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고자 하는 바람. 지난번 ‘성지순례’ 편에서 소개해 드린 것처럼, 캐릭터와 같은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구요? 그럼 이제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볼 시간입니다. ‘코스프레’란 의상을 뜻하는 코스튬(costume)과 놀이를 뜻하는 플레이(play)의 합성어입니다. 코스프레는 캐릭터 의상을 사 입는 단순한 과정을 넘어서 의상제작, 체형관리, 특수분장, 캐릭터 연기, 촬영까지 포함한 서브컬처 종합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코스프레를 잘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코스어(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의 도움을 받아 코스프레 실행 단계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는 심심하니, 마지막에는 제가 직접 코스프레를 해 볼 예정입니다!
Kendrick Lamar - N95 [Live @ Louis Vuitton Men’s Spring-Summer 2023 Show] / 출처: kled 유튜브
내가 가끔씩 찾아보는 루이비통X켄드릭 라마 패션쇼. 땡볕 아래에서 평생 입을 일 없는 옷을 걸친 사람들을 지켜보는 걸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모델 같지 않는 일반인 몸매에 우스꽝스러운 옷을 걸치는 코스프레와 비교할 건 아니라고? 난 소파에 누워서 조코비치의 플레이를 보는 것보다, 내가 직접 뒤뚱거리며 테니스를 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어를 소개하겠습니다. 2022년 세계를 강타한 애니메이션 <그 비스크돌은 사랑을 한다(이하, 비스크돌)>의 주인공 ‘키타가와 마린’입니다. 이 작품은 ‘예쁘고 잘 나가는 여자애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의 매력을 알아볼지도 몰라’라는 전형적인 오타쿠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키타가와 마린이 남녀를 불문하고 최고 인기 캐릭터로 등극하면서, 이 작은 작품이 전 세계 오타쿠들의 화제성 1위를 한순간 점유하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2022년 1분기가 <진격의 거인>과 <귀멸의 칼날> 같은 대작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놀라운 결과입니다.
키타가와 마린은 훤칠한 외모와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슈퍼인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게임/애니메이션 오타쿠라는 점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취향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당당하게 거부합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는 그녀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하고 싶지만, ‘똥손’이라 의상을 직접 제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히나 인형(일본 전통 공주 인형) 장인을 꿈꾸는 수줍은 남학생 ‘고죠 와카나’를 만나, 본격적으로 코스프레를 시작합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 두 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코스프레 세계로 빠져들어 봅시다!
STEP 2) 오타쿠 되기
코스프레를 하려면 일단 자기가 따라 하고 싶은 캐릭터를 선정해야 합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지 않다면 시간과 돈을 써서 그 캐릭터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겠죠. 마린은 와카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19금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보여줍니다. 매력적인 동급생을 옆에 두고 야한 게임을 하지만, 정작 캐릭터 의상에만 신경 쓰는 와카나의 모습이 재미 포인트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소개해 주는 오타쿠의 설레는 표정 / 출처: 비스크돌 공식 홈페이지
STEP 3) 캐릭터 연구
만화/게임에서의 의상은 그림이기 때문에, 실제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코스어는 스스로의 해석을 통해 디테일을 결정하고, 의상을 재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캐릭터 의상뿐만 아니라 성격, 배경, 주변인과의 관계까지 모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의상 재질을 결정하기도 하고, 주요 포즈에 적합하도록 의상에 활동성을 집어넣기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진심으로 연구하는 와카나의 모습에, 마린의 마음이 점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STEP 4) 사이즈 측정
소심한 와카나는 의상을 제작하기 위해서 모델의 상세한 사이즈를 체크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당황합니다. 마린은 ‘이럴 줄 알고 준비했지’라며 옷을 벗어던지고 비키니 차림이 됩니다. <비스크돌>에서 와카나가 손을 덜덜 떨며 마린의 사이즈를 체크하는 장면은 지켜보는 사람마저 긴장하게 만듭니다.
반면, 마린은 자신의 꿈을 향한 과정이라는 생각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와카나는 그런 마린의 모습에 마음을 다 잡고 거침없이 줄자를 갖다 댑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마린이 와카나의 거침없는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는 순간의 아슬아슬한 시간차. 이 시간차는 언제 사라지게 될까요.
사이즈 측정 직전. 사이즈 측정 장면은 차마 올릴 수가 없다 / 출처: 비스크돌 공식 홈페이지
STEP 5) 물품 구입
코스프레를 위해서는 의상만 아니라 다양한 준비 물품이 필요합니다. 마린과 와카나는 의상 원단, 장식, 가발, 속눈썹, 분장 도구 등을 사기 위해 번화가의 전문샵들을 돌아다닙니다. 저도 예전에 워크맨을 산다는 친구를 따라 용산 전자 상가를 따라다닌 적이 있는데요, 같이 따라다닌 친구에게 짜장면을 사주는 건 당시 일종의 국룰이었습니다. 마린은 자신을 따라다니느라 하루 종일 고생한 와카나에게 라면을 사줍니다. 이렇게 둘의 첫 데이트가 끝납니다.
STEP 6) 의상 제작
와카나는 마린이 언급한 코스프레 행사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매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가 의상 만들기에 몰두합니다. 일정에 맞추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수면 부족으로 날카로워진 와카나. 마린은 자신과 점점 소원해지는 와카나의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지만,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그를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둘 사이의 위기가 될 수 있는 피곤함과 미안함은, 마린이 완성된 의상을 보는 순간 모두 사라집니다.
의상 퀄리티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오타쿠의 희열 / 출처: 비스크돌 공식 홈페이지
촬영 중 급한 연락이 와서 일도 잠깐 하고...(좌) 이렇게 하니 누군지 모를 것 같아 인증샷도 찍어보았습니다(우)
그래도 가끔은 서로를 바라보자 / 출처: 비스크돌 공식 홈페이지
STEP 7) 착장 및 분장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애 캐릭터가 될 수 있다는 마음에 조금도 기다릴 수 없는 마린. 의상을 착장 하고, 캐릭터에 맞는 분장을 합니다. 코스프레 분장은 일상 메이크업과 특수 분장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처진 눈매를 표현하기 위해 테이핑으로 얼굴을 당기거나, 날카로운 치아를 표현하기 위해 틀니를 제작해 붙이기도 합니다. 피부색 표현을 위해 전신 화장도 주저하지 않는 마린. 이렇게 마린은 자신이 꿈꿔오던 시즈쿠 짱의 모습이 됩니다.
STEP 8) 행사 참가
이제 즐길 일만 남았습니다. 첫 번째 의상을 착장 한 마린은 곧장 코스프레 행사장으로 달려갑니다. 더운 날씨에 두꺼운 의상을 입고 탈진 직전까지 가지만, 자신을 촬영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끊임없이 응합니다. 기쁨을 자제하지 못하는 마린의 표정에 와카나는 순간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행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와카나는 그간의 피로가 몰려와 잠이 듭니다. ‘오늘 마린 양은 정말 예뻤어요’라는 본심을 잠꼬대로 말해버리는 와카나. 그가 ‘예쁘다’라는 말을 쓰는 대상은 그의 일생을 바치고 있는 히나 인형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마린은, ‘예쁘다’는 잠꼬대 한마디에 무장해제 되어 버립니다
첫 코스프레 행사에 참가한 코스어의 표정 / 출처: 비스크돌 공식 홈페이지
STEP 9) 촬영 및 보정
코스프레는 행사만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지순례 장소나 대여 스튜디오 등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탑클래스 코스어들은 배경이나 조명이 완벽하게 세팅된 곳에서 고가의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후보정을 통해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SNS 등에 업로드하여 상당수의 팬을 보유하고 있는 코스어도 많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저의 코스프레 사진을 공개하겠습니다….
두둥…!
촬영자의 요청에 따라 데드풀 포즈도 취해보고(우)
촬영 중 급한 연락이 와서 일도 잠깐 하고...(좌) 이렇게 하니 누군지 모를 것 같아 인증샷도 찍어보았습니다(우)
<비스크돌>의 이야기는 건강한 유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학생이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같은 목표를 바라보는 모습이 더 사랑스럽습니다. 코스어가 되기 위한 STEP 1은 이렇게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철없는 회사동료의 황당한 부탁에 응해준 2명의 촬영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가끔은 서로를 바라보자 / 출처: 비스크돌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