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언어로 우리를 해석해보기
보통 저녁 10시면 잠이 드는데, 최근 주말은 좀 달랐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를 보는 시간. 방송국의 편협한 편성 시간에 휘둘릴 수 없다며, 상쾌한 컨디션을 위해 다음 날 재방이나 VOD로 봐도 되겠지만, 반드시 이 드라마만큼은 제시간에 가장 빨리 시청하는 애청자가 되고 싶은… 뭐 그런 드라마였다.
특히 변두리에 사는 사람으로서 여러 공감대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 출근 시간마다 꽉 찬 지하철도, 술을 마실 때면 막차를 타기 위해 나와야 하는 것도, 비록 농사는 짓지 않지만 동네 한켠 에서 풍겨오는 땅의 냄새도, 뿐만 아니라 싫어하거나 맞지 않는 사람을 그 몇 안되는 한정된 공간이기에 계속 마주쳐야 하는 삶까지도, 무척 여러 가지로 공간에 의한 에피소드들이 끌리는 드라마였다.
공간 설정을 빼고도 인물 간에 오가는 대사들이 또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뻔한 감정인 ‘사랑’을 ‘추앙’에 가져다놓은 독특한 작가의 용기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와닿는 구석이 생겼다. “추앙”. 사랑하면서 요구하게 되는 것들,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들, 그런 다다를 수 없고 식상함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않던 차에 오롯이 그 사람을 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그 대치된 사랑의 단어가 갈수록, 본래 ‘사랑’보다도 더 ‘사랑’스럽게 들렸다.
'단' 하나도 똑같지 않은 언'어'
단어가 주는 인식의 결속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통상적으로 사람 간에 소통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약속인 “단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사물의 정의를 통해 시스템을 정확히 작동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우리의 시스템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오용되거나 편견을 만드는 단어를 골라, 합의를 통해 바꾸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의 대표적인 예는 “정상인”이라는 단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하는데 쓰였지만, 소수의 예외인 이들에게 묘한 위화감을 주고, 때론 차별짓게 만드는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다. 그래서 이를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비장애인’이나 ‘이성애자’ 등 구별짓기 용도의 단어로 치환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단어는 우리의 합의 속에 어떤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 바뀌고, 살아서 움직인다.
광고라는 일에서의 '단어'
광고라는 일에서의 단어도 그렇다. 과거에 인쇄, TV광고가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에는 통상 큰 매체 구분점이 TV와 인쇄 뿐이었다. 대표적인 영상 매체와 이미지의 매체. 출근을 하거나, 외출을 할 때,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반드시 챙기게 되는 건 신문이었고, 집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던 대부분의 취미는 TV였다. 그 두 가지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의 대부분을 담당하니 그 이외의 별다른 구분이 존재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어렸던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도 지하철 통로를 오가며 신문을 팔던 것, 집에서 식사 시간은 TV와 함께 담소가 이어지던 그런 것들이다. 그만큼 두 가지는 곧 매체의 전부였다. 그 두 가지뿐이다 보니 각 역할을 논하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단지 두 매체를 어떻게 활용하여 최대한의 광고 노출량을 만들 것인가가 주효한 과제였을 것이다. 수치로 제시하기 좋은 GRPs가 어쩌면 만능의 역할을 했었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은 시대가 변하면서도 그 자리를 어떤 매체가 차지하느냐의 변화만 있었을 뿐, 실제만큼 복잡하게 인식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쇄의 자리는 대부분 모바일이 차지했고, TV의 자리는 채널의 복잡해진 정도는 있었지만 겨우 지상파, 케이블 정도로 묶여 있다. 때문에 현재는 과거의 시대와 같이 TV와 디지털, 그 두 가지 중 무엇이 우리의 선택이어야 하는가의 아주 단순한 질문이 대명사처럼 매체 기획에 자리잡곤 한다. 거기에 더해 단지 트렌디한 단어들, 예를 들면 빅데이터나 프로그래매틱 바잉, 어드레서블 TV와 같이 편리하지만 앉아서도 비즈니스의 성과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측정될 수 있다는 괴담스러운 얘기들이 최근 매체들이 가져야 할 단어의 본원적 속성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매체를 규정짓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일
지금은 그저 노출량이나 기여도에 어떤 매체가 유리한가 정도로만 매체를 따져 묻는 시대를 지나, 다양성에 다양성이 더해지는 시대인 만큼, 각 매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고려하고, 또 구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단지 우리가 동원해야하는 시청 모수가 TV에 많다, 디지털에 많다는 게 선택의 이유가 됐다고 하기보다는, 시청 모수의 특성에 어울리는 매체의 활용 방식이 고민되어야 하고, 특히 적은 모수라면 어울리는 방식은 물론, 진행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자체가 더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앞으로의 매체 기획에 중요한 건 매체를 규정 짓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일일 수 있다. 단순히 TV나 디지털을 매스미디어라고 지칭할 수도 있겠지만, 매번 각 매체들의 미디어 타겟을 10살 단위로 맞춰 놓아 운영하면서 그것을 여전히 매스미디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보다 왜 그렇게 매체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명이 마케팅의 목적과도 부합하고, 매체의 결과를 상상하게 만드는데도 용이하다. 가령 예를 들면, TV매체 중에서도 가구 시청률이 뛰어난 주말 프라임 시간의 스테디셀러인 주말 드라마는 “가족 시청 매체”로, 23시, 가구 시청률과 개인 시청률이 거의 같은, 조용한 시간의 예능이라면 “개인 시청 매체”로 구분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매체를 골라 구성하는지에 대한 명분은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날 추앙해요. 그냥 매체로는 안돼. 추앙해요."
지금의 매체는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이 어떤 상태든 우리는 이 메시지를 보여주고 말 거야”를 보통 얘기한다. 메시지는 고객을 위한 선택일 뿐, 매체를 위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체는 또한 곧 고객이 쓰는 습관과 행태가 담겨 있는 메시지의 형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매체를 조금 더 고려한다면 “당신은 이런 상황이니 이런 메시지를 주겠어”가 더 고객의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런 시대에서 그렇게 겸손하게 접근된 광고는 누군가 그래도 우리가 만든 광고를 추앙할 확률을 높게 만들지 않을까? 굳이 사랑은 아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