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하_대중음악평론가 &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누군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아무거나 세계관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일리 있는 이야기다. 말이 좋아 세계관이지, ‘특정한 지식이나 관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아이돌 세계관 홍수 속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크게는 그룹부터 작게는 노래 하나까지, 세세한 설정을 기반으로 한 세계관은 그룹 탄생 설화, 멤버 캐릭터별 특성, 앨범에 영감을 준 문학과 영화 등 다양한 문화예술작품까지 손을 뻗친다. 단언컨대,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가운데 세계관 하나쯤 가져보지 않은 그룹은 없다.
세계관 범람의 시작, 엑소플래닛
엑소플래닛’이라는 세계관을 가진 그룹 ‘엑소’ (출처: SM엔터테인먼트)
세계관 범람의 문을 본격적으로 연 그룹은 엑소다. 가요계에 12년 만의 밀리언셀러를 선물하며 2010년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이 된 이들의 시작은 다름 아닌 미지의 행성 ‘엑소플래닛’이었다. 그룹명부터 가상의 세계관에서 따온 이들은 ‘엑소학’이라는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복잡한 그룹 단위 세계관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들의 탄생 근원이 된 성물 ‘생명의 나무’를 둘러싼 스토리는 물론, 멤버마다 부여된 빛, 불, 바람, 물, 힘, 치유 등의 특수한 능력은 안무나 노래 가사,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각종 결과물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당시만 해도 농담처럼 받아들여지던 세계관은 이제 아이돌 그룹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일종의 관문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 무대로 걸음을 옮긴 케이팝을 이해하는 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향유자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구성된 세계관은 그 자체로 해당 그룹의 강력한 무기다. 콘텐츠에 숨겨진 촘촘한 그물망 같은 세계관은 눈에 띄는 외모나 노래, 퍼포먼스로 평범하게 시작된 대중의 관심을 옭아매 오랫동안 한자리에 머무르게 강제하는 더없이 훌륭한 ’떡밥’이 되었다.
메타버스 그 이전의 세계
‘루나버스’라는 세계관을 펼치는 ‘이달의 소녀’ (출처: 이달의 소녀 공식 계정)
‘메타버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전 이미 거대한 ‘루나버스(LOOΠΔVERSE)’를 구축한 이달의 소녀나 ‘현실 세계’에서 활동하는 멤버 4인과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의 아바타 4인을 합한 8인조 그룹이라는 초월적 SF 세계관으로 화제를 모은 에스파는 엑소에서 시작된 케이팝 세계관의 명맥을 잇는 대표적인 이름이다. 한편 방탄소년단의 청춘 2부작, 여자친구의 학교 3부작이 거둔 성공으로 한때 붐을 이뤘던 시리즈물 형태의 세계관은, 긴 호흡의 서사가 주는 재미는 그대로 취하면서도 활동 콘셉트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세계관을 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는 유연함으로 주목받았다.
이쯤에서 대체 아이돌에게 왜 이렇게까지 복잡한 세계관이 필요하냐는 의문이 등장할 만하다. 사실 그렇다. 음악과 퍼포먼스의 유려한 조화로 이미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 취급을 받는 케이팝 아이돌은 그 자체로 충분히 화려하다. 그러나 산업이 무르익으며 상향 평준화된 실력과 수요보다 공급이 늘 넘칠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은 이들에게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관’은 산업 내부자들이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일종의 돌파구다.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에, 다른 이에게 없는 ‘나’만의 특별함은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케이팝 유목민들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는 미끼였다. 심지어 효과도 좋았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른 어떤 영역의 소비자보다 콘텐츠에 숨은 함의를 찾아내는 촉이 발달한 케이팝 팬들은 때마다 하나를 주면 열을 이해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발휘했다. 열 개의 같은 정답을 찾은 이들 사이에 형성된 끈끈한 유대감의 힘은, 아마 아이돌에 세계관을 처음 도입했던 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멤버로 이루어진 그룹 ‘에스파’ (출처: SM엔터테인먼트)
이제는 당연해진 세계관이, 시간이 흐르며 각종 팬 플랫폼으로 수렴하고 있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팬 플랫폼은 ‘우리’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 속에서 아이돌과 팬 사이의 라포르(Rapport,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를 멀리 흩어지지 않도록 한곳에 단단하게 묶어내는 더없이 효과적인 울타리다. 그동안 SNS며 팬 커뮤니티 등으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세계는 이제 우리만 소통할 수 있는 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깝고 안전하게 존재한다. 느낄 수만 있던 가상의 세계가 만질 수 있는 현실의 세계가 되어버린 셈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이 모든 세계가 사람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놀랍도록 강한 애정과 신뢰로 묶여 있기에 종종 간과하지만,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때로는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연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멋진 음악과 퍼포먼스를 선보여도, 아무리 기가 막힌 세계관을 들이밀어도 서로의 신뢰가 무너지는 작은 신호가 울리는 순간,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세계는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높은 설득력을 지닌 세계관 형성은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부터 출발해야 옳다. ‘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우리’가 되었다. 말장난이 아닌 진짜 아이돌 세계관의 시작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하며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에 기고/출연하고 있다. EBS <스페이스 공감>과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으로 일했으며 현재 TBS FM 음악전문방송 <함춘호의 포크송>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대중음악 라이너노트>가 있다. 한마디로 “음악 좋아하고요, 시키는 일 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