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적 소비, 즉 소비를 통한 과시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고가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파인 다이닝, 럭셔리 제품을 구매해 자랑하는 플렉스 등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싼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다. 과시적 소비의 또 다른 표현이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다. 베블런 효과라는 말이 19세기 후반에 나왔으니, 소비를 통해 우월적, 과시적 욕망을 드러내 온 지 최소 120여 년이 넘은 셈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새로운 과시의 형태가 등장했다. 바로 ‘과시적 비소비’다. 소비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과시한다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과시라는 것은 남들과 다른 점을 드러내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다. 아무리 샤넬 백을 들어도 남들이 다 그 가방을 든다면, 아무리 벤츠를 타고 다녀도 길거리에 벤츠가 흔하게 돌아다닌다면 쓴 돈에 비해 과시가 잘 안된다. 오히려 남들이 가지지 않는 것을 가져야 비교우위에서 새로운 과시 욕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누구나 소비하는 세상에서 소비 안 하는 특별함
우리가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은 소비만은 아니다. 경험 역시 중요한 과시의 수단이 된다. SNS를 통해 수시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드러내는 요즘 특히 경험은 중요한 과시의 수단이다. 경험을 먼저 하거나, 아주 색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 역시 과시가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쓰는 돈과 과시가 무조건 비례관계가 아니다. 누구는 돈 한 푼 안 쓰고도 과시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무지출 챌린지다. 말 그대로 돈을 한 푼도 안 쓰는 도전을 하는 것이다. 챌린지는 놀이다. 돈 안 쓰는 걸 놀이 삼아, 즐거운 경험으로 선택한 것이다. 무지출 챌린지는 2022년 여름 이전까진 전혀 쓰지 않던 말이다. 없던 말이 등장했고, 20대가 무지출 챌린지를 하며, 인스타그램에는 자신의 가계부도 인증하고, 일주일간 돈을 얼마나 안 썼는지를 자랑삼아 얘기한다. 이를 통해 경험의 과시, 먼저 새로운 챌린지를 하고 있다는 심리적 우월감을 가진다.
네이버 트렌드로 살펴본 최근 2년 2030 대상 무지출 챌린지, 거지방, 욜로 키워드에 대한 검색어
관심도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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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트렌드)
거지방에는 거지가 없다, 자발적 무지출
2023년 봄에는 거지방이 갑자기 등장했다. 거지방은 진짜 거지들의 모임이 아니다. 수십, 수백 명씩 단체 카톡방에 모여서 자신이 그날 소비한 것을 얘기하면 남들이 욕해주는 것이다. 가령 스타벅스 커피를 한잔 마셨다고 하면, “그냥 탕비실에서 인스턴트 커피 한잔 먹고 말았어야지”라며 타박해 준다. 그러면서 얼마나 돈을 아끼며 하루를 보내는지 서로 얘기하는 놀이다. 20대들이 놀이를 통해 비소비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2030 세대에서 욜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무지출 챌린지, 거지방이 대두된 것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등 어려운 경제 사정의 영향이다. 이를 비자발적 비소비라 할 수 있다. 2030 세대는 ‘못 쓰는’ 것을 ‘안 쓰는’ 것으로 관점을 바꿔 소비 이슈를 경험 이슈로 바꿔 놓았다. 소비에서 선택과 집중은 더 심화된다. 한쪽에선 무지출로 아껴서 다른 한쪽에선 경험 소비에 투자한다. 절약해서 저축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과시를 위해 쓴다.
앞선 비자발적 비소비가 지갑이 얇아진 상황에서 대두되는 욕망이었다면, 자발적 비소비는 부자들도 선택한 욕망이다. 고기에 대한 비소비, 즉 비건이 되거나, 플라스틱이나 일회용품에 대한 비소비, 즉 환경 보호 관점에서 포장재를 보거나, 신상품에 대한 비소비, 즉 중고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런 비소비는 비즈니스의 방향 자체를 바꾼다. 소비자에게 파는 것이 비즈니스의 핵심이었다면, 이제 팔지 않고 빌려주고 고쳐주는 등 Rent, Repair, Resell, Resale, Refill 같은 비소비 코드들이 비즈니스의 새로운 핵심으로 부상했다.
Rent, Repair, Resell 비소비 코드가 뜬다
소비자에게 자사의 제품을 덜 사라고 하거나, 새것 사지 말고 중고로 사라며 중고 시장을 연결하고, 적극적으로 수선을 해주는 파타고니아는 비소비 코드가 가장 잘 반영된 브랜드이기도 하다. 과거엔 파타고니아 같은 방식은 비주류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류가 되었다. 모든 소비재 브랜드가 파타고니아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이유는 서로 다르겠지만, 결과는 같다. 결국 비소비 코드를 소비자가 지지한다.
자신들의 제품을 수선해서 물려 입으라는 파타고니아 광고
(출처: 파타고니아 공식 유튜브 채널)
에르메스 버킨백 관련해 제일 과시가 되는 건 할머니가 쓰던 버킨백을 손녀가 물려받아 쓰는 행동이다. 부자는 돈만 가진 게 아니라 대대로 문화자산도 같이 물려준다. 에르메스는 오래된 가방도 부자재를 다 확보하고 있어서 수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에르메스는 수선(repair)을 아주 강조하는 럭셔리 브랜드이기도 하고, 에르메스의 화장품 라인은 리필용 제품도 적극적으로 팔고 있다. 대표적인 럭셔리 브랜드가 비소비 코드를 활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소비자인 부자들에게도 비소비가 중요한 욕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 생산한 제품이든 본사 수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에르메스
(출처: 에르메스 공식 홈페이지)
패션 시장에서 가장 성장세가 높은 것은 중고 패션 시장이다. 절약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희소성이 중요한 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소비자는 2030 세대다. 신상품을 만들려면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지만, 과거에 만들어 놓은 제품을 중고로 수선해 다시 쓰면, 자원도 절약하고, 탄소배출도 막는다. 이런 이유가 중고 패션 시장이 성장세 높은 미래 시장이 되는 결정적 이유다.
과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변신할 뿐
과시적 비소비 시장에 명품 브랜드는 대부분 진입했고, 유명 패션 브랜드, 유명 백화점도 대거 진입하고 있다. 마치 BMW, 벤츠, 포르쉐 등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들이 인증 중고차 시장에 다 진입해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들 자동차 메이커들은 새것을 팔 때도 돈 벌고, 중고를 팔 때도 돈 번다. 과거에는 이들이 만든 자동차였어도 중고 거래 시장은 그들과 무관한 비즈니스였다. 심지어 자동차 메이커들이 로봇 택시를 비롯 모빌리티 시장을 공들인다. 차를 소유하지 않을(비소비) 소비자가 가질 ‘과시’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 되어도 ‘과시’를 포기하진 않는다. 과시의 방법이 ‘비싼 물건 소비’라는 지극히 1차원적인 접근에서 진화해, 이젠 ‘특별한 경험 소비’, ‘환경적, 사회적 가치가 부여된 소비’ 등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기업들이 노려야 할 비즈니스의 기회는 계속 커지고 있다. 비소비는 소비의 방법, 방향이 바뀌는 것이지 소비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소유가 아닌 경험, 활용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 과시적 비소비는 기업들이 대응할 미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