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초로 점을 본 나이는 네 살 정도로 추측한다.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나, 어머니가 옛날이야기처럼 후에 여러 번 들려주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잠깐 아버지 친구의 공장 한편에 딸린 작은 숙소에서 살았다. 거기서 어머니는 그 공장 직원들에게 밥을 해주면서, 아버지는 그 공장의 공장장으로 노동하며 돈을 벌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공장에는 연초마다 그 해 공장의 운을 미리 알려주는 여자 스님이 계셨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맞은 첫 새해, 어린 나를 안은 채 그 연례행사를 멀찍이서 구경했다. 그때 스님은 어머니를 스쳐 지나가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딸이 커서 장미꽃이 되겠구나.”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자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틈만 나면 엄마를 통해 듣고 또 들었다. 우리들의 대화가 어쩌다 그 시절로 아주 살짝 기울기만 해도 내가 바로 운을 뗐다. “그때 어떤 스님이 내 운도 봐주셨댔지?” 그럼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응, 우리 수진이가 커서 장미꽃 같은 사람이 될 텐데, 그런데 대신에 가시가 많을 거라고 그랬지. 아기 때 수진이가 너무 못생겨서 내심 엄마도 아빠도 상심하고 있었는데 커서 장미꽃이 된다니까 가시고 뭐고 그냥 좋았지 뭐.”
스님이 대단한 현안으로 내 미래를 봐주셨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리고 내가 정말 장미꽃 같은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확신은 없지만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두 문장이 나와 우리 부모님의 삶 속에서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면 문득 그 스님께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특히 그 두 문장을 꽤나 독실하게 믿었던 나의 순진하고 오래된 믿음(장미 파트보다도 가시가 많다는 부분에 특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내 현실에 언제나 드리워져 있었던 희망이라는 양달 한편. 그건 얼굴도 모르는 스님이 내게 주신 너무 좋은 선물이었다.
부모님은 그때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그다지 사주를 보신 적이 없다. 한편 나는 종종 이런저런 점을 보곤 했다. 친구와 사주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사주를 보기도 했고(그 역술가는 아직 십 대이던 나에게 이혼 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 학원 선생님에게 관상을 보기도 하고(그는 내 이마를 보고 남편에게 잔소리를 안 할 타입이라고 했다.), 동료 뮤지션에게 손금을 보기도 했으며(그는 나에게 일찍 죽을 운명인데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냐고 물었다.), 국내 최고의 타로마스터 친구와 술을 마시며 그가 알려주는 나의 성향을 술에 취해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썼다(결국 이 말만 기억에 남았는데, 그는 내가 겉으로 티를 내진 않지만 늘 속으로 은밀히 사람들을 다 내려다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중 가장 여러 번 본 것은 역시 사주이다. 갑자기 너무나도 궁금한 것이 있어 내 돈을 내고 본적도 있고, 아는 사람이 선물로 예약을 잡아준 적도 있고, 내 생시를 아는 누군가 대신 봐준 적도 있다. 동일한 사주팔자이므로 출발은 비슷한 느낌이지만 곧 해석은 재미있게 갈리곤 했다. 한 역술가는 나에게 역마살, 도화살이 있어 사람들에게 언제나 인기를 끈다고 말했지만 또 다른 역술가는 내가 타인에게 매력적인 어필을 평생 하지 못할 목석같은 팔자라고 했다. ‘수’가 하나도 없는 나의 오행을 두고 물을 보고 살고 좋은 물을 많이 먹으라고 풀이한 역술가가 있었고 ‘수’가 많은 사람을 곁에 두라고 조언하는 역술가도 있었다.
사주를 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다 보니 나에게도 일종의 ‘짬밥’이라는 것이 생긴 것인지 사주를 볼 때마다 오히려 나보다도 역술가에게 대해 쓸데없이 알아가고 있다는 기분에 빠진 적도 많았다. 이를테면 어떤 역술가는 먹는 일에 대한 조언에 특히 정성을 들인다. “매운 음식을 지양하고 아침마다 참기름을 한 스푼씩 먹으면 좋으며 다시마, 김, 미역국 그리고 메밀을 자주 먹고….”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분은 먹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 자기 자신의 운명도 먹는 일로 닦아나가겠구나.’ 그런가 하면 어떤 역술가는 모든 해석의 근거가 돈과 남자로 이루어진다. 그가 알려주는 나의 좋은 시기, 나쁜 시기는 다시 말해 그저 남자가 꼬이고 안 꼬이고, 혹은 돈이 벌리고 안 벌리는 시기였다. “자네가 이렇게 해야 남자들이 좋아해. 자네가 이렇게 해야 돈이 모여.” 이런 말을 들으며 나는 그 역술가의 삶의 축이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주를 보고 나올 때마다 ‘으 별거 없잖아. 정말 이제 여기까지야.’하고 다짐하곤 하지만 그러다가도 누군가 “이 사람이 용하대! 누가 정말 잘 맞춘대!”라고 하면 고새를 못 참고 “거기가 어디야?” 하고 목을 길게 빼는 것을 보면 나는 대체 나의 무엇을 알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포기를 모르는가 싶다. 어쩌면 나는 그저 선물을 받고 싶은 것일까? 스님에게 받았던 것 같은 그런 오래가는 선물을 나는 내내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주던, 순식간에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던 두 문장 같은 것을.
며칠 전 고양이 모래를 검색하다 어떤 리뷰를 읽었다. 자신 역시 여느 집사들처럼 완벽한 모래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지만 정말이지 그 ‘완벽한 모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응고력, 먼지 날림 없음, 탈취력, 사막화, 가격. 그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만족시킨 것은 없었다고. 자신은 좀 지쳤으며 그래서 그냥 여기 이 제품에 정착하겠다고. 완벽하진 않지만 그냥저냥 이 정도로 만족하겠다고.
나는 이 체념적인 설득에 마음이 움직여 같은 모래를 주문했다. 고양이 모래를 주문하면서 겸하기엔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내 운명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태 봐온 사주 풀이의 공통적인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굉장한 말년 운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말년 운이 정말 좋다고. 말년의 좋은 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말년에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다시마, 김, 미역, 메밀, 참기름을 매일매일 선물 받는다는 말일까? 아니면 말년에 멋진 남자들이 동시에 우르르 나에게 고백한다는 말일까? 말년에 길에서 주운 로또가 1등에 당첨된다는 말일까? 아무튼 말년까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