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융희 / 문화연구자, 작가. 저서 <웹소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판타지 #게임 #역사> 외 다수.
웹소설 시장이 2023년을 기준으로 1조원 규모를 넘어섰다. 이제 웹소설이 보여주는 파급력은 무척 커졌다. 드라마, 웹예능, 웹드라마, 영화, 웹툰, 게임 등 다양한 매체의 원천 IP로 사용되며 장르의 최전선이자 최후방을 폭넓게 담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어게인 마이 라이프>와 같은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방영됐으며 <전지적 독자 시점>, <화산귀환>, <황제의 외동딸>, <나 혼자만 레벨업> 등의 웹소설 원작 웹툰이 글로벌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웹소설이 원작인 웹툰 <전지적 독자 시점>, <황제의 외동딸>, <나 혼자만 레벨업> / 출처 네이버 웹툰, 카카오페이지
웹소설의 과거를 돌아보면 한국의 장르문학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무협소설은 60년대에 시작됐으며 판타지는 90년대에 등장했다. 삼중당 하이틴 로맨스부터 시작된 로맨스 팬덤은 80년대에 만들어졌다. 즉, 웹소설에는 MZ부터 X세대, 나아가 386, 베이비붐 세대의 욕망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이와 같은 웹소설을 왜 좋아할까? MZ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웹소설 장르인 ‘회귀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노스탤지어와 유토피아 사이
회귀물이란 <재벌집 막내아들>, <어게인 마이 라이프>처럼 과거로 돌아가 다시 태어난 주인공이 이전과는 다른 현실을 그려내는 이야기 구조를 일컫는다. 비-웹소설 독자들이 웹소설을 유치한 서사, MZ의 서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구조의 주인공이 겪는 초월적인 행운 때문이다. 당장 10년 전으로 돌아간 주인공이 미래의 투자 지식을 바탕으로 부동산과 주식, 코인을 사면 승승장구하지 않겠는가.
억울한 죽음을 겪고 환생한 검사 김희우의 정의 실현 복수극 <어게인 마이 라이프>. 2015~2016년에 웹소설로 연재/발매됐고 2019~2021년에 웹툰, 2022년에 드라마로 제작됐다. / 출처 page.kakao.com
이러한 서사 구조가 가진 본질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까닭은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래의 지식이 많을수록, 경험이 풍부하고 다채로울수록 유리하며 이러한 욕망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 중장년층에게 쉽게 어필된다.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이라고 말하는 중장년층의 말에는 노스탤지어(Nostalgia)가 녹아있다. 문학 비평에서 노스탤지어란 ‘상실된 고향’이다. 이들에게 ‘회귀’라는 웹소설의 형상은 향수의 공간으로 돌아가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MZ세대는 아직 상실한 것이 없다. 코인이나 주식투자는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알았다면 좋았을 가능성, 희망, 즉 가지 않은 길일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회를 잃어버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기회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택하지 않은 것뿐이다. 웹소설의 회귀물은 젊은 세대들이 고르지 않았던 선택지, 그리고 그 시계를 과장되게 낭만화한 후 유토피아(Utopia)적으로 꾸며낸다. 이처럼 동일한 세계를 노스탤지어의 공간으로 보느냐 또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보느냐에 따라 웹소설을 소비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자본주의 서사와 공정의 구조
고향을 잃은 사람은 영원히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결코 채울 수 없다. 그 좌절감과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다른 무언가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 욕망은 노스탤지어를 대신한 대체품일 뿐 결국 인간은 욕망에 매몰된 채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웹소설은 이러한 노스탤지어의 세계, 사라져버린 원본 속으로 주인공을 그리고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는 독자들을 옮겨놓는다. 그렇기에 웹소설은 위안의 공간이자 회복의 공간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 웹소설은 자신이 경험하기엔 너무 오래된 시공간이거나(1960~2000년대를 다루는 <마이, 마이 라이프!>나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 등), 다시 돌아가더라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그저 아쉬워만 하는 현대사회(2010~2020년대를 다루는 <요리의 신>, <마운드 위의 절대자>,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회귀도 잘하는 놈이 잘한다> 등)에 불과하다. 그들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간다는 기적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활용하는 것만으로 모든 삶이 제대로 풀릴 수 있다고 가정된’ 안전한 유토피아, 즉 이상적인 세계의 성립이 필요하다.
웹소설 <요리의 신>, <마운드 위의 절대자>,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 출처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시리즈
웹소설의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언제나 제대로 된 대가로 돌아온다. 이러한 노력-보상의 흐름을 ‘자본주의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딸이 납치된 아버지가 있다. 그럼 이 영화의 목적은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딸을 구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상은 무엇일까? 고전적인 서사에서는 목적을 달성한 그 자체에 보상이 있다고 여겼다. 딸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 하지만 웹소설에서는 이를 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한 대학생이 과외 알바를 하고 있다. 그의 과외학생은 성적이 6등급인 고3이다. 1년간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 이 학생이 정시로 서울대에 합격했다. 그러자 과외학생의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 아들이 이번에 서울대에 가서 선생님도 참 보람차시겠어요. 커리어에 도움도 많이 될 것 같으니 과외비를 지급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들은 대학생은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이처럼 업무에서 느끼는 성취감, 만족감과 노동의 대가는 별개다.
앞서 영화의 예시를 다시 가져오자. 주인공인 아버지가 딸을 구출하는 것은 당연히 성사해야 할 목적이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가 납치당했고, 덕분에 ‘노동’을 통해 아이를 납치한 갱단을 처리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별도로 주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딸 옆에 함께 납치된 아이가 있어 구출했는데, 사실 그 아이가 만수르의 32번째 손자였고 보답으로 아버지는 아랍에미리트의 경호실장으로 고용된다거나 수억원의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처럼 웹소설의 서사는 모든 행동에는 가격이 매겨지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불된다는 환상이 전제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이 환상인 까닭은 이 세계가 불공정하다는 믿음,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패배감이 젊은 세대의 감각 깊은 곳에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을 즐기는 플랫폼도 한층 다양해지고 있다. (좌) 웹소설과 오디오 콘텐츠를 연결해 주인공과 대화하듯 스토리를 진행하는 <플링> (우) 이용자가 등장인물이 되어 이야기 전개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스플> / 출처 @pling_stories @storyplay_kr
현실을 반영하고 위로하는 웹소설
종종 웹소설의 미래에 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직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답한다. 웹소설 속 욕망은 시장이 넓어질수록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 성장해갈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점은 웹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이를 해소해 가는지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문학 장르에서 ‘환상’은 비평용어로 처음 정립된 근대 시기부터 늘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현대사회 대중의 고난과 욕망을 알고 싶다면, 지금 플랫폼에서 1위를 차지한 웹소설에 주목하자. 그곳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