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하나 / 칼럼니스트. 도쿄에서 일하며 유튜브 <우주라떼>를 운영한다. 저서 <2024/2025 일본에서 유행하는 것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에게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고, 교세라의 창립자인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에게는 <논어>가 그랬다. 대학생 때부터 17년간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제인 구달이 쓴 <희망의 밥상>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단순한 종이뭉치가 저자의 삶과 영혼의 목소리로 변환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명언이 얼마나 깊은 울림을 주는지 통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출판사의 미덕이란 정성껏 만든 좋은 책 한 권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직원이 진심으로 영업하고 많이 팔리길 기원하는 책 말이다. 출판사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싶은 소리 같지만 그게 또 현실적으로 마냥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일본의 출판사인 미시마샤(ミシマ社)가 출판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시마샤에서 제작한 서적들 / 출처 mishimasha-books.shop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2006년에 설립된 미시마샤는 ‘원점회귀(原点回?) 하는 출판사’라는 이념 아래 ‘일책입혼(一冊入魂)’, 즉 ‘한 권의 책에 영혼을 담는’ 출판 사업을 펼치고 있다. 대표인 미시마 쿠니히로의 1인 출판사로 시작해 현재는 10명 내외의 직원들과 연간 20권 정도의 책을 출간한다. 한 달에 1.6권 꼴로 책을 만드는 셈인데, 업계 평균으로 보자면 직원 수 대비 연간 출간 권수가 3분의 1 수준으로 적다. 두 곳의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미시마 대표는 ‘출판사는 한 권의 책에 얼마큼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만들었다’는 사실이 ‘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압도해버리는 업계의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출판사 미시마샤가 일하는 법을 담은 책이 한국에서도 출간됐다. / 출처 mishimaga.com
최근 일본에서는 출판 사이클이 빨라져 책의 내용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출간 종 수를 늘려 매출을 보완하려는 출판사가 늘어 독자들 또한 책 한 권을 천천히 음미할 시간이 없다. 이에 미시마 대표는 저자의 가치 있는 생각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출판사의 기본자세, 즉 ‘원점’으로 보고, 책의 기획부터 서점에 입고되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 영혼을 담는 것을 경영 철학으로 내세우게 됐다. 다소 극단적인 ‘양보다 질’ 혹은 ‘장인정신’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는 설립 초기에 ‘절판될 책은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책에 대한 열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비효율이 효율을 낳다
미시마샤의 직원들은 기획, 편집, 디자인, 영업 등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한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 영업사원이지만 편집도 하고, 편집자가 영업도 뛰는 ‘멀티플레이어’가 됨으로써 책의 내용을 숙지하고 독자 및 서점과의 소통 방안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그저 실적을 채우기 위한 영혼 없는 영업이 불가능하다. 애당초 신간마다 끼워 넣는 홍보용 광고지 <미시마 통신>도 그 책에 맞춘 내용으로 따로 제작할 정도다. 업계에서 드물게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린 디자인으로 마치 친구에게 엽서를 받는 듯한 친근함이 느껴지고 수집욕을 자극한다는 호평이 자자하다.
미시마샤는 직원이 직접 발로 뛰며 책과 관련한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한다. (위부터 시계 방향) 목욕탕에서 열린 목욕 관련 도서 팝업, 콜라보 카페 메뉴 판매, 그림책 정기구독 서비스, 에세이 문구 전시, 지역 북페어 참석 / 출처 @mishimasha_books
일본의 출판업계는 한날한시에 전국 어디에서나 같은 가격으로 신간을 판매할 수 있는 배본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바로 대형 도매업체를 통한 위탁판매 혹은 자동배본이다. 하지만 미시마샤는 그 효율적인 시스템을 거부하고 유통 과정에서도 ‘일책입혼’을 고수한다. 도매업체를 거치지 않고 미시마샤가 직접 대형 서점 및 동네 책방에 일일이 책을 영업해 주문받은 부수만큼 책을 보내는 직거래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위탁판매든 직거래든 책이 서점에 깔린다는 결과는 같은데, 대체 왜 굳이 품이 많이 드는 직거래를 택했을까?
미시마 대표의 말에 따르면 ‘책이 서점에 진열되는 과정 속에 출판사와 서점 상호 간의 의지가 담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왠지 고지식하고 비효율적인 방법 같아 보이지만, 미시마샤는 그런 식으로 서점과 교류하며 돈독한 관계를 쌓고 나아가 혼신을 다한 책을 통해 독자들과 교류하며 충성 독자층을 확보했다. 이렇게 ‘원점회귀’하는 출판 사업에 대해 미시마 대표는 ‘비효율이 최종적으로는 효율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재미있게, 진심으로
미시마샤의 뚝심 있는 행보를 지속가능하게 한 건 2013년부터 도입된 ‘미시마샤 서포터즈’라는 제도다. 미시마샤를 응원하고 싶은 독자가 1년간 일정액(33,000엔/110,000엔/165,000엔 세 종류가 있다)을 후원하면 신간이나 잡지, 온라인 행사 참여 같은 특전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멤버십 프로그램이다. 독특한 방식의 출판 사업을 지원받기 위해 시작한 제도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있다.
매월 서포터들에게만 발행되는 <서포터즈 신문>에는 미시마 대표의 짧은 글을 비롯해 한 권의 책을 다듬어가는 과정, 인쇄 제본 과정 등 종이책을 만드는 현장의 생생한 정보와 출판사 운영에 대한 리얼한 속사정이 실려있다. 그런 거짓 없는 태도가 미시마샤를 묵묵히 지지하는 수백 명의 서포터들을 사로잡았다.
2013년에 시작한 미시마 서포터 제도. 가입하면 1년 동안 매월 서포터 신문, 잡지, 신간을 받아볼 수 있다. / 출처 mishimaga.com
독서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종이값은 상승하며 출판 불황기가 계속되고 있는 요즘, 괴로움과 냉엄함을 겪으며 편집자 시절을 보낸 미시마 대표의 신조는 ‘명랑하게 지내기’다. 또한 그가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재미’다. 미시마샤는 좀 더 재미있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도쿄와 교토 두 곳에 거점을 두고 오래된 주택을 오피스로 삼았다. 직원들은 일상 속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매주 둥근 좌식 밥상을 펼쳐놓고 회의를 한다.
덕분에 미시마샤가 출간하는 책들은 테마, 제본, 디자인 등에 한 끗 다른 디테일이 있다. 하나같이 독특하고 흥미로워 신간이 나오면 직접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재미있는 일을 재미있게 진심으로’ 하는 기조 덕분에 미시마샤는 소규모 출판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스다 미리, 우치다 다쓰루 등 인기 작가들과도 협업이 끊이지 않는다.
한 권의 책에 담긴 가치에 집중하고, 그 가치를 전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는 것. 이 당연한 미덕을 지속하기 위해 작고 단단하고 특별해질 수밖에 없었던 출판사. 이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미시마샤의 이념은 무엇이든 쉽고 빠르게 소비되는 것들로 가득한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진정한 본질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