 시기 한국이 아닌 미국의 하이틴 문화를 얘기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겪은 것도, 내가 겪은 것도 아닌, 자신들이 태어나던 시기 미국의 1020 세대가 열광했던 문화에 주목한 것이다. 1995년에 나온 하이틴 영화 <클루리스>는 베벌리힐스의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부유층 자녀들의 이야기다.
(출처: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y2k #하이틴룩)
부유층 청소년이다 보니 패션이나 소비, 라이프스타일에서 시선과 흥미를 끄는 것이 많았고 그것이 고스란히 당시 십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 사립 고등학교에서 입는 교복이나 패션 스타일을 뜻하는 프레피룩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화려하고 경쾌하고 발랄한 컬러에 세련된 캐주얼 재킷, 그리고 주름진 플리츠스커트나 테니스 스커트 등이 대표적인데, 놀랍게도 요즘 한국의 1020 세대가 프레피룩 스타일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땐 어려서 미처 못 누렸지만, 지금이라도 누려보겠다는 욕망이 MZ 세대의 Y2K 감성이자, 그들 방식의 레트로다. 이들로선 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시대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 시기의 음악, 그 시기의 패션, 그 시기의 영화, 그 시기의 히트 상품, 그 시기의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에 반응할 조건이 충분해졌다.
컴백홈으로 MZ 세대까지 건드린 비스포크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컴백홈을 CM송으로 쓴 삼성전자 비스포크 광고
삼성전자가 냉장고로 시작한 비스포크를 전체 가전 라인으로 확장하는 ‘비스포크 홈’의 광고에 사용된 음악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5년에 발표한 <COME BACK HOME>이다. 광고용으로 만든 COME BESPOKE HOME 영상은 유튜브에서 3주 만에 1,000만을 넘더니, 2개월 만에 조회수 2,250만 회를 넘었다. 비스포크 홈의 주요 타깃 고객 중 하나인 X세대에겐 그들이 20대 때 열광했던 서태지와 자신들의 그 시절 추억을 자극했고, MZ 세대에게도 힙한 감성을 자극했다.
MZ 세대는 추억 속에선 서태지의 컴백홈이 없지만, Y2K 감성을 자극하는 시기의 노래다. 지금 들어도 전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힙하고 세련되고 흥겹다. 혼수 가전이란 측면으로 보면 밀레니얼 세대가 주된 타깃이고, 구매력으로 보면 X세대도 공략해야 하고, 차세대 혼수 시장의 중심세력이자 미래 소비 세력이란 측면에서 Z 세대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광고 음악 선곡은 신의 한 수였다. 다양한 세대 모두가 끌리는 바로 그 시기, 그때의 문화와 스타일을 통해서 각자의 레트로 욕망을 더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트로풍 광고로 크게 눈길을 끈 삼성증권 ISA 캠페인
모두가 레트로 코드를 성공적으로 구사하는 건 아니다. 뉴트로, 영트로가 트렌드가 된 이후로 수년째 레트로 마케팅이 난무했다. 타깃에 대한 이해, 레트로 전략도 없이 무조건 과거 추억만 덧칠하며 무슨 만능키처럼 레트로를 써먹었고, 실패도 많았다. 뻔한 레트로에는 반응하지 않는 데다, 즐겁거나 새롭거나 뭐 하나는 제대로 충족시켜야만 시선이 간다. 특히 Z 세대는 더 까다롭다. 재미없는데도 쉽게 반응해 주지 않는다.
왜 MZ 세대는 겪어보지 않은 과거를 소비하는가?
현실이 재미없어서다.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 때문에 좌절하고, 큰돈 벌어보겠다며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하고, 영끌까지 해보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다. 대입을 위해 공부하는 10대부터 취업을 위해 공부하는 20대까지, 자신들의 미래가 답답하고 암울해 보인다.
이렇게 현실이 팍팍하고 재미없는 이들에겐,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것 같은 과거가 하나의 도피처도 되고, 마음껏 누리면서 즐거워할 판타지도 된다. 이들이 열광하는 레트로 코드는 밝고, 귀엽고, 즐거운 것뿐이다. 추억은 더 미화되고 과장되게 마련인데, 소비 코드로서의 레트로는 더더욱 그렇다. 세련되지 않아도, 조금 키치하고 적당히 촌스러워도 좋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초보적이고, 단순한 기술과 기능인 물건에도 관대하다. 현실의 나는 재미없고 팍팍하지만, 그래도 과거보단 현재가 더 진화한 시대니까 내가 가질 심리적 우위나 위안이 있다. 어쩌면 우린 과거를 즐기며 현재의 힘겨움을 넘기려고 하는 건지도.
기성세대가 중년이 돼서 과거를 추억하며 복고를 얘기했던 것은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시간도 좀 생겨서였는데, MZ 세대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과거’에서 욕망을 다스린다. 뉴트로, 영트로 트렌드의 등장, MZ 세대의 과거 소비를 문화적 스펙트럼의 확장이라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들의 현실이 즐겁지 않아서 만들어진 트렌드라는 점도 마케팅 업계는 더 생각해봐야 한다.
김용섭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자 트렌드 분석가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LG 등 대기업과 정부기관에서 2,500 회 이상의 강연/워크숍을, 200여 건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저서로 『결국 Z세대가 세상을 지배한다』, 『프로페셔널 스튜던트』, 『라이프 트렌드 2021 : Fight or Flight』, 『언컨택트』, 『라이프 트렌드 2020 : 느슨한 연대』, 『요즘 애들, 요즘 어른들』, 『라이프 트렌드 2019 : 젠더뉴트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