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과 철학적 인식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최첨단 기기나 소프트웨어만을 비유하지 않는다. 물론 가상현실은 1968년 서덜랜드(I. Sutherland)가 사이버 헬멧을 쓰면서 등장했기에,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인문학자들은 그 영향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소설 『뉴로맨서』(1984)에서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하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묘사했다. 주인공은 의식을 육체로부터 분리시켜 의식 세계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그러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레니어(J. Lanier)는 1980년대 VR용 장갑과 헬멧, TV용 가상카메라, 영화용 3D를 개발하면서 가상현실의 상용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과학과 인문학이 상보하면서 발전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이버펑크 문학의 주제나 아이디어 수준이었다.
그러던 가상현실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확장될 수 있었던 계기는 공상과학영화의 유행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중에서 1999년에 제작된 <매트릭스> 1편이 주목을 끌었다. 그 영화는 가상현실이 실재의 시공간을 대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를 위해 영화는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기존의 세계에 정보(Information)가 제3의 물리적인 크기로 추가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앤더슨의 바이오포트에 연결된 섬세한 전선들이 대뇌피질에 연결되면, 그는 매트릭스 컴퓨터에서 주는 신호를 받는다. 디지털 정보들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은 네오(가상현실에서 앤더슨의 이름)에게 더 이상 게임이나 특수효과가 아닌 지속적인 실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러 아바타들이 공간을 나는 활극을 펼친다던가, 복제 프로그램이면서도 인간과 똑같은 외양에 지능과 언어를 구사하는 스미스 요원이 나올 수 있었다. 말하자면 매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의 말대로 인간의 능력을 모방하면서도 그보다 우월한 가상 존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 SF영화의 문제의식은 주인공이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 있는데도, 현실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철학의 가장 큰 논쟁거리인 인식의 문제, 실체의 문제, 주체의 문제를 다시 건드린다. 우리는 중국 전국시대에 장자가 말한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알고 있다.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꾼다. 꿈에서 장자는 나비로 훨훨 날아다니다가 그만 꿈에서 깬다.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난 내가 진짜인가? 아니면 꿈의 나비가 진짜 나인가?
마찬가지로 <매트릭스 1>에서도 정체성의 문제가 던져진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앤더슨이 진짜인가? 아니면 매트릭스 시스템의 에너지인 앤더슨이 진짜인가? 아니면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며 공간을 넘나드는 네오가 진짜인가?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짜 세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를 좋아하고 즐기는 다른 등장인물 사이퍼(Cypher)도 있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도록 하고 있다.
이전까지 우리는 참과 거짓에 대한 명료한 구분이 문화의 토대 중의 하나라고 이해해왔다. 그리스시대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의 6권 「통치자와 철학자」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힘으로 지성과 시각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진실성의 관점에서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인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나아가 플라톤은 같은 책 7권 「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을 죄수로 빗댄다. 죄수는 밧줄에 묶여 동굴 벽면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2 플라톤은 그림자를 시각의 대상으로 비유하면서, 인식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만을 믿고, 그것만을 진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수의 모습은 실체(이데아)가 아닌 실체의 그림자(실재)만을 참된 존재로 맹신하는 인간의 우둔함을 비유한다.
따라서 현대의 가상현실은 플라톤의 주장을 영원한 진리가 아닌 하나의 이론으로 축소할 정도로 도발적인 면을 담고 있다. 매체학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21세기에 주체와 대상, 실재와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분하려고 하는 철학적 시도를 편집증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인 이분법(물질과 정신)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주는 교차적이며 서로 얽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상현실의 의미를 기발한 착상으로 한정하지 말고 경험의 확장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이 실재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가상현실은 실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와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그리스 시대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실재를 형상과 질료로 세분한 적이 있다. 질료가 지각되지 않는 잠재태라면, 형상은 질료가 실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 개념을 통해, 우리가 과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실재가 또 있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상현실 콘텐츠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이성적이지 않음을 알아채게 된다. 먼저 현재 나온 다양한 가상현실 콘텐츠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유형화 해보자.
1. 놀이형: 사용자를 전쟁의 주체로 만들거나, 오토바이나 행글라이딩과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대신해주거나, 가보지 않은 곳 혹은 미지의 곳으로 안내해주는 콘텐츠가 있다.
2. 성찰형: 노박(M. Novak)의 <가상 수도승과 함께 춤을>(1994)처럼 수도자의 고행을 배울 수 있다. 사용자는 길을 잃은 듯한 느낌과 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에 빨려 들어가게 되면서 몰입이 심화되지만, 그만큼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행위를 한다.
3. 사회고발형: VR뉴스 <프로젝트 시리아 Project Syria>는 내전으로 붕괴된 시리아에서 그곳 사람들의 음성과 이미지를 그대로 이용한다. 평온한 거리에 갑자기 로켓포가 발사되어 아비규환의 현장이 재현된다. 그 가운데서 사용자는 끔찍한 세
상의 모습을 직접 체험하며 공분할 수 있다.
1, 2, 3은 우리의 의식을 감각적 인식에 멈추게 하면서, 흥분하게 아니면 차분하게 아니면 동정하게 한다. 현대의 심리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정신의 구조를 실재계(이드), 상상계(자아), 상징계(초자아)로 정의한 바 있다. 이드(욕구나 충동)는 보통의 의식 상태에서 억압되지만, 꿈에 나타나면서 의식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도 이성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근저에는 지각이 있고 감각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재계의 지배를 암시하고 있는 콘텐츠는 우리의 정신 구조의 토대와 관련하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의 유행은 자연스럽게 철학자들의 관심을 이끌어서, 관련한 여러 단행본과 연구논문을 나오게 한다. 그 주제 범위도 전통적인 형이상학, 인식론, 존재론 등은 물론이고 윤리학이나 불교학, 심리학 등을 아우른다. 이를테면 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소멸의 미학』(2004)에서 속도와 관련한 매체들은 인간 실존을 부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반면, 철학자 폴 레비(Paul Levy)는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2002)에서 디지털 매체의 무궁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IT기술의 총화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인 논쟁의 시작을 가져다 준 점에서 융합(Convergence)적이다.
가상현실과 시각예술의 몰입
가상현실의 실재성은 예술의 가상성과 맞물린다. 가상현실은 고도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연속되는 3차원의 그래픽이다. 현실을 시뮬레이션한 가상현실은 사용자에게 지각(Perception)되면서, 또 다른 실재로 변하는 것이다.
관람자가 시각 이미지를 실재로 착각한 일은 과거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Zeuxis)가 그린 포도를 진짜로 착각한 새가 그것을 먹으려고 날아들었다. 혹은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조각가 피그말리온(Pygmalion)에 대한 전설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아니면 관람객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이나 뮤지컬에 열광하며 사건에 몰입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술적 가상이 관람객을 백일몽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은 마치 가상현실이 사용자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과 유사하다.
20세기에 시각예술은 조형예술에만 그치지 않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방송, 영화, 게임, 가상현실 등으로 영역을 대폭 확대해 나갔다. 이런 새로운 시각예술 매체는 몰입형 미디어(Immersive media)로 정리되는데, 그 표현력, 선명함, 현실감에 있어서 이전 아날로그 매체와 크게 비교된다.
철학자 마이클 하임(Michael Heim)은 가상현실의 6가지 구성요소 중에 2가지로 몰입(Immersion)과 온몸 몰입(Full-body immersion)을 언급했다. 심지어 미학자 올리버그라우(Oliver Grau)는 몰입을 가상현실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몰입은 가상현실에 대한 이해의 핵심 키워드로 많이 읽힌다. 기술적으로 사용자에게 현장보다 더 현장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가상현실의 발전 방향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는 광학적이고 청각적 효과를 통한 몰입의 원리가 가상현실의 조건임을 입증한다. 하지만 하임은 사이버스페이스 문화에 잠재하는 탈물질화, 탈육체화가 야기할 위험성에 주목한다. 신체적 대면이 없는 가상 사회가 진짜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화시킬지는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그가 우려하고 있는 점은 가상현실이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난 세계일 뿐, 분명한 것은 지금 이곳의 현실은 아니
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을 가상으로 묶어두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를테면 거리두기(Distancing)는 사용자를 가상현실에 단순하게 몰입시키지 않도록 하는 예술기법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금 전에 언급된 라캉은 장자의 호접지몽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꿈을 꾸고 있는 나와 꿈 속의 나는 동일하다. 하지만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 것은 나이지, 나비는 아닌 것이다. 의심을 할 수 있는 내가 유일하게 꿈에서 깰 수도 있고, 현실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콘텐츠도 사용자를 환상의 세계로 도피시키는 대신에 낯선 현실을 담음으로써, 결국 사용자가 현실을 다르게 보도록 할 수 있다. 빈틈없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환상을 더욱 완벽하게 하는 가상현실을 만들기보다 거리두기 방법으로 혼합현실(Mixed Reality)을 만드는 것이다.
혼합현실과 관련해서, 문학이나 영화에서도 거리두기와 유사한 여러 실험들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하이퍼미디어 문학에서는 사용자가 작품의 빈틈에 뭔가를 채워 넣음으로써, 사용자의 지능은 향상되며, 가상현실과 현실은 구분될 수 있다. 혹은 가상현실이 하나의 스토리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지며, 이를 사용자 스스로가 선택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가상현실은 사용자를 수동적인 주체가 아닌 상호작용하는 퍼포먼스의 연기자로 전환될 수 있다. 아니면 확장영화의 예도 있다. 이 영화는 공간성(Spatiality)과 장치(Dispositif)를 부각시킨다. 확장영화는 기존 영화의 통합적 구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요소들(이미지, 사운드, 몸짓, 색채 등)을 나란히 배치한다. 이를테면 톰티크베어(Tom Tykwer) 감독이 만든 <롤라 런>(1998)3을 보자. 영화에서 급박한 상황에 처한 애인을 구하기 위해 도시를 질주하는 롤라의 장면이 많다. 그 과정에서 정중동, 만화와 영화, 컬러와 흑백, 빠른 음악과 느린 음악, 대사와 해설, 시점의 다양화 등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식적 실험이 가득하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애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3가지 상황이 주어지고, 그 각각의 상황을 선택했을 때의 결과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스릴을 전달하면서도 끊임없이 상황 설정을 통해서 인터랙티브한 사유를 유도하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은 사용자가 가상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시도들이 사용자의 능동적인 의식의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가상현실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몰입을 부정할 수 있는 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불연속성을 의도하는 실험은 가상현실 자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정밀한 활용이 필요하다.
앞서 인용된 피그말리온 전설에서, 상아 조각에 불과했던 조각상은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염원으로 실제의 여자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이 <매트릭스>에서처럼 결국 현실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인간에게 가상현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리고 매트릭스 설계자가 원래 원하는 세계는 규칙이 없거나 게이머와 아바타의 구분이 실종됨으로써 플레이라는 상호작용이 없는 무덤덤한 세계이다.
따라서 가상현실 시대에 허구와 가상의 의미를 폄하했던 기존의 정신세계에 변화가 올 것은 자명하다. 이미 컴퓨터게임 매니아들도 사이버 공간을 단순히 취미 차원의 유희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가상세계로 즐기고 있다. 실재에서 탈출한 그들은 가상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역할을 분담하고 여러 조직을 만든다. 또한 과거의 인류가 되기도 하고 낯선 세계를 정복하기도 하면서 현실의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이 가상현실에는 현실 세계의 관행이나 규제가 없으며, 전통적인 가족이나 이익사회보다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디자인된 실재만이 있다.
이미 매체학자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1964)에서 전신, 전화, TV, 컴퓨터 등이 당대의 낡은 인쇄매체를 대신하는 현상을 통찰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미디어의 범주를 역사 전체로 확장했다. 예를 들면 원시적인 도구일지라도, 그것들은 인간의 지각에 깊숙이 침투하여 의식을 변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맥루언에게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전달되지 않고 미디어로 중개되고 체험된다. 현대인들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변형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즉 현대인들의 지각기관에 당도한 것은 미디어가 선별하고 가공한 정보로 국한된다. 그래서 맥루언은 인쇄매체 시대에 인간의 지각형태가 시각적, 순차적, 작용적, 연속적, 문자적 등이었다면, 전기미디어 시대에는 촉각적, 동시적, 반작용적, 불연속적, 그래픽적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는 인간의 신체를 확장하다가도 마비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무력화하며, 세계를 무중력적인 미디어 지배의 통합 공간으로 재편한다.
맥루언이 말한 전기미디어 시대는 이제 디지털 시대로 바뀌었다. 3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매트릭스>의 다음 버전은 인간의 우연성, 순발력, 자유로운 정신마저도 모조리 시뮬레이션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도 사용자에게 한 순간의 미몽(迷夢)이 아닌 지속적인 현실세계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나가며
가상현실은 첨단 과학기술 기기가 구현한 3차원의 디지털 이미지 세계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사용자는 진짜 실재처럼 받아들인다. 이처럼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킨 것은 기기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다. 이런 가상현실이 IT산업 분야나 국가의 전략사업뿐만 아니라 인문학 영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오래 전부터 미제로 남아 있는 실재란 무엇인지에 관한 철학적 논의들도 다시 촉발되고 있다.
하지만 가상현실의 발전에 도덕적, 윤리적으로 성급하게 가치 판단을 내리기보다, 아직은 그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관여해도 무방해 보인다. 특히 가상현실이 강조하는 지각과 몰입은 이성적 의식이 만들어 놓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나 공동체를 열어줄 수 있는 점에서, 면밀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최첨단 기기나 소프트웨어만을 비유하지 않는다. 물론 가상현실은 1968년 서덜랜드(I. Sutherland)가 사이버 헬멧을 쓰면서 등장했기에,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인문학자들은 그 영향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소설 『뉴로맨서』(1984)에서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하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묘사했다. 주인공은 의식을 육체로부터 분리시켜 의식 세계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그러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레니어(J. Lanier)는 1980년대 VR용 장갑과 헬멧, TV용 가상카메라, 영화용 3D를 개발하면서 가상현실의 상용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과학과 인문학이 상보하면서 발전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이버펑크 문학의 주제나 아이디어 수준이었다.
그러던 가상현실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확장될 수 있었던 계기는 공상과학영화의 유행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중에서 1999년에 제작된 <매트릭스> 1편이 주목을 끌었다. 그 영화는 가상현실이 실재의 시공간을 대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를 위해 영화는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기존의 세계에 정보(Information)가 제3의 물리적인 크기로 추가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앤더슨의 바이오포트에 연결된 섬세한 전선들이 대뇌피질에 연결되면, 그는 매트릭스 컴퓨터에서 주는 신호를 받는다. 디지털 정보들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은 네오(가상현실에서 앤더슨의 이름)에게 더 이상 게임이나 특수효과가 아닌 지속적인 실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러 아바타들이 공간을 나는 활극을 펼친다던가, 복제 프로그램이면서도 인간과 똑같은 외양에 지능과 언어를 구사하는 스미스 요원이 나올 수 있었다. 말하자면 매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의 말대로 인간의 능력을 모방하면서도 그보다 우월한 가상 존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 SF영화의 문제의식은 주인공이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 있는데도, 현실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철학의 가장 큰 논쟁거리인 인식의 문제, 실체의 문제, 주체의 문제를 다시 건드린다. 우리는 중국 전국시대에 장자가 말한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알고 있다.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꾼다. 꿈에서 장자는 나비로 훨훨 날아다니다가 그만 꿈에서 깬다.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난 내가 진짜인가? 아니면 꿈의 나비가 진짜 나인가?
마찬가지로 <매트릭스 1>에서도 정체성의 문제가 던져진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앤더슨이 진짜인가? 아니면 매트릭스 시스템의 에너지인 앤더슨이 진짜인가? 아니면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며 공간을 넘나드는 네오가 진짜인가?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짜 세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를 좋아하고 즐기는 다른 등장인물 사이퍼(Cypher)도 있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도록 하고 있다.
이전까지 우리는 참과 거짓에 대한 명료한 구분이 문화의 토대 중의 하나라고 이해해왔다. 그리스시대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의 6권 「통치자와 철학자」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힘으로 지성과 시각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진실성의 관점에서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인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나아가 플라톤은 같은 책 7권 「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을 죄수로 빗댄다. 죄수는 밧줄에 묶여 동굴 벽면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2 플라톤은 그림자를 시각의 대상으로 비유하면서, 인식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만을 믿고, 그것만을 진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수의 모습은 실체(이데아)가 아닌 실체의 그림자(실재)만을 참된 존재로 맹신하는 인간의 우둔함을 비유한다.
따라서 현대의 가상현실은 플라톤의 주장을 영원한 진리가 아닌 하나의 이론으로 축소할 정도로 도발적인 면을 담고 있다. 매체학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21세기에 주체와 대상, 실재와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분하려고 하는 철학적 시도를 편집증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인 이분법(물질과 정신)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주는 교차적이며 서로 얽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상현실의 의미를 기발한 착상으로 한정하지 말고 경험의 확장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이 실재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가상현실은 실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와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그리스 시대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실재를 형상과 질료로 세분한 적이 있다. 질료가 지각되지 않는 잠재태라면, 형상은 질료가 실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 개념을 통해, 우리가 과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실재가 또 있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상현실 콘텐츠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이성적이지 않음을 알아채게 된다. 먼저 현재 나온 다양한 가상현실 콘텐츠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유형화 해보자.
1. 놀이형: 사용자를 전쟁의 주체로 만들거나, 오토바이나 행글라이딩과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대신해주거나, 가보지 않은 곳 혹은 미지의 곳으로 안내해주는 콘텐츠가 있다.
2. 성찰형: 노박(M. Novak)의 <가상 수도승과 함께 춤을>(1994)처럼 수도자의 고행을 배울 수 있다. 사용자는 길을 잃은 듯한 느낌과 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에 빨려 들어가게 되면서 몰입이 심화되지만, 그만큼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행위를 한다.
3. 사회고발형: VR뉴스 <프로젝트 시리아 Project Syria>는 내전으로 붕괴된 시리아에서 그곳 사람들의 음성과 이미지를 그대로 이용한다. 평온한 거리에 갑자기 로켓포가 발사되어 아비규환의 현장이 재현된다. 그 가운데서 사용자는 끔찍한 세
상의 모습을 직접 체험하며 공분할 수 있다.
1, 2, 3은 우리의 의식을 감각적 인식에 멈추게 하면서, 흥분하게 아니면 차분하게 아니면 동정하게 한다. 현대의 심리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정신의 구조를 실재계(이드), 상상계(자아), 상징계(초자아)로 정의한 바 있다. 이드(욕구나 충동)는 보통의 의식 상태에서 억압되지만, 꿈에 나타나면서 의식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도 이성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근저에는 지각이 있고 감각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재계의 지배를 암시하고 있는 콘텐츠는 우리의 정신 구조의 토대와 관련하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의 유행은 자연스럽게 철학자들의 관심을 이끌어서, 관련한 여러 단행본과 연구논문을 나오게 한다. 그 주제 범위도 전통적인 형이상학, 인식론, 존재론 등은 물론이고 윤리학이나 불교학, 심리학 등을 아우른다. 이를테면 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소멸의 미학』(2004)에서 속도와 관련한 매체들은 인간 실존을 부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반면, 철학자 폴 레비(Paul Levy)는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2002)에서 디지털 매체의 무궁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IT기술의 총화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인 논쟁의 시작을 가져다 준 점에서 융합(Convergence)적이다.
가상현실과 시각예술의 몰입
가상현실의 실재성은 예술의 가상성과 맞물린다. 가상현실은 고도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연속되는 3차원의 그래픽이다. 현실을 시뮬레이션한 가상현실은 사용자에게 지각(Perception)되면서, 또 다른 실재로 변하는 것이다.
관람자가 시각 이미지를 실재로 착각한 일은 과거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Zeuxis)가 그린 포도를 진짜로 착각한 새가 그것을 먹으려고 날아들었다. 혹은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조각가 피그말리온(Pygmalion)에 대한 전설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아니면 관람객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이나 뮤지컬에 열광하며 사건에 몰입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술적 가상이 관람객을 백일몽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은 마치 가상현실이 사용자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과 유사하다.
20세기에 시각예술은 조형예술에만 그치지 않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방송, 영화, 게임, 가상현실 등으로 영역을 대폭 확대해 나갔다. 이런 새로운 시각예술 매체는 몰입형 미디어(Immersive media)로 정리되는데, 그 표현력, 선명함, 현실감에 있어서 이전 아날로그 매체와 크게 비교된다.
철학자 마이클 하임(Michael Heim)은 가상현실의 6가지 구성요소 중에 2가지로 몰입(Immersion)과 온몸 몰입(Full-body immersion)을 언급했다. 심지어 미학자 올리버그라우(Oliver Grau)는 몰입을 가상현실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몰입은 가상현실에 대한 이해의 핵심 키워드로 많이 읽힌다. 기술적으로 사용자에게 현장보다 더 현장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가상현실의 발전 방향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는 광학적이고 청각적 효과를 통한 몰입의 원리가 가상현실의 조건임을 입증한다. 하지만 하임은 사이버스페이스 문화에 잠재하는 탈물질화, 탈육체화가 야기할 위험성에 주목한다. 신체적 대면이 없는 가상 사회가 진짜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화시킬지는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그가 우려하고 있는 점은 가상현실이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난 세계일 뿐, 분명한 것은 지금 이곳의 현실은 아니
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을 가상으로 묶어두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를테면 거리두기(Distancing)는 사용자를 가상현실에 단순하게 몰입시키지 않도록 하는 예술기법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금 전에 언급된 라캉은 장자의 호접지몽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꿈을 꾸고 있는 나와 꿈 속의 나는 동일하다. 하지만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 것은 나이지, 나비는 아닌 것이다. 의심을 할 수 있는 내가 유일하게 꿈에서 깰 수도 있고, 현실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콘텐츠도 사용자를 환상의 세계로 도피시키는 대신에 낯선 현실을 담음으로써, 결국 사용자가 현실을 다르게 보도록 할 수 있다. 빈틈없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환상을 더욱 완벽하게 하는 가상현실을 만들기보다 거리두기 방법으로 혼합현실(Mixed Reality)을 만드는 것이다.
혼합현실과 관련해서, 문학이나 영화에서도 거리두기와 유사한 여러 실험들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하이퍼미디어 문학에서는 사용자가 작품의 빈틈에 뭔가를 채워 넣음으로써, 사용자의 지능은 향상되며, 가상현실과 현실은 구분될 수 있다. 혹은 가상현실이 하나의 스토리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지며, 이를 사용자 스스로가 선택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가상현실은 사용자를 수동적인 주체가 아닌 상호작용하는 퍼포먼스의 연기자로 전환될 수 있다. 아니면 확장영화의 예도 있다. 이 영화는 공간성(Spatiality)과 장치(Dispositif)를 부각시킨다. 확장영화는 기존 영화의 통합적 구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요소들(이미지, 사운드, 몸짓, 색채 등)을 나란히 배치한다. 이를테면 톰티크베어(Tom Tykwer) 감독이 만든 <롤라 런>(1998)3을 보자. 영화에서 급박한 상황에 처한 애인을 구하기 위해 도시를 질주하는 롤라의 장면이 많다. 그 과정에서 정중동, 만화와 영화, 컬러와 흑백, 빠른 음악과 느린 음악, 대사와 해설, 시점의 다양화 등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식적 실험이 가득하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애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3가지 상황이 주어지고, 그 각각의 상황을 선택했을 때의 결과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스릴을 전달하면서도 끊임없이 상황 설정을 통해서 인터랙티브한 사유를 유도하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은 사용자가 가상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시도들이 사용자의 능동적인 의식의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가상현실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몰입을 부정할 수 있는 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불연속성을 의도하는 실험은 가상현실 자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정밀한 활용이 필요하다.
앞서 인용된 피그말리온 전설에서, 상아 조각에 불과했던 조각상은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염원으로 실제의 여자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이 <매트릭스>에서처럼 결국 현실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인간에게 가상현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리고 매트릭스 설계자가 원래 원하는 세계는 규칙이 없거나 게이머와 아바타의 구분이 실종됨으로써 플레이라는 상호작용이 없는 무덤덤한 세계이다.
따라서 가상현실 시대에 허구와 가상의 의미를 폄하했던 기존의 정신세계에 변화가 올 것은 자명하다. 이미 컴퓨터게임 매니아들도 사이버 공간을 단순히 취미 차원의 유희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가상세계로 즐기고 있다. 실재에서 탈출한 그들은 가상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역할을 분담하고 여러 조직을 만든다. 또한 과거의 인류가 되기도 하고 낯선 세계를 정복하기도 하면서 현실의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이 가상현실에는 현실 세계의 관행이나 규제가 없으며, 전통적인 가족이나 이익사회보다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디자인된 실재만이 있다.
이미 매체학자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1964)에서 전신, 전화, TV, 컴퓨터 등이 당대의 낡은 인쇄매체를 대신하는 현상을 통찰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미디어의 범주를 역사 전체로 확장했다. 예를 들면 원시적인 도구일지라도, 그것들은 인간의 지각에 깊숙이 침투하여 의식을 변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맥루언에게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전달되지 않고 미디어로 중개되고 체험된다. 현대인들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변형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즉 현대인들의 지각기관에 당도한 것은 미디어가 선별하고 가공한 정보로 국한된다. 그래서 맥루언은 인쇄매체 시대에 인간의 지각형태가 시각적, 순차적, 작용적, 연속적, 문자적 등이었다면, 전기미디어 시대에는 촉각적, 동시적, 반작용적, 불연속적, 그래픽적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는 인간의 신체를 확장하다가도 마비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무력화하며, 세계를 무중력적인 미디어 지배의 통합 공간으로 재편한다.
맥루언이 말한 전기미디어 시대는 이제 디지털 시대로 바뀌었다. 3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매트릭스>의 다음 버전은 인간의 우연성, 순발력, 자유로운 정신마저도 모조리 시뮬레이션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도 사용자에게 한 순간의 미몽(迷夢)이 아닌 지속적인 현실세계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나가며
가상현실은 첨단 과학기술 기기가 구현한 3차원의 디지털 이미지 세계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사용자는 진짜 실재처럼 받아들인다. 이처럼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킨 것은 기기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다. 이런 가상현실이 IT산업 분야나 국가의 전략사업뿐만 아니라 인문학 영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오래 전부터 미제로 남아 있는 실재란 무엇인지에 관한 철학적 논의들도 다시 촉발되고 있다.
하지만 가상현실의 발전에 도덕적, 윤리적으로 성급하게 가치 판단을 내리기보다, 아직은 그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관여해도 무방해 보인다. 특히 가상현실이 강조하는 지각과 몰입은 이성적 의식이 만들어 놓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나 공동체를 열어줄 수 있는 점에서, 면밀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