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미국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웨스트월드’라는 작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프리미엄 영화 채널 ‘HBO’에서 2016년 10월부터 2022년 8월까지 방영된 디스토피아 SF 드라마다.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각본 · 제작을 맡은 1973년 동명의 영화를 바탕으로, 조너선 놀런과 리사 조이 부부가 연출했다. 국내에서도 ‘웨이브’ 등의 OTT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인간형 외모와 인공지능 두뇌를 가진 로봇으로 가득한 잔혹한 테마파크를 그린 드라마 웨스트월드 (출처 : 웨스트월드 페이스북)
이 드라마에는 ‘호스트’라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 로봇들이 주민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에 ‘여행객’으로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모험과 스릴을 즐기는 대가로 큰 비용을 지불한다. 이 드라마에서 호스트는 사람과 같은 지능과 자아를 갖추고 있으며, 자신이 로봇인지 모른 채, 정해진 성격대로, 정해진 직업에 맞춰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인간을 꼭 닮은 고성능 인공지능이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재앙일 수도, 축복일 수도 있지만,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자아를 깨달은 인공지능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창조주인 인간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공지능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만 있다면 이는 인간 관점에서 크나큰 이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의 일정을 계획하며 움직이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런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과 미래, 산업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스스로 판단해 ‘파티’에 참석하는 인공지능
우선 인공지능이 인간에 필적하는 자아와 지능을 갖추고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부터 조금 짚어보자. 답을 내지 않으면 인간은 고성능 인공지능을 개발할 당위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 해묵은 논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저마다 여러 해법을 제시해 왔다.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그 유명한 ‘로봇 3원칙’을 제시했고, 현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인 인공지능 통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영화 오토마타 제작진은 ‘2대 프로토콜’이라는 규약을 내 걸었다. 로봇은 생명체를 다치게 할 수 없고(제1 규약), 스스로, 혹은 다른 로봇을 수리하거나 개조할 수 없다(제2 규약)고 못 박는다. 이것은 사람보다 뛰어난 인공지능 로봇이 새로운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해 기하급수적으로 진보를 거듭해 결국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것을 우려해 만든 규약이다.
드라마 웨스트월드에선 문제가 생긴 인공지능 로봇을 리셋(reset)하고 새로운 기억을 주입한다. (출처 : 웨스트월드 페이스북)
이 밖에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인간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핵심 소스코드를 의무적으로 내장하도록 하자는 ‘인공지능 유전자 이론’ 등도 있다. 드라마 웨스트월드에선 호스트가 어느 날 문제를 일으킬 것 같으면 데리고 와서 ‘리셋’을 시킨다. 리셋된 호스트는 새로운 기억을 이식받아 다시금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선, 인간과 같은 완벽한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단이 ‘리셋’인 셈이다.
그렇다면 웨스트월드의 ‘호스트’와 같은 완벽한 인공지능의 개발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챗GPT와 같은 고성능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사람처럼 대화하고, 사람처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시스템이 실제로 등장한 사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와 구글의 연구진은 샌드박스 게임 ‘스몰빌’을 개발했는데, 이 게임 안에는 총 25명의 각기 다른 캐릭터가 생활하고 있다. 즉, 25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을 컴퓨터 속 가상 세계에 만든 셈. 현실이 아닌 게임 속이라는 점, 로봇이 아닌 가상 캐릭터라는 점 등의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여러 면에서 웨스트월드와 대단히 닮아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공지능 NPC들만으로 꾸린 디지털 마을 스몰빌 (출처 : 논문 Generative Agents: Interactive Simulacra of Human Behaviour)
이 게임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인간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일정을 조정해가며 일과를 꾸려 나갔다. 연구진들은 이 캐릭터들의 정체성, 서로 간의 관계, 대략적인 일과 정도만 세팅해 두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풀어줬는데,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일어났다. 게임 속 한 캐릭터가 ‘어느 날 파티를 열고 싶다’고 하자 또 다른 캐릭터가 ‘파티 준비를 돕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파티와 아무 관계없던 다른 캐릭터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스몰빌의 인공지능 NPC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 (출처 : 논문 Generative Agents: Interactive Simulacra of Human Behaviour)
초대를 받았던 또 다른 캐릭터는 ‘연주회를 할 시간과 겹쳐서 가지 못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캐릭터들끼리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캐릭터 간의 관계를 스스로 발전시켜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캐릭터의 행동을 보고 의미를 추론해 말을 건네기도 하고, 이성 캐릭터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더니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고성능 인공지능, 현실+메타버스 만나며 신시장 열릴 것
현재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평가받는 건 아마도 언어생성 인공지능 챗GPT일 것이다. 스몰빌 개발진들도 가상 캐릭터들의 언어생성 모델은 챗GPT의 서비스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이처럼 고성능 인공지능을 사용하면 사람처럼 대화하고, 스스로 추론해 답을 내는 단계에 도달한 셈이다.
이런 기술은 산업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얼핏 게임산업에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는 예측 정도가 가능하다. 흔히 볼 수 있는 ‘롤플레잉 게임’ 등에서 사람이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들을 NPC(non-player character)라고 하는데, 이 성능을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NPC는 정해진 대사를 하며 그저 미리 입력된 행동만 가능하기에 한계가 있는데, 앞으로는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해지며 더 난도 높은 적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런 고성능 인공지능이 지닌 산업적 가치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이미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집안 모든 제품은 인터넷으로 연결돼 있고, 자동차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론, 땅을 굴러다니는 로봇 등도 모두 컴퓨터의 명령을 받는다. 이런 시스템을 사람이 일일이 수동으로 통제하고 명령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도시 전체의 교통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새롭게 개발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사람이 일일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조작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성능이 나올 리 없다. 결국, 최적의 판단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재빠르게 도시 전체의 신호등을 조작할 수 있는 가상 인공지능 직원이 인간 직원과 함께 일하는 것이 최선이다.
현실에서도 이 정도니, 가상현실(메타버스) 서비스와 만나면 인공지능의 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 메타버스 세상에는 온전히 인간과 거래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고 교류하는 대상은 사람이 직접 조작하는 ‘아바타’일 수도 있고, NPC일 수도 있다. 혹은 하나의 객체가 그 둘 사이를 오고 갈 수도 있다.
아바타가 어떤 때는 사람의 통제를 받고 있다가, 어떤 때는 (예를 들어, 아바타의 주인이 잠을 자기 위해 로그아웃했을 때 등) 인공지능의 통제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단계가 되면 완전한 NPC 역시 어엿한 메타버스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우리가 메타버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려면 인공지능 NPC와도 교류하고, 그들과도 함께 일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들이 갖는 시장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 다가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지속해서 발전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발전해 나갈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인공지능은 인간 지능의 수많은 특징 중 일부만을 단편적으로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즉, 현 단계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조만간 초월할 것’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이 인공지능이 ‘사회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인공지능의 반란’을 우려할 단계는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 지금은 그 가치에 집중할 때다.
전승민 과학 전문 저술가
‘현실 세계에 도움되는 기술이 진짜 과학’이라는 모토로 18년 동안 다양한 과학기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전문 저술가. 과학기술 전문 미디어 기업 ‘동아사이언스’에서 11년간 일하며 월간 <과학동아> 기자, <동아일보> 과학팀장, <동아사이언스> 온라인뉴스 편집장 및 수석기자를 지냈다. 이후 세계적 과학기술 매체 <와이어드(Wired)>의 한국판(Korean Edition) 정보과학부장을 지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 및 과학저술가로 <국민일보>, <아시아경제> 등 여러 매체에 고정 필진을 맡고 있다. ‘나는 AI와 일한다’ ‘소설로 알아보는 바이오 사이언스’ 등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