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나'로 태어난 사람.
기억의 수첩을 뒤적여 본다. 맨 첫 장엔 무엇이 쓰여 있을까. 후뢰시맨 가면을 쓰고 엑스칼리버 장난감을 휘두르던 아이. 다섯 살 첫 기억에서 나는 악의 세력에 맞서는 정의로운 용사이자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좀 더 커서 마왕을 단칼에 썰어버릴 줄 알았던 나는, 거울 속 빨갛게 올라온 여드름 하나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른이 됐다. 정의로움으로 세상을 밝힐 줄 알았던 나는, 블로그 게시글 원고료를 와이프 몰래 꽁치는 어른이 됐다.
모든 아이는 주인공으로 태어나 그저 그런 어른이 된다.
다만 그 변절 된 마음을 다시 꼬물꼬물 펴면서, '이 세상'만큼은 내가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두 손을 모아 컨트롤러를 잡는다. 기억의 맨 첫 장에서 나 대신 눈 감은 아이. 그 정의로운 다섯 살 아이를 기리면서.
출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중에
기억 파편의 링크를 찾아.
100년 만에 눈 뜬 나는, 벌거벗은 소년의 몸으로 세상과 마주한다. 나의 이름은 링크. 세상의 이름은 하이랄.
링크는 하이랄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고 성장하며 힘을 키워 나간다. 100년 전 기억을 조각조각 모으며 본래 능력을 되찾아 간다. 한 아이의 독백극처럼 시작됐던 모험은 사건과 사건의 연결고리를 이어가며 한 줄기 서사가 되고, 그 스토리라인의 폐곡선 위에는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호수처럼 드리우게 된다.
젤다. 100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링크를 깨운 존재. 이 세계로 나를 처음 부른 그 목소리의 '주인공'.
이 게임의 이름은.
젤다. 퇴마의 능력을 계승한 공주. 홀로 악전고투하다가 마왕과 함께 스스로를 봉인하고, 링크가 깨어나길 100년 동안 기다린 존재. 난 소년용사 링크의 몸으로 500시간 넘게 하이랄 대륙을 뛰어다녔지만, 내 수많은 발자국이 닿을 수 없는 곳조차 젤다의 사투로 가득했다.
자신의 무능함. 그로 인한 좌절감. 링크에 대한 열등감. 학자로서 살고 싶은 꿈. 공주로서 살아야 하는 책임감. 나의 500시간을 찰나로 만들어버리는 젤다의 100년이 여기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 게임은 내게 '링크로서' 맘껏 뛰어놀 자유를 주었고 '주인공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도 주었지만, 이미 그곳엔 '진짜 주인공'인 젤다의 서서가 거스를 수 없는 대하처럼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내가 게임을 끄고 컨트롤러를 내려두어도 계속될 '진짜 주인공'의 무대였다.
그래서 이 게임은 '링크'로 플레이 되지만, 이 게임의 이름은 영원히 <'젤다'의 전설>인 것이다.
출처: 링크의 기억 속. 마왕의 침공에 대비하던 중 좌절하는 젤다
35년. 플레이 후기.
삶이란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아가는 과정. 자신이 그저 '보통의 존재'임을 깨닫고 공포에 휩싸였던 이석원 작가의 경험이, 이젠 전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때론 후뢰시맨 가면을 쓰고 장난감 칼을 붕붕 휘두르며 사직서를 내던지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순 없다는 걸. 이젠,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니 낡은 수첩은 그만 어루만지고, 내게 주어진 짧은 500시간의 플레이 타임을 맘껏 누려야겠다. 이 세상이, 여기 하이랄 대륙이, '가짜 주인공'인 나의 이름으로 아로새겨질 리 만무하지만.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내 삶의 플레이어'로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나만의 '젤다'를, 조금씩 지켜 나가야겠다.
지키는 김에 꽁친 원고료도 같이 지켜 나가고 싶다. 가급적으로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