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영상 속 어느 산골 너와집 마당에서 얼굴 없는 주인이 말없이 요리를 한다. 항아리에서 건져낸 잘 익은 오이지와 직접 갈은 콩국수, 가을볕에 바짝 말린 시래기를 넣어 끓인 감자탕, 함박눈이 내린 날에 담근 동치미까지. 올봄에는 밭에서 캐낸 쑥으로 쑥개떡을 만들었다. 못하는 게 없는 계절밥상 주인장의 진짜 능력은 이 모든 것이 손톱만한 미니어처 요리라는 점이다. 아기자기하고 무해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평화로운 시골집으로 순간이동해 시끌벅적했던 하루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힐링 영상이다.
짧지만 강렬한 쉼표
빽빽하게 솟은 도시 빌딩숲 사이로 쏴하고 폭포가 쏟아졌다. iF 디자인어워드 2022 위너와 골드를 수상한 뉴욕 타임스퀘어의 공공 미디어 작품, 워터폴 엔와씨(Waterfall-NYC)와 웨일#2(Whale #2)이다. 디스트릭트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2021년 7월, 하늘로 길게 뻗은 높이 128m의 원타임스퀘어 외벽 스크린을 타고 디지털 폭포가 쏟아졌다. 섬세하게 표현된 낙하하는 물줄기는 도심의 무더위를 가르며 강렬한 대자연의 쉼표를 선사했다. 1400㎡의 LED 광고판은 3차원의 거대한 수조가 됐다. 그 안에는 물결치는 파도가 순식간에 고래가 됐다가 다시 파도가 되는 것을 반복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상상했던 미래의 디지털 서사를 경험하게 하고, 공공 미디어에서 미디어아트의 역할을 재정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표현력과 기술력, 시각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였다는 호평이었다. 그 이면에는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포처럼 팬데믹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들이 동요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LED 광고만큼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뉴요커들이 마주한 거대한 ‘물멍’의 시간. 그 잠깐 동안 파도처럼 요동쳤을 영감을 상상해 본다. 그 순간에 누군가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 평범한 샐러리맨 주인공처럼 갑작스러운 일탈을 꿈꿨을 수도 있겠다. 또는 고단함을 잠시 잊는 멍 때림의 시간이었을 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멍(Hitting Mung)의 미학
미국의 NBC,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반복적인 영상을 보며 심신을 달래는 사회적 현상, 한국의 ‘멍 때리기’를 조명한 적이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코로나19 확진자 증가, 치솟는 부동산 가격, 길고 고된 업무 시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변화 속도 등을 경험할 수 있는 곳’, ‘한국에서 제대로 된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피난처를 찾는다’고 설명했다.
힐링과 치유가 키워드로 떠오른 멘탈 헬스(Mental Health)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멍 때리기’를 주제로 한 시몬스의 오들리 새티스파잉 비디오(Oddly Satisfying Video)가 큰 호응을 얻었다. 뛰어난 영상미와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등 잔잔한 백색소음과 천천히 편안하게 반복되는 영상은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디지털 아트라는 평이다.
도산대로 1.6km 일대의 대형 옥외 디지털 빌보드에 동시다발적으로 총 8편의 디지털 아트를 전시한 캠페인은 여타 브랜드에서 극히 드문 사례로 이목을 끌었다.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며 대대적인 브랜드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시몬스는 ‘침대 없는 침대 광고’의 브랜딩 혁신을 이어가는 중이다.
단순함에서 찾는 충만함(Simfullness)
구글이 주목한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다.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이 ‘단순함’에서 위안을 찾는 것은 계속되는 변화와 복잡함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불안정해지니 스트레스도 많아지고 피로도도 더 높아졌다.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와 메시지는 더 현란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앞으로도 현대인의 정신 및 신체 건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전망이며,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과 스트레스 해소법이 최적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순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진짜 쉼표가 필요해
필사적 피난처로 떠나는 휴가,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만국 공통이겠다. 꿀 같은 휴식을 오롯이 만끽하기 위해 이번 휴가철에는 영화 속 ‘월터’가 떠났던 아이슬란드의 관광청 캠페인 도입이 필요할 것 같다. ‘OutHorse Your Email’ 캠페인은 아이슬란드 여행 관광객을 위한 ‘휴가 중 자동 응답 메일’ 캠페인이다. 현재 본인은 휴가 중이며 아이슬란드 말에게 메일 작성을 맡겼고, 언제 복귀할 예정이라는 응답 메일을 보내준다. 본인이 선택한 말이 커다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가면 입력된 글자들이 메일로 전송된다. 아마도 ‘dfffffffffffffffddddddddd’ 이런 메일이 보내질 것이다. 휴가 중에도 울리는 메신저, 업무 이메일을 위트 있게 반사시키는 방법이겠다.
피로 관리도 트렌드가 된 헬시플레저 시대. 지금 당신의 머리가 복잡하고 압박감과 피로감이 밀려온다면 고민들을 잠시 꺼두고 머릿속을 비워보는 무자극의 시간, 멍 때리기를 제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