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선 프로 | 제일기획 BTL 캠페인팀
예술 창작에서는 어떤가?
<바람불어 좋은 날>이라는 소설(영화)에서 바람은 생활 속의 여러 어려움에 대한 메타포로 나타나고,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의 곁을 바람처럼 덧없이 떠나고 만다.
이렇게 바람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바람을 형상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는 의심의 여지없이 깃발이라 할 것이다.
깃발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시각 미디어로, 한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전장에서의 승리를, 만선의 기쁨을 표시하는 데 쓰였다.
새로 획득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선양하기 위해 꽂았던 것도 다름 아닌 깃발이었다. 지금은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는 1.5m의 나일론 깃발을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도 천신만고 끝에 달표면에 성조기라는 이름으로 꽂지 않았나.
또한, 목숨을 구하기 위한 항복의 표시를 위해 하얀 깃발을 흔들었고, 죽음이나 슬픈 사연을 애도하는 만장도 깃발의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청마(靑馬) 유치환은 깃발을 가리켜‘소리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품격 갖추어 노래했다. 깃발은 이렇게 색과 의미와 사연을 가득 품고 바람을 타며 살다, 결국 바람에 바래어 닳아 없어진다.
이러한 깃발과 바람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2010 새만금 깃발 축제는 발상되었고, 만들어졌다.
새만금방조제 준공의 의미
새만금 사업은 주지하듯이 20여 년 전 첫 삽을 뜬 대역사이다. 우리나라 4000 만 국민 한 사람 당 세 평씩 새로운 땅이 생긴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땅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새로운 땅을 만들어 국경을 넓히는 일이니, 목숨 걸고 매달려야 할 중대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국토개발에 대한 평가가 진화하고 보존을 중시하는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표출되면서 사업은 난항을 겪게 된다.
이후 여러 법률적 장치 마련과 의견 조율을 통해 공사가 어렵사리 진행되었고, 마침내 2010년 4월 공사 시작 19년 여 만에 방조제를 완공하였다.
전라북도 입장에서 새만금 사업은 어떠한가?
도의 미래를 걸만큼 중차 대한 사업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라북도는 여러 준비를 하게 된다. 시설적인 측면 외에 중요한 일이 도민, 국민,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는 홍보작업이다.
도민들에겐 하부 지자체별로 득실이 달라 이에 대한 이해와 조율이 필요하다.
전 국민에게는 환경 친화적인 측면의 메시지와 더 큰 대한민국의 메시지의 균형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방조제 준공은 더할나위 없는 계기를 제공하는 셈.
2008년 여름, 제일기획은 전라북도에 새만금 사업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 컨설팅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서 새만금 사업을 위해 좀 더 친숙한, 호의적인 이미지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차원에서 새만금 이미지를 입체화하고 일반화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찾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문화마케팅 방안이 제안되었다.
새만금이 단순히 지리적인 확장, 경제적인 기여를 넘어서 한국, 더 나아가 동북아와 전 세계를 향한 문화 발신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자는 제안(Proposal). 그리고, 방조제 준공이라는 이슈가 더해져 문화축제의 필요성은 급물살을 타고 공유되었다.
전라북도 외에 총리실·문광부·농림부 등 유관기관이 협조하여 행정 및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하였고, 우리는 축제의 여러 포맷을 스터디했다.
어떤 축제가 좋을까?
통상 지역에서 준비하는 축제나 엑스포의 경우, 대부분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자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문화자산이던 자연물이던 지역활성화에 기여하고, 직접적인 홍보효과를 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이미 가진 자산을 활용하는 외에 특정 장르의 문화상품이나 이슈를 소재로 쓰는 경우도 있다.
영화제 유치나 특정 산업계와의 연계나 유대를 활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새만금의 경우, 방조제 도로 외에는 이렇다 할 문화자산은 없는 형편이었다. 서해안 낙조, 트래킹 코스, 변산반도와 군산항 등은 지형적 한계가 있다.
하여, 우리는 행사장(방조제 중간지점의 신시도광장)으로 시각을 좁혀 보았다. 허허벌판의 환경은 행사에 썩 좋을 리는 없었다.
가장 전반적인 재료는 바람. 산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니 바람 잘 날이 없다. 항상 바람이 있고 가끔은 사납게도 불어댄다. 자전거·풍차·태양열 등 여러 소재에 대한 고민 후 바람과 가장잘 어울리는 깃발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깃발은 가녀린 헝겊 조각에 불과하나 깊은 사연과 의미를 효과적으로 펼칠 수 있는 훌륭한 매체이지 않은가?
유관기관·단체장 보고를통해 깃발 축제를 하기로 확정했다.
깃발로 축제를 한다는 것에 다들 익숙치는 않았으나 최초라는 의미가 작업에 탄력을 더했다. 전북 지역 특유의 전통 기(旗)놀이가 전주 기접놀이, 익산 기세배놀이 등 무형문화재 형태로 발전·전승되었다는 내용도 좋은 아이디어가 되었다.
‘생명의 바람, 희망의 깃발’이라는 축제 슬로건을 정하고, ‘세계 최대의 깃발 판타지’를 소구 포인트로 하여 여러 상징을 가공했다. 방조제 길이인 33km에서 숫자 상징을 채용하여, 메인 작품인 희망나무 조형물을 가로 세로 33m 대규모 크기로 설치했다.
희망나무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33만 개의 리본에 소원을 적어 매달아 조형하는 과정예술물로, 이번 축제의 핵심 콘텐츠이다.
그리고, 새만금개발의 주요 아젠다를 소재로 콘텐츠를 구성하니, 물의 정원, 대지의 문, 바람의 언덕 등이 형성되었다. 각각은 수변도시, 문화레저도시, 국제화거리 등 새만금신도시의 미래상을 담는 것이다.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
기획은 끝나고, 이제는 실행.
여러 보고 과정에서 유관단체장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름다워야 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문이었으나, 현장 여건을 감안하면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할 무거운 지침이기도 한 셈.
우리는 깃발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설치미술과 평면미술의 중간, 개인작업과 공동작업의 혼용, 결과물 전시와 과정미술의 중간형태일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모든 스태프들은 실행과정에서‘우리가 좀 고상했었구나’라는 오류를 깨달아야 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문화예술이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 바람과의 전쟁임을. 이 글을 깃발이 아닌 바람으로 시작해야 했던 절절한 이유이다.
천안함 사태 등 외부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렵사리 뒤늦게 행사 개막일을 정했다.
애도의 뜻을 함께 하기 위해 배치 계획도 변경했다. 다소 특이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물자 조달, 현장 여건 등 비교적 까다로운 과정을 겪어 가며 제작이 진행됐다.
최초 장소 답사 이후 두 달 여의 현장준비 끝에 전시장을 완공하는 시점.
4월27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준공식 직후 전시장 개막이다. 개막 이틀 전부터 비가 오더니 하늘 색이 심상치 않게 바뀐다.
준공식은 큰 탈 없이 잘 끝났으나 바람때문에 여러 우여곡절을 심하게 겪었다.
이 날, 날씨도 춥고 바람도 강해 사람은 많이 들지 않았고, 강풍 때문에 시설 여러 군데가 손상을 당해 그 보수공사가 시급했다.
깃발을 날리기 위한 바람은 이제 15m/s을 넘어서 아예 모든 시설물을날려 버릴지 모를 상황. 풍속이 이윽고, 의미심장하게도 17.65m/s 를 넘어섰다 는 소식이 들린다. 익숙한 숫자이지만, 풍속에 적용되니 여간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다
좀 보태어 말하면 컨테이너 사무실도 기우뚱거린다. 현지 출신 스태프들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상투적 표현….
“ 내 평생 이런 바람은 처음이여”라는 내레이션과 불안한 음악, 그리고 바람소리. 다음날, 바람은 더 강해져 결국 오후에는 급기야 행사를 일시 중단해야 했다.
제일기획이 준비했던 시설물에 결정적 피해가 없어 그나마 고마운 대목이었다. 스태프들이 다들 고생하는 가운데 대자연의 위력 앞에 진지해진 서로를 확인하였다. 일하면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시퀀스.
이 날 이후 상황은 호전되어 원래 의도되었던 그림새로 바뀌어 갔다.
바람이 자고, 해가 뜨니 어제까지 불었던 광풍은 기억 속에서도 가물해져 갔다.
젖어서 축 처져 있던 깃발들은 그새 물기를 털어내어 다시 활기차게 펄럭이고, 관객들을 가득 싣고 들어서는 색색의 버스는 행사장에 활력을 보탠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드라마 등 다각적인 PPL 등을 통해 직간접적인 홍보를 하고, 기존 관광객 들을 안내하여 유도한 결과 성공적인 집객으로 연결, 당초 집객 목표인 12만 명 을 상회하여 30여 만 명이 행사장을 다녀갔다.
주말에는 군산과 부안의 도로교통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전라북도 내 14개 시군구를 대표하여 나선 식음료 판매 부스는 미어터질 정도로 영업이 잘 되었다.
속칭 대박이다. 홍보를 목적으로 하다보니 티켓판매나 협찬, 부스 판매 등의 사업 개념은 도입되질 않았는데, 만일 사업 목적으로 수익활동을 병행했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 랜드마크로 성장하기 위한 새만금의 첫 단추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겼을까?
되짚어보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시작을 만들기는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리라.
그런 측면에서 이번 새만금 깃발 축제는 다들 합심하여 맨바닥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했다는면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새만금이 땅과 경제만 넓힌 것이 아니라 문화의 지평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깃발 축제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또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토양을 갖추었다.
계속 매립이 진행되면 어떤 땅에서 어찌할지 고민은 다시 해 봐야겠으나, 무에서 유를 만들었으니 유지하기는 그나마 쉽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체감(體感)의 항목이다. 여러 스태프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바위, 자갈밭을 뛰어다니며 미리 잔바람을 맞아 준 덕에 큰 바람을 버텨낼 수 있었다.
사무실과 책상에서만 계획하고 준비했다면 놓치기 쉬운 항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좁은 나라이다. 계속 땅을 넓히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그런 에너지가 필요한 국가.
그래서, 새로운‘땅’을 만드는 국가 정책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여러 형태의 땅도 새로 생기고, 도시도 탄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토목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소프트웨어적인 접근이 절실하다.
도시·단지개발 영역에서 토목·건축·건설 외에 콘텐츠 기획, 문화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수요가 점증하는 이유이다.
인천 송도에서도 그랬고, 전북 새만금에서도 그랬고, 새로 계획되어 태어나는 도시들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니, 당연히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메가트렌드를 감안한다면, 우리도 도시와 공간의 이야기를 만들고, 문화영토를 간척해내는 능력을 각자 시급히 배양하고 계발하여 시장을 만들고 리드해야 할 것이다.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그 속의 더 큰 제일기획의 영토를 위해.
예술 창작에서는 어떤가?
<바람불어 좋은 날>이라는 소설(영화)에서 바람은 생활 속의 여러 어려움에 대한 메타포로 나타나고,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의 곁을 바람처럼 덧없이 떠나고 만다.
이렇게 바람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바람을 형상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는 의심의 여지없이 깃발이라 할 것이다.
깃발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시각 미디어로, 한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전장에서의 승리를, 만선의 기쁨을 표시하는 데 쓰였다.
새로 획득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선양하기 위해 꽂았던 것도 다름 아닌 깃발이었다. 지금은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는 1.5m의 나일론 깃발을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도 천신만고 끝에 달표면에 성조기라는 이름으로 꽂지 않았나.
또한, 목숨을 구하기 위한 항복의 표시를 위해 하얀 깃발을 흔들었고, 죽음이나 슬픈 사연을 애도하는 만장도 깃발의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청마(靑馬) 유치환은 깃발을 가리켜‘소리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품격 갖추어 노래했다. 깃발은 이렇게 색과 의미와 사연을 가득 품고 바람을 타며 살다, 결국 바람에 바래어 닳아 없어진다.
이러한 깃발과 바람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2010 새만금 깃발 축제는 발상되었고, 만들어졌다.
새만금방조제 준공의 의미
새만금 사업은 주지하듯이 20여 년 전 첫 삽을 뜬 대역사이다. 우리나라 4000 만 국민 한 사람 당 세 평씩 새로운 땅이 생긴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땅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새로운 땅을 만들어 국경을 넓히는 일이니, 목숨 걸고 매달려야 할 중대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국토개발에 대한 평가가 진화하고 보존을 중시하는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표출되면서 사업은 난항을 겪게 된다.
이후 여러 법률적 장치 마련과 의견 조율을 통해 공사가 어렵사리 진행되었고, 마침내 2010년 4월 공사 시작 19년 여 만에 방조제를 완공하였다.
전라북도 입장에서 새만금 사업은 어떠한가?
도의 미래를 걸만큼 중차 대한 사업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라북도는 여러 준비를 하게 된다. 시설적인 측면 외에 중요한 일이 도민, 국민,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는 홍보작업이다.
도민들에겐 하부 지자체별로 득실이 달라 이에 대한 이해와 조율이 필요하다.
전 국민에게는 환경 친화적인 측면의 메시지와 더 큰 대한민국의 메시지의 균형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방조제 준공은 더할나위 없는 계기를 제공하는 셈.
2008년 여름, 제일기획은 전라북도에 새만금 사업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 컨설팅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서 새만금 사업을 위해 좀 더 친숙한, 호의적인 이미지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차원에서 새만금 이미지를 입체화하고 일반화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찾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문화마케팅 방안이 제안되었다.
새만금이 단순히 지리적인 확장, 경제적인 기여를 넘어서 한국, 더 나아가 동북아와 전 세계를 향한 문화 발신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자는 제안(Proposal). 그리고, 방조제 준공이라는 이슈가 더해져 문화축제의 필요성은 급물살을 타고 공유되었다.
전라북도 외에 총리실·문광부·농림부 등 유관기관이 협조하여 행정 및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하였고, 우리는 축제의 여러 포맷을 스터디했다.
어떤 축제가 좋을까?
통상 지역에서 준비하는 축제나 엑스포의 경우, 대부분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자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문화자산이던 자연물이던 지역활성화에 기여하고, 직접적인 홍보효과를 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이미 가진 자산을 활용하는 외에 특정 장르의 문화상품이나 이슈를 소재로 쓰는 경우도 있다.
영화제 유치나 특정 산업계와의 연계나 유대를 활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새만금의 경우, 방조제 도로 외에는 이렇다 할 문화자산은 없는 형편이었다. 서해안 낙조, 트래킹 코스, 변산반도와 군산항 등은 지형적 한계가 있다.
하여, 우리는 행사장(방조제 중간지점의 신시도광장)으로 시각을 좁혀 보았다. 허허벌판의 환경은 행사에 썩 좋을 리는 없었다.
가장 전반적인 재료는 바람. 산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니 바람 잘 날이 없다. 항상 바람이 있고 가끔은 사납게도 불어댄다. 자전거·풍차·태양열 등 여러 소재에 대한 고민 후 바람과 가장잘 어울리는 깃발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깃발은 가녀린 헝겊 조각에 불과하나 깊은 사연과 의미를 효과적으로 펼칠 수 있는 훌륭한 매체이지 않은가?
유관기관·단체장 보고를통해 깃발 축제를 하기로 확정했다.
깃발로 축제를 한다는 것에 다들 익숙치는 않았으나 최초라는 의미가 작업에 탄력을 더했다. 전북 지역 특유의 전통 기(旗)놀이가 전주 기접놀이, 익산 기세배놀이 등 무형문화재 형태로 발전·전승되었다는 내용도 좋은 아이디어가 되었다.
‘생명의 바람, 희망의 깃발’이라는 축제 슬로건을 정하고, ‘세계 최대의 깃발 판타지’를 소구 포인트로 하여 여러 상징을 가공했다. 방조제 길이인 33km에서 숫자 상징을 채용하여, 메인 작품인 희망나무 조형물을 가로 세로 33m 대규모 크기로 설치했다.
희망나무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33만 개의 리본에 소원을 적어 매달아 조형하는 과정예술물로, 이번 축제의 핵심 콘텐츠이다.
그리고, 새만금개발의 주요 아젠다를 소재로 콘텐츠를 구성하니, 물의 정원, 대지의 문, 바람의 언덕 등이 형성되었다. 각각은 수변도시, 문화레저도시, 국제화거리 등 새만금신도시의 미래상을 담는 것이다.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
기획은 끝나고, 이제는 실행.
여러 보고 과정에서 유관단체장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름다워야 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문이었으나, 현장 여건을 감안하면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할 무거운 지침이기도 한 셈.
우리는 깃발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설치미술과 평면미술의 중간, 개인작업과 공동작업의 혼용, 결과물 전시와 과정미술의 중간형태일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모든 스태프들은 실행과정에서‘우리가 좀 고상했었구나’라는 오류를 깨달아야 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문화예술이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 바람과의 전쟁임을. 이 글을 깃발이 아닌 바람으로 시작해야 했던 절절한 이유이다.
천안함 사태 등 외부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렵사리 뒤늦게 행사 개막일을 정했다.
애도의 뜻을 함께 하기 위해 배치 계획도 변경했다. 다소 특이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물자 조달, 현장 여건 등 비교적 까다로운 과정을 겪어 가며 제작이 진행됐다.
최초 장소 답사 이후 두 달 여의 현장준비 끝에 전시장을 완공하는 시점.
4월27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준공식 직후 전시장 개막이다. 개막 이틀 전부터 비가 오더니 하늘 색이 심상치 않게 바뀐다.
준공식은 큰 탈 없이 잘 끝났으나 바람때문에 여러 우여곡절을 심하게 겪었다.
이 날, 날씨도 춥고 바람도 강해 사람은 많이 들지 않았고, 강풍 때문에 시설 여러 군데가 손상을 당해 그 보수공사가 시급했다.
깃발을 날리기 위한 바람은 이제 15m/s을 넘어서 아예 모든 시설물을날려 버릴지 모를 상황. 풍속이 이윽고, 의미심장하게도 17.65m/s 를 넘어섰다 는 소식이 들린다. 익숙한 숫자이지만, 풍속에 적용되니 여간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다
좀 보태어 말하면 컨테이너 사무실도 기우뚱거린다. 현지 출신 스태프들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상투적 표현….
“ 내 평생 이런 바람은 처음이여”라는 내레이션과 불안한 음악, 그리고 바람소리. 다음날, 바람은 더 강해져 결국 오후에는 급기야 행사를 일시 중단해야 했다.
제일기획이 준비했던 시설물에 결정적 피해가 없어 그나마 고마운 대목이었다. 스태프들이 다들 고생하는 가운데 대자연의 위력 앞에 진지해진 서로를 확인하였다. 일하면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시퀀스.
이 날 이후 상황은 호전되어 원래 의도되었던 그림새로 바뀌어 갔다.
바람이 자고, 해가 뜨니 어제까지 불었던 광풍은 기억 속에서도 가물해져 갔다.
젖어서 축 처져 있던 깃발들은 그새 물기를 털어내어 다시 활기차게 펄럭이고, 관객들을 가득 싣고 들어서는 색색의 버스는 행사장에 활력을 보탠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드라마 등 다각적인 PPL 등을 통해 직간접적인 홍보를 하고, 기존 관광객 들을 안내하여 유도한 결과 성공적인 집객으로 연결, 당초 집객 목표인 12만 명 을 상회하여 30여 만 명이 행사장을 다녀갔다.
주말에는 군산과 부안의 도로교통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전라북도 내 14개 시군구를 대표하여 나선 식음료 판매 부스는 미어터질 정도로 영업이 잘 되었다.
속칭 대박이다. 홍보를 목적으로 하다보니 티켓판매나 협찬, 부스 판매 등의 사업 개념은 도입되질 않았는데, 만일 사업 목적으로 수익활동을 병행했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 랜드마크로 성장하기 위한 새만금의 첫 단추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겼을까?
되짚어보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시작을 만들기는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리라.
그런 측면에서 이번 새만금 깃발 축제는 다들 합심하여 맨바닥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했다는면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새만금이 땅과 경제만 넓힌 것이 아니라 문화의 지평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깃발 축제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또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토양을 갖추었다.
계속 매립이 진행되면 어떤 땅에서 어찌할지 고민은 다시 해 봐야겠으나, 무에서 유를 만들었으니 유지하기는 그나마 쉽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체감(體感)의 항목이다. 여러 스태프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바위, 자갈밭을 뛰어다니며 미리 잔바람을 맞아 준 덕에 큰 바람을 버텨낼 수 있었다.
사무실과 책상에서만 계획하고 준비했다면 놓치기 쉬운 항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좁은 나라이다. 계속 땅을 넓히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그런 에너지가 필요한 국가.
그래서, 새로운‘땅’을 만드는 국가 정책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여러 형태의 땅도 새로 생기고, 도시도 탄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토목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소프트웨어적인 접근이 절실하다.
도시·단지개발 영역에서 토목·건축·건설 외에 콘텐츠 기획, 문화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수요가 점증하는 이유이다.
인천 송도에서도 그랬고, 전북 새만금에서도 그랬고, 새로 계획되어 태어나는 도시들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니, 당연히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메가트렌드를 감안한다면, 우리도 도시와 공간의 이야기를 만들고, 문화영토를 간척해내는 능력을 각자 시급히 배양하고 계발하여 시장을 만들고 리드해야 할 것이다.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그 속의 더 큰 제일기획의 영토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