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다
광고계동향 기사입력 2024.06.19 03:03 조회 457
광고회사의 생존 및 지속가능성까지 저해하는 대행 요구 없어져야
글 AdManAlive

어릴 적, 셸 실버스타인의 책을 무척 좋아했다. 재미있는 일러스트와 재치있고 인사이트 넘치는 글들은 청소년기 나의 감수성을 채워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의 책 중,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대중적으로도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나무는 어린 시절부터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줬다. 언제나 나무가 베푸는 혜택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받기만 했던 소년은 오랜 시간이 지나 노인이 되어 돌아와서도 나무가 제공하는 그루터기를 그저 ‘이용’한다. 과연 세상사에서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 더욱이 비즈니스 관계에서라면?

우리나라에는 하도급법이란 것이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에는 법의 취지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이 법은 공정한 하도급거래질서를 확립하여 원사업자(原事業者)와 수급사업자(受給事業者)가 대등한 지위에서 상호보완하며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광고산업 역시 엄연히 대한민국의 법적 테두리 속에 있으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산업 가운데 하
나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광고업계는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가 대등한 지위에서 상호보완하며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제정된 이 하도급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법령을 광고산업에 적용해 보면 원사업자는 광고주, 수급사업자는 광고회사를 비롯, 광고주로부터 관련 업무를 의뢰 
받아 광고 캠페인을 기획, 제작하고 광고 매체에 집행, 운영하는 다양한 회사들에 해당한다. 제조, 유통을 비롯한 대부분의 산업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발주하는 갑의 입장과 납품하는 을의 입장은 명백히 다르다. 갑은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품질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 노력하며, 을은 경쟁력 있는 제품 및 서비스를 가지고 높은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품질이건, 가격이건 최적의 합의점을 찾아 상호보완하며 균형있게 발전하는 것이 하도급법에 준하는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고산업에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흔히 말하는 ‘갑질’은 외형적인 폭언이나, 과도한 업무요청, 연휴 직후 경쟁 프레젠테이션 일정과 같은 유형도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광고회사의 생존 및 지속가능성을 저해하는 영역에서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갑질’은 광고회사의 주 수 익원인 매체 수수료나 광고 제작비 등을 최저가 낙찰 방식으로 경쟁시킴으로써 더 이상 수급사업자들의 회사 운영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낮추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경쟁 PT에서 1위 업체를 우선협상자로 선정하고, 재차 2위 업체와 추가적인 단가 경쟁을 시킴으로써 수수료와 제작비를 한 번 더 낮추도록 압박하는 방식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광고회사의 업무 대가로 대부분 매체수수료(Commission) 지급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전략이나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운영에 대한 각종 인력투입 대가로, 집행되는 매체비의 일부를 수수료의 형태 로 받는 것이다.

최근 디지털 매체에서는 수수료 대신 매체비에 추가적인 수익을 얹어 청구하는 마크업(Markup) 방식이 적용되기도 하나 이것 역시 광고회사의 투입인력과 비용, 시간에 기준하는 대가 산정방식이 아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투입인력 기준의 피(Fee) 제도가 정착되어 있고, 인센티브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더욱 정교화되고 있으나 세계 10위 광고 대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수십 년 전의 수수료 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문제는 그나마 업계 표준으로 인정되어 온 수수료율이 광고주들의 인하요구와 함께 수수료를 스스로 낮추어서라도 업무를 수주하려는 일부 광고회사의 일 
탈로 인해 바닥을 모를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고주 업종에 따라서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디지털 광고비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매체비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더 낮은 수수료율을 광고회사 선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채택된 수수료율은 다음 해 수수료율 인하의 기준이 되며, 구매팀은 매해 더 낮은 수수료를 KPI로 삼기 때문에 광고대행 수수료는 이미 한자리 수 단위로 내려간 지 오래됐고, 어떤 경우는 마이너스 수수료를 요구 또는 제안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업계에 잘 알려진 사례를 하나 예로 들어보자. 단일 광고주로는 매우 큰 규모의 연간예산을 가진 광고주가 경쟁PT를 진행했다. 그러나 선정된 광고회사가 광고주가 요구하는 전담인력과 수수료 조건을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수익은 고사하고 엄청난 규모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판단되어 스스로 광고주 업무 수행을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 광고회사는 인력과 비용을 집중해서 해당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이미 확정된 엄청난 규모의 영업 손실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레퍼런스를 쌓거나, 해당 업종 광고물량을 끌어와 규모의 경제를 만든다는 명목하에 손실을 감수해가더라도 업무를 수주하겠다는 다른 광고회사가 있다는 것이다. 광고주 입장에서는 더 낮은 수수료 조건도 수용하려는 대안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수수료 인하에 대한 광고회사의 이슈 제기를 모른 척하게 되는 것이다.

광고업계가 많이 어렵다. 광고계 지인들을 만나면 이제 바닥을 모를 정도로 추락한 수수료율 인하 요구는 업무 수행
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됐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주 모르게 담당 업무를 중복시키거나 주니어 멤버들로 대응하면서 버티는 경우가 많지만, 이제는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광고회사 더 나아가 광고업계 존폐의 위기까지 치닫고 있다. 무리한 수수료 인하 요구는 결국 광고 캠페인의 퀄리티는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경험이 부족한 주니어들 중심의 운영에는 늘 사고가 뒤따른다. 광고 회사에게 지불하는 수수료를 낮추는 것이 광고주의 성과이며 이를 마케팅 및 광고비의 절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브랜드 차원에서 보면 스스로 광고 퀄리티 저하와, 잠재적 브랜드 리스크를 점점 더 키워가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다 잘린 뒤 그루터기마저 소년에게 제공했지만… 사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에 불과했다. 더 이상 소년에게 유무형의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광고회사 역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내주다 보면 광고주는 그네를 걸 수 있는 가지도, 사과도, 집을 지을 나무도 더 이상 제공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adz ·  5/6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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