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ner’ 캠페인이었다. 2022년 파리 시는 자동차 과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km/h 속도 제한을 도시 전역에 시행했는데, 터무니없이 엄격한 법규 탓에 시민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스테판은 이러한 파리의 상황을 위트있게 활용했다. 자동차의 속도가 30km/h를 넘을 경우, 번쩍거리는 플래시와 함께 과속 카메라에 사진이
찍힌다. 과속 카메라는 달리는 대상이 아닌 ‘속도’만을 감지한다. 그렇다면 엄청나게 빠른 달리기 선수가 시속 30km 이상으로 도로를 달린다면, 그는 사진이 찍힐까? 아닐까?디스탕스는 수많은 달리기 선수들을 비밀리에 고용해, 한밤중에
그들 모두를 도로에서 달리게 했다. 결과는 정말 흥미로웠다. 러너 들은 파리 시의 엉터리 법률을 조롱하듯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고, 과속 카메라는 번쩍이며 그들의 ‘인생샷’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 속 모두가 디스탕스의 러닝화를 신고 있었다! 실제로 캠페인을 집행할 당시, 도로를 순회하던 경찰들마저 헛웃음을 터뜨리며 박
수쳤다고 한다. 프랑스 특유의 냉소적인 위트와 파리 시의 특수한 상황을 현명하게 적용한 캠페인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캠페인이었다.많이들 아는 사실이지만, 태국은 트랜스젠더의 나라로 유명하다.태국에 사는 트랜스젠더만 3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당시 스테판은 글로벌 스킨케어 브랜드 바셀린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시장 조사 차 방문한 코스메틱 매장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태
국에 이렇게나 많은 트랜스젠더가 존재하는데, 왜 트랜스젠더용 바디 로션은 어디에도 없는 거지? 오직 남성용/여성용으로만 출시 되는 바디 로션은, 성전환을 겪고 있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피부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트랜스젠더 여성용 바디 로션을 개발하자는 그의 무모한 제안에 처음엔 모두 당황했다고 한다. 허나 스테판은 ‘모두의 피부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겠다’는 바셀린의 비전을 다시 한번 말하며 오랜 시간 클라이언트를 설득했고, 결국 일 년이 넘는 연구 개발 끝에
‘Vaseline Transition Body Lotion’이 탄생했다. 로션에는 식물성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인 이소플라본이 들어있어,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피부를 부드럽고 탄력있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바셀린 트랜지션 바디 로션’은 출시와 함께 엄청난 관심과 호응을 얻었고, ‘모두의 피부를 위한’ 바셀린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스테판의 설명이 끝나자, 영 로터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쳤다. 모두의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누군가의 평생을 바꾸는 캠페인이 여기 있었다!
치열하고 뜨거웠던 PT 준비
셋째 날 정오, 긴장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PT 주제가 발표됐다. “바셀린과 함께, 피부 기증을 알릴 수 있는 참여형 캠페인 아이디어를준비하세요.” 캠페인 장소는 태국. 제한 시간은 24시간. 워크숍의 주제인 ‘Fun’을 잊지 않을 것.장기 기증, 신체 기증은 들어봤어도 피부 기증이라니? 그것도 한국 도 아닌 태국에서? 모두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정아와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주제부터 너무 어려웠다. 피부 이식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구글에 ‘Skin Donation’을 검색하면 심각하고 징그러운 사진들로 가득했다. 전에 없던 인사이트인가? 태국의 문화가 담겨있는가? 보는 사람들이 즐거운가?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
도 쉽지 않았다. 늘 광고인의 덕목이라 여겨지는 ‘똘끼’가 다소 부족하다 느꼈던 우리였기에… 재밌는 아이디어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시간이 흐르던 중, 정아가 한 기사를 읽더니 말했다. “피부 이식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게 등 피부래.” “그럼 등에다가 뭘 할까?” 갑자기 정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거 좀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사람들의 등을 매체로, 피부 이식을 홍보하는 내용이 등판에 쓰여있는 티셔츠를 만들자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아예 티셔츠 등판
을 도려낼까? 피부 이식할 때 사용하는 면적만큼.” 농담에 가까운 첨언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의 아이디어는 신기하리만큼 빠르게 발전했다.
그럼 어디서 어떻게 등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태국에서 등을 제일 쉽게, 많이 보는 곳이 어디일까? 순간 매일 보는 광경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토바이! 태국의 오토바이 사용량은 전 세계 1위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국에 있는 수많은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등이 우리의 매체가 되어줄 것 이었다. 그들 모두가 등이 뚫린 티
셔츠를 입고 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소 가볍게 보일 수 있는 아이디어
를 보완하기 위해, 나는 PT의 앞단 을 오랜 시간 고민했다. 세 가지 인사이트를 기준으로 아이디어를 소개하기로 했다. 첫째, 피부 이식을 하려면 해당 피부에 상처나 흉터, 타투가 없어야 한다. 고로 당신이 피부 기증자라는 말은 피부를 잘 관리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 피부 이식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건 등 피부다. 세 번째, 태국은 도로에 오토바이가 가장 많은 나라다. ‘당신의 자랑스러운 등, 더 이상 감추지 말고 자랑스럽게 드러내세요.’ 그렇게 바셀린의 ‘Proud to Show You My Back’ 캠페인 이 탄생했다. 등판에 구멍이 뚫린 한정판 바셀린 티셔츠를 발매해, 오토바이 사용자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이럴이 되고 참여를 끌어 내는 캠페인이었다.
24시간 이내에 하나의 캠페인을 기획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를 완성한다는 기쁨이 더 컸다. 밤새 발표 자료를 만들고 PT 연습을 하며, 우리는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달렸다.
재밌는 광고는 바로 지금, 여기에
다음 날 점심, 6명의 오길비 심사위원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앞단의 인사이트를 들으며, 심사위원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이디어가 무엇일지 기대하는 게 느껴졌다. 화면 가득 등을 드러낸 남자의 티셔츠 착용샷이 떴을 때,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깔깔 웃었다. 우리만 웃긴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에 힘을 얻어 열심히 PT를 마쳤다.
“정말 심플하고, 강력한 아이디어네요. 직관적이고 재밌었어요.” 심사위원의 칭찬과 함께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아쉽게도 우리는 18팀 중 5팀을 뽑는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1등은 시드니 팀의 ‘SKIN ISLAND’에게 돌아갔다. 피부 이식이 필요한 것과 동일한 면적의 섬을 사서, 피부 기증자들을 위한 ‘천국도’ 를 만들겠다는 내용의 캠페인이었다. 인기상은 도쿄 팀의 ‘LIGHT MESSAGE’가 받았는데, ‘등 피부’를 매체로 삼았다는 점에서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들은 태국에서 등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해변이라는 얘기를 하며, 파라솔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그 아래 누워있는 사람들의 등에 햇빛으로 QR코드와 메시지를 나타나게 하는 재미있는 캠페인을 기획했다. 같은 인사이트에서 이렇게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참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모두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우승팀을 축하했으며, 각자의 아이디어를 소개하며 참 흥미롭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수상의 영예가 없어도 괜찮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오랜만에 가슴 뛰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무엇보다 ‘재밌는 광고’에 대한 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았다. 재밌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선 만드는 사람부터 즐거워야 하고 그 즐거움은 남들의 멋진 레퍼런스가 아닌, 가장 우리다운 모습에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재미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