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에서 음악을 해석하고 재창조해낼 수 있는 예술적 감각, 다양한 구성원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 무대 위에서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등 수많은 덕목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그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휘자는 실상 혼자서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예술적 지향을 이해하고, 그 의도대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온전히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끌었던 지휘자 정명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케스트라에는 지휘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리마다 좋은 연주자를 찾는 것, 그것이 첫 번째예요.”
정명훈 같은 세계적인 거장도 결국은 좋은 연주자를 찾는 것이 오케스트라 조각의 처음과 끝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인재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입한 연주자에겐 (금전적인 것을 포함한)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을 심어주었고, 연주자들은 지휘자를 믿고 따르며 연주력 향상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시향의 재정적, 예술적 성과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지금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도 인정받는 악단으로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인재 존중의 리더십으로 이룬 대표적 성과입니다.
이처럼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인재가 조직과 현업 무대에서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조력한 지휘자가 또 한 명 있습니다. 그는 모두의 존경을 받는 덕망 높은 지휘자라기보다는 독자재에 가까운 절대권력을 휘두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안티 팬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재를 존중하고 등용하는 일만큼은 모두가 그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바로 35년간 세계 최고의 악단인 베를린 필히모닉을 지배한 독재자이자, 클래식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 ~1989) 입니다.
전 세계 클래식 계를 장악한 황제
어렸을 적 제가 다녔던 피아노 학원엔 멋진 지휘자 사진 액자가 여기저기 걸려있었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 지휘자가 누구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까지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의 이미지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풍성한 백금발에 중후한 멋을 풍기는 외모,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봉을 단단히 손에 쥔 모습.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일명 클래식 계의 ‘황제’라 불리는 카라얀이라는 지휘자였고, 20세기 음악계의 전설이자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로, 대중들과 비평가들에게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하는 모습은 카라얀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고, 오늘날 대중들에게 알려진 멋진 지휘자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지휘자 카라얀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20세기를 통틀어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던 지휘자이자 수많은 녹음, 녹화를 통해 클래식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에, 획일화되고 진부한 음악 해석 능력 특히, 매스 미디어 자본과 영합해 현장에서 듣는 음악의 가치를 위축시키고, 음반 취입 등 상업적 활동에만 치중했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이처럼 호불호가 갈리고 이런저런 평가가 엇갈리는 카라얀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의 오만하고 권위적인 태도에 대해 호감을 갖는 이는 별로 없다는 것. 지휘자이자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의 프로듀서로 수많은 카라얀의 녹음 작업을 책임졌던 오토 게르데스(Otto Gerdes)는 단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카라얀을 ‘친구(Freund)’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카라얀으로부터 축출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권위에 대한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사람이지요.
하지만 이런 카라얀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으니 바로 그것은 인재에 대한 갈망과 존중이었습니다. 자신이 최고의 지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언제나 그는 최고의 연주자에게 목말라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연주자를 발견했을 땐 그 사람의 인종, 성별, 나이 따위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혹여 그것이 장애물이 될 것 같으면 자신의 막강한 권력으로 그 모든 장벽을 없애 주었습니다. 카라얀이 등용하고 키운 인재들의 면모 ─ 카라얀 못지않은 전설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 를 살펴보면 카라얀에 대한 수많은 비판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공(功)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인물 몇몇을 살펴볼까요.
흑인 최초의 프리마 돈나, 레온타인 프라이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흑인 최초로 메이저 오페라 극장 무대에 프라마 돈나(prima donna, 여성 주역)로 섰던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Leontyne Price)입니다.입니다. 지금은 흑인 성악가를 오페라 무대에서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프라이스가 막 성악계에 데뷔한 1950년대만 하더라도 흑인이 재즈 바나 소극장 무대가 아닌 오페라 무대에 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이나 공연을 거절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암울했던 시절이니, 콧대 높은 백인 상류 문화인 오페라 계에 흑인이, 그것도 주역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은 당시로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그녀를 내려주신 신께 감사드린다.”라고 극찬했던 1세대 흑인 성악가 매리언 앤더슨(Marian Anderson) 조차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서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고, 그마저도 작은 단역에 불과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성악가들은 오죽했을까요. 게다가 프라이스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교회 성가대에서 어깨너머로 성악을 배웠고 실력 하나로 명문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뉴욕이나 유럽 메이저 오페라 극장 무대에 주역으로 선다는 건 요원해 보였습니다.
프라이스와 카라얀이 남긴 명반 중 하나인 <A Christmas Offering> 중 ‘O Holy Night’, ‘Ave Maria’ 연주.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크리스마스 음악 앨범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카라얀이 직접 참석한 카네기홀 오디션에서 그의 눈에 띈 것입니다. 콘서트 홀 전체를 압도하는 엄청난 성량과 풍부한 감정표현으로 카라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지요. 피부색 때문에 메이저 극장 무대 밖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던 프라이스는 이때부터 카라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극장 문을 열어 젖히기 시작합니다. 1958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시즌 개막 무대는 그 역사의 첫출발이었습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의 주역 ‘미니’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이죠. 이는 매리언 앤더슨이 흑인 성악가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선 이후 무려 24년 만의 일로, 조역이 아닌 프리마 돈나로 무대에 선 것은 그녀가 최초입니다.
이후에도 카라얀은 그녀를 위해 굳게 닫혔던 극장의 문을 열어주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자신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빈 국립가극장(Wiener Staatsoper) 무대에 프라이스를 데뷔시켰고, 1960년에는 콧대 높기로 유명한 오페라의 본산,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 무대에도 함께 섰습니다. 카라얀 덕분에 프라이스는 그야말로 날개를 단 것이지요. 1961년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에서 레오노레 역을 눈부시게 소화해 무려 42분(!) 간의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프라이스는 그레미 상 노미네이트만 무려 18회에 이를 정도로 슈퍼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그녀의 실력 앞에 피부색이 장애물이 되지 않았던 것은 카라얀 덕분이었습니다.
베를린 필 금녀의 벽을 허문 자비네 마이어
유럽에서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악단의 단원 구성을 살펴보면 남성 단원의 비율이 유독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아시아권 오케스트라에 여성의 비율이 높고, 몇몇 오케스트라에는 여성 악장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는 유럽의 명문 악단이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이 반세기도 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럽 최고의 악단 중 하나로 불리는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rmoniker) 오케스트라의 경우 아직도 여성 단원을 기피하는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170년이 넘는 악단 역사를 통틀어도 여성이 정단원으로 활약한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카라얀이 활약하던 시절, 베를린 필하모닉(Berliner Philhamoniker)도 금녀(禁女)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금기를 최초로 깬 여성이 있습니다. 카라얀에 의해 발탁되어 지금은 세계 최고의 클라리네티스트로 활약 중인 자비네 마이어(Savine Meyer)입니다.
1982년의 일이었습니다. 베를린 필 단원 채용일 위해 장막 뒤에서 익명으로 진행된 오디션에서 마이어는 당당히 카라얀의 간택을 받게 됩니다. 당시 나이가 23세에 불과한 어린 연주자였지만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데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카라얀의 귀를 만족시켰으니 그녀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앞길에 펼쳐진 것은 오히려 가시밭길에 가까웠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너무 젊은 데다 ‘여성’이기 때문에 베를린 필의 전통에 어긋난다는 기존 단원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오케스트라 내부에서 큰 분란을 일으켰고, 결국 그녀를 정단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베를린 필 전통에 따라 민주적(?) 방식의 단원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결과는 73대 4. 반대가 73이었습니다. 단원들은 그녀가 너무 어려 경험이 부족한 데다 음색이 너무 튀어 단원으로 받아들이기에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내놨습니다만, 누가 봐도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카라얀은 자신이 직접 선발한 인재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단원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카라얀은 마이어의 입단을 독단적으로 강행해 버립니다.
카라얀이 자신의 분신이었던 베를린필과 갈등을 겪으면서까지 발탁하려 했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카라얀의 결정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카라얀도 이 금기를 깨는 것만큼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감히 여성을 정단원으로 들이려는 일방적인 결정에 단원들이 집단으로 반발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의 심각해지지요. 결국 만년의 카라얀은 자신이 고향처럼 생각해 온 베를린에서 멀어지고, 마이어도 정단원 입단 9개월 만에 스스로 베를린 필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 때문에 수 십 년 동안 이어온 베를린 필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이어가 제 발로 베를린을 떠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카라얀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베를린 필 단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성 차별 때문에 좋은 인재를 놓쳐버린 것이 카라얀에게는 죽는 순간까지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신이 내린 목소리 조수미의 든든한 후원자
카라얀의 인재 욕심은 미국이나 유럽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변방에 불과했던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이라는 국적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성악가로 인정받고 있는 조수미 역시 카라얀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날개를 단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카라얀은 생전,
“조수미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 이는 인류의 자산이라 할 만하다.”
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조수미는 지금은 흔한 조기유학 케이스가 아니라 오로지 한국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서울대 성악과에 진학, 재학 중 이탈리아로 넘어가 유학생활을 시작한 국내파 성악가였기에 그녀는 변방 중의 변방, 이름도 모를 작은 나라에서 온 유학생에 불과 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이런 경우, 어지간히 뛰어난 실력이 있더라도 음악계 주류에 편입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수미의 경우 천부적인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이 합해져, 이른 나이에 이미 수많은 성악 콩쿠르를 휩쓸었지만 오로지 그녀의 힘만으로 현재 위치에 오르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란 것이 중론입니다.
조수미와 카라얀의 만남을 담은 귀중한 비디오. 카라얀은 시종 조수미의 재능을 감탄조로 칭찬한다. 참고로 조수미 옆에 앉아 함께 오디션을 보고 있는 성악가는 체칠리아 바르톨리로,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이다.
그녀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카라얀이었습니다. 카라얀의 동양에서 온 작은 소녀 조수미의 재능에 탄복했고, 그녀를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음 ─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카라얀은 80세였고, 이듬해 타계했습니다 ─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조수미 역시 카라얀과의 만남을 ‘기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오늘날 자신이 성악가로 성공하는데 누구보다 큰 도움을 주었던 스승이자 친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조금 더 이어졌다면 오늘날 성악계의 역사가 조금은 더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처럼 황제로 군림하며 때로는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기도 했던 카라얀이지만 인재를 대할 때의 그의 편견 없는 태도는 ‘헌신적’이라 할 만큼 평소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만큼 인재를 사랑하고 인재에 대한 욕심이 컸던 지휘자였습니다. 그런 카라얀과 함께 했던 인재들은 지금 대부분 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카라얀도 그들과 함께 했기에 역사에 길이 남을 공연과 음반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오만한 권력자의 냉엄한 얼굴 뒤에 숨겨진 따뜻하고 아름다운 또 다른 얼굴입니다. 최근 광고계는 회사의 규모에 상관없이 ‘인재 유출’이라는 큰 파고를 겪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본이자 역량인 광고업에서 인재가 빠져나간다는 것은 커다란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올해로 카라얀이 타계 한지 33년이 되었습니다. 광고업계에서 인재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부각되고 있는 지금, 그의 인재 존중 리더십과 철학을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