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영 작가_콘텐츠 미디어산업 전문가 및 트렌드북 작가
“007을 10조 원에 산다고?”
2021년 6월, 아마존은 올드 IP 집합소인 한물간 ‘MGM 스튜디오(Metro Goldwyn Mayer’s Inc)’를 85억 달러(약 10조 8,000억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1924년 설립되어 전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스튜디오인 MGM을 ‘한물갔다’라고 표현해 유감이지만 <벤허>, <007시리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록키>, <델마와 루이스> 같은 걸작들을 지나 1990년대 이후에는 중박 수준의 작품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급기야 2010년에는 파산 보호 신청을 하기도 했으니 MGM의 포효하는 ‘사자 오프닝’을 보거나 들어본 적도 없는 젠지세대들(Gen Z)이 수두룩할 터이다.
IP확보에 사활을 걸다
“오징어 게임 굿즈(Goods)는 제작 단계에 있으며 향후 게임까지 지식 재산권(IP)을 활용해 2차 저작물로 활용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2021년 10월, 모 경제지의 <오징어게임> 기사에서 발췌한 한 문장이다. 넷플릭스의 MD 숍인 ‘Netflix.shop’에서는 아직도 <오징어게임> 굿즈가 활발히 팔리고 있다. 즉, 넷플릭스는 전 세계의 오리지널 콘텐츠들을 투자할 때 (물론, 예외는 있겠으나) 영상뿐 아니라 머천다이징이나 기타 사업권 IP까지 전부 확보하는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넷플릭스의 아시아 태평양 콘텐츠 총괄 부사장이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오징어게임 IP에 대한 로드맵을 만들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만 보더라도 수년 안에 <Squid Game>이라는 모바일 게임이 출시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2021년 9월에는 <그렘린>,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 전설의 아동문학책 IP를 다량 보유한 로알드 달(Roald Dahl) 컴퍼니를 인수하는 등, 지금 넷플릭스의 IP 응집은 빠른 속도를 밟고 있다.
이처럼 지금 세상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IP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지난 백여 년간 할리우드는 단 한 번의 쉼 없이 IP 컬렉션과 보호에 집착해왔으며, 최근엔 실리콘밸리 공룡들 역시 IP에 열을 올리는 모양새다. IP가 중요한 건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사활을 걸어야 할까. 왜 아마존은 거대한 애플과 경합하면서까지 10조 원에 달하는 돈을 MGM에 투자했으며, ‘디즈니와 비교하지 말라’며 폼을 잡던 넷플릭스는 왜 디즈니의 슈퍼 IP 전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까.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
1990년대에 WWW(World Wide Web) 세상이 열리며 검색 트래픽이 넘쳐났고 이후 소셜미디어는 여기에 검증의 시대를 더했다. 포털의 어마어마한 정보량과 피드, 댓글 등으로 설득보다 검증이 당연해진 세상이 온 것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보급화는 소비자들에게 시공간을 벗어난 삶을 주었으니 브로드캐스팅 광고의 실효성은 더 낮아지고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파편화된 고객에게 정해진 시간과 고정된 플랫폼에서의 광고는 예전만큼 효력이 없으며, 그렇기에 브랜드들은 흩어진 고객들의 시간을 어떻게 선점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고민은 자연스레 IP로 이어진다. 콘텐츠를 비롯해 모든 산업에서 이제 공급자는 프로덕트가 스스로 마케팅하는 쳇바퀴를 만들어줘야 한다. 독립적으로 마케팅하지 못하는 프로덕트는 이제 살아남기 힘들다는 뜻이다. 소셜미디어(SNS) 중심의 내로우캐스팅 광고 역시 대안일 뿐 본질을 건드리진 못하고 있다. 결국 답은 IP의 전략적 활용에서 찾아야 한다.
흔히, 콘텐츠 판에서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를 찾아라”라는 말이 있다. 가장 훌륭한 IP는 두말할 나위 없이 ‘누구나 알고 잘 아는 IP’ 이겠으나 이는 대부분 주인이 있는 천문학적인 가격의 글로벌 슈퍼 IP들이다. 그렇기에, 콘텐츠 IP를 활용하려는 경우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를 발굴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쉬운 사례로 2014년 관객 수 1,800만 명을 달성하고 아직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는 영화 <명량>이 있다. 대한민국에 이순신과 거북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거북선이 출동한 대첩 이름이나 배우 류승용씨가 연기한 ‘구루지마’라는 왜군 용병에 대해서는 대부분 깊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 즉 익숙하지만 새로운 IP는 모범적인 IP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콘텐츠 판에서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를 찾아라”라는 말이 있다. 가장 훌륭한 IP는 두말할 나위 없이 ‘누구나 알고 잘 아는 IP’ 이겠으나 이는 대부분 주인이 있는 천문학적인 가격의 글로벌 슈퍼 IP들이다. 그렇기에, 콘텐츠 IP를 활용하려는 경우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를 발굴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쉬운 사례로 2014년 관객 수 1,800만 명을 달성하고 아직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는 영화 <명량>이 있다. 대한민국에 이순신과 거북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거북선이 출동한 대첩 이름이나 배우 류승용씨가 연기한 ‘구루지마’라는 왜군 용병에 대해서는 대부분 깊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 즉 익숙하지만 새로운 IP는 모범적인 IP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개봉해 제작비의 5배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 <다빈치 코드>도 마찬가지다. 개봉 전에 이미 2,500만 부 이상이 팔린 소설이 원작이다. 세계를 흔들었던 베스트셀러라 알고는 있지만 현란한 지적 유희들로 온전한 이해는 어려웠던 IP가 영화의 대흥행으로 이어졌다. (소설 팬덤들이 지적했던 영화에 대한 혹평은 논외로 한다) 당시의 마케팅 역시, 대놓고 신비주의를 내세우진 않았지만 기존 블록버스터들과는 다르게 강한 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소설을 읽진 않았어도 모나리자의 눈이 삼각형으로 삽입된 강렬한 붉은 표지의 책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세대를 관통하는 슈퍼 IP의 조건
마블 영화의 시작이 고작 20년밖에 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가. 2000년대 초반, 2만편의 IP를 보유한 마블이 만화책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메릴린치(Merrill Lynch)라는 금융회사의 설득이었다. 히어로물이 지금처럼 스크린을 장악하지 않던 시절, 종이 만화책과 영상 콘텐츠 간의 IP 융합을 시도한 것이나, 더 핵심은 90년에 달하는 마블 만화책의 긴 역사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까지 3대에 걸쳐 취향을 저격한 IP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시장을 넓고 깊게 장악할 수 있는 슈퍼 IP의 조건이 된다.
아시아 전역에서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무협 만화책 <열혈강호>도 조건들을 고루 갖춘 슈퍼 IP이다. 무려 30여 년간 연재되며 두 세대를 장악한 K 코믹스이며 끝나지 않은 연재로 지금도 신규 독자가 유입되는 훌륭한 IP다. 이미 모바일 게임이 흥행했으며 블록체인 기반의 P2E(Play To Earn) 게임과 다양한 NFT 사업이 준비 중이다. 현재 시즌제 드라마 제작도 추진 중인데 글로벌 센세이션과 함께 ‘K 무협’이 다양한 이종 산업과 만들어 낼 경제적 효과도 기대된다. 이렇게 세대를 관통하는 익숙한 IP를 다양한 채널로 제공하며 고객을 포위시키는 것, 이 지점이 슈퍼 IP의 조건이자 팬덤형 상품의 첫 단추이다. 실례로 필자는 2021년 책 <콘텐츠가 전부다 2> 에서 IP가 특정 시점에 단절되지 않고 수십년간 사업모델이 뻗어나가며 ‘원천 IP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가 무의미해진 순간을 슈퍼 IP의 시작으로 정의한 바 있다.
롱런 IP는 팬덤, ‘떡밥깔기’와 ‘밀땅’에서 시작하라
“고객은 떠나도 팬은 떠나지 않는다”
경제학자인 ‘데이빗 미어먼 스캇(David Meerman Scott)’의 책 <팬덤 경제학>의 핵심 한 줄이다. 트렌드가 바뀌면 고객은 떠나지만 팬덤은 그 상품이나 기업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상품과 서비스가 차고 넘치는 시대에서 공급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미션일 것이다. IP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롱런하는 IP를 위해 공급자는 일회성 소비, 즉 ‘팔구땡’이 아닌 재소비로 이어지도록 ‘팬덤 커뮤니티’ 또는 ‘지적 놀이터(커뮤니티)’ 를 설계해야 한다.
글로벌 슈퍼 IP들 중에서 압도적인 매출 1위는 포켓몬이다. 1996년 비디오 게임에서 시작되어 관련 비즈니스 누적 매출은 1천억 달러(약 130조 원)에 달한다. 전 세계를 흔들었던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GO부터 심지어 포켓몬 섹스토이까지 만들어지는 등 ‘포켓코노미(Pokeconomy)’의 파워는 지금도 폭발적이다. 2022년 한국 시장에서는 ‘포켓몬빵’까지 가세했다. 매일 저녁 편의점에 도착하는 트럭을 기다리며 포켓몬 빵을 사는 팬덤 때문에 #트럭이랑동시입장 이라는 밈이 생겼을 정도다. 그 큰 트럭에 왜 빵은 고작 두세 개 밖에 들어 있지 않는가. 슈퍼 IP와 팬들을 밀땅시키는 공급자의 얄미운 팬덤 전략이다.
최근엔 소비자들끼리 어떤 순간의 노스텔지어(향수)를 공유하거나, 혹은 경제적 보상이 의미있게 작동하며 팬덤이 견고해지기도 한다. 전자는 2021년에 돌아온 게임 ‘디아블로 2’가 2000년대 PC방 중흥기를 이끈 30~40대 아저씨들을 유튜브에서 뭉치게 한 것이 좋은 예이다. 실제로 게임사인 블리자드의 2021년 3분기 매출은 전년대비 20% 성장한 4억9300만 달러(5824억 원)를 기록했다. 후자의 경우에는 최근 NFT의 경제적 가치와 함께 블록체인 서비스들이 ‘이코노미’로 연결되며 새로운 방식의 팬덤 커뮤니티로 각광받고 있다.
이제 소비자들은 제품 후기를 네이버나 구글에 쓰지 않는다. 고객은 아마존과 쿠팡, 배민에서 논다. 아마존과 쿠팡에서 쇼핑을 하고 비슷한 취향의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만들고 음식을 시키고 커머스 기업들이 만든 OTT에서 드라마까지 보는 세상이다. 이들이 설계한 서비스 생태계에 갇혀 시간을 보내며 물 스며들듯이 그들의 팬덤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마케팅 전략은 팬덤과 브랜드덤(Brandom)에서 출발해야 한다. 고객에게 ‘팬덤형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관점에서는 향후 ‘UX·UI 팬덤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마케터’를 대체할지도 모른다. 미래엔 어떤 산업이든 상품과 서비스의 최종 모델은 팬덤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세대를 관통하며 다양한 산업들과 융합이 쉽고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IP가 필요하다.
노가영
CJ CGV와 CJ엔터테인먼트(現, CJ ENM)에서 콘텐츠 투자 유통 업무로 콘텐츠 산업에 발을 디뎠다. ‘CJ아시아인디영화제’와 제1~2회 ‘런던한국영화제’의 프로그래머 활동을 하며 영화 편성 업무를 산업적으로 배웠다. 이후 KT, SK텔레콤 등 통신기업에서 미디어 전략, 콘텐츠 투자, OTT 사업전략가로 성장했다. 2017년 <유튜브온리>를 시작으로 2020년부터 ‘베스트셀러 트렌드북’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콘텐츠가 전부다> 시리즈를 매해 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