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광고 대국이라면 아르헨티나는 광고강국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확인해보니 괜한 허세가 아니라 통계로 드러난 사실이었다. 광고 비용 대비 효율 부문에서 세계 1위 국가는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였다.
흔히 미국을 광고의 천국이라고 한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 경제가 확고히 뿌리내린 데다 경제 규모까지 세계 제일이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광고산업에 대한 투자에서도 미국은 부동의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문학적인 돈이 광고산업에 몰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을 저만치 한 수 아래로 보는 나라가 있다. 바로 아르헨티나다. 물론 미국이 광고대국이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는다. 광고시장의 규모와 든든한 자금력을 앞세운 미국의 광고 투자 규모가 세계 최고라는 이야기에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광고 투자 규모에 대한 광고효율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며 아르헨티나는 여유 있게 웃음을 짓는다.
축구 강국, 탱고의 나라 등으로 알려진 아르헨티나는 정확히 한국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6시간. 세계에서 여덟째로 넓다는 376만 1,274㎢의 영토에 3,6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19세기 말 유럽에 분 이민바람을 타고 건너온 이들이 대거 뿌리를 내린 탓에 남미 어느 나라보다 백인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유럽계 혈통을 물려준 선조 덕분에 아르헨티나에는 지금도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 국적을 가진 이중 국적자가 많다. 그래서인지 문화도 유럽풍이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아르헨티나의 연방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둘러보곤 “유럽의 한복판에 온 것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남미의 파리’라고 하는 게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지리적으로 멀다 보니 아르헨티나도 한국을 모르지만 한국도 아르헨티나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나라’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라도나가 태어난 나라’ ‘아직도 에바 페론이 국모로 추앙 받는 나라’ ‘정기적으로 경제위기에 휘청거리면서도 꽤나 잘 견디어내는 나라’ 정도가 한국인이 아르헨티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닐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르헨티나가 광고 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에이전시 draftFCB 아르헨티나가 최근 낸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이른바 ‘창의력 효율’이라는 순위다. 이 순위는 각국이 얼마나 낮은 비용으로 최고의 광고를 만들어 내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이를 위해 draftFCB 아르헨티나는 광고산업 경쟁력의 세계적인 척도로 인정받는 ‘건 리포트(Gunn Report)’ 2007년 버전을 활용했다. 건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제일의 광고대국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305점을 받아 건 리포트 1위에 올랐다. 116점을 얻은 아르헨티나는 영국(2위·218점)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그런데 세계 각국이 광고산업에 1억 달러를 투자할 때 건 리포트에서 과연 몇 점을 땄는지를 따져보니 순위에는 지각변동이 생겼다. 아르헨티나가 62.70점을 얻어 당당히 세계 1위에 오른 것이다. 지난해 1,656억 달러를 광고산업에 퍼부었다는 미국은 20위에 랭크되는 데 그쳤다.
1위 아르헨티나와 2·3위의 격차도 컸다. 48.12점을 얻어 2위에 오른 싱가포르에는 약 15점, 31.36점으로 3위에 오른 스웨덴에는 무려 2배 차이로 앞섰다. 지난해 광고 투자총액 순위에서 세계 10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효과’ 광고를 생산하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인 셈이다. ‘우리가 진정한 광고 강국’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자부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광고산업의 경쟁력을 입증해낸 draftFCB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 광고산업의 수준에 비춰볼 때(실력을 100% 발휘하기에는) 내부 광고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은 편” 이라며 “광고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는 광고 투자총액
순위에서는 세계 10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지만 ‘창의력 효율’,
즉 광고산업에 1억 달러를 투자할 때의
경쟁력 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효과’ 광고를
생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진정한 광고 강국’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자부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광고산업에서 이처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언어나 화법을 보면 문화가 보인다고 한다. 흔히 광고를 창의력과 연관짓는데 아르헨티나에선 유독 더 그렇다. 광고산업을 ‘창의력 산업’, 광고수출을 ‘창의력 수출’이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마치 찰흙으로 작품을 빚어내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광고를 만드니 뛰어난 작품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아르헨티나에선 머리 나쁜 사람은 드라마도 못 본다는 얘기가 있다. 15분마다 드라마가 끊기고 광고가 나오기 때문이다.5분 정도 나오는 광고를 보고 나면 드라마의 줄거리를 잊어버린다는 의미의 우스갯소리다. 잦은 광고에 짜증이 난다는 뜻도 되겠지만 달리 보면 시청자 눈을 확 잡아끌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광고가 많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광고, 특히 TV광고는 비전문가가 보아도 “꽤나 잘 만드네”라고 감탄할 정도로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최근에 인상적으로 본 광고는 제너럴모터스(GM)의 시보레 자동차 광고다. 맥켄에릭슨 아르헨티나가 아르헨티나 지방을 돌며 아르헨티나용과 남미용 2개 버전으로 제작한 이 광고의 제목은 ‘여행’. 1970년대 팝송 ‘마이 웨이’를 배경음악으로 한 이 광고는 젊은 부부가 걸음마도 못하는 아들을 자동차 뒷좌석 베이비시트에 태우고 집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벌써 소년이 돼 있다. 이 자동차를 빨간 3도어 소형차가 추월한다. 자동차 운전석에는 이미 청년이 된 아들이 앉아 있다. 친구들이 함께 탄 자동차 안은 떠들썩한 분위기다.
또다시 장면이 바뀌면서 아들은 패밀리형 유틸리티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있다. 이젠 결혼한 아들 옆에는 며느리가 타고 있다.
시원하게 달리는 자동차와 배경이 교차하면서 며느리의 배가 불러오고, 얼마 있지 않아 뒷좌석엔 아이들이 타고 있다. 광고가 끝나갈 무렵 아들은 묵직한 중형차를 몬다. 이미 머리는 반백이 됐다.
목적지인 별장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된 그를 손자가 반긴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가치 있는 여행입니다. 시보레는 그래서 (그 여행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지금처럼 자동차를 만들고 있습니다”라는 자막이 뜨면서 광고는 막을 내린다.
‘평생을 같이하는 자동차, 인생의 변화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회사, 그게 바로 시보레’라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다. 보면 볼수록 한 편의 영화 같다.
재미있는 광고도 많다. 최근 것으로는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식기세제 광고가 기억난다. 마치 보디빌딩을 한 사람처럼 팔뚝 근육이 우람한 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팔 힘이 넘친다는 게 그녀의 고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남편을 맞아준다며 반갑게 포옹하는데 난데없이 ‘우지직’ 소리가 난다.
남편은 숨이 콱 막힌 표정이다.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진 남편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에 입원한다. 가족과 외식을 나간 그녀가 아이들 음식에 케첩을 뿌려주려 하는데 여기서도 넘치는 힘이 문제다. 케첩통을 잡으니 마치 소화기처럼 케첩이 발사(?)된다.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가 졸지에 케첩을 뒤집어쓴 아이들. 엄마의 괴력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광고의 주인공이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설거지 때문. 닦이지 않는 세제를 사용해 설거지를 하다보니 팔뚝만 굵어지고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힘이 생긴 것이다. 광고 제품을 쓰면서 그녀는 소원하던 ‘가냘픈 팔뚝’을되찾게 된다.
기발함, 감동, 재미 등이 상업광고의 기치라면 공익광고는 생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2006독일월드컵을 전후로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캠페인 광고가 진행됐다.
후안 로만 리켈메, 카를로스 테베스 등 내로라하는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이 시각장애인 선수들과 풋살(실내축구) 경기를 한다. 물론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눈을 가리고 뛴다. 시각장애인 선수들은 펄펄 나는데 월드스타들은 힘을 못 쓴다.
도대체 패스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장애인이 정상인 못지않을뿐더러 상황에 따라 훨씬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 광고의 메시지다. 이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래도 장애인을 차별하겠느냐는 질책을 받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헌혈 캠페인 광고가 잡지에 실렸다. 멀쩡하게 정장을 입은 남자가 혈액을 구걸하는 사진이 실렸다.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광고다.
상업 광고의 경우, 아르헨티나 광고의 첫째 특징은 단연 기발한 소재 선택과 기능성의 부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식기세제 광고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광고가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세제를 사용하면 ‘그릇이 빛난다’가 아니라 ‘설거지하는 여성의 팔뚝이 가늘어진다’는 사실이다.
평범함도 아르헨티나 광고의 또 다른 특징이다. 특히 TV광고가 그렇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집이나 초호화판 최고급 저택, 조각상 같은 미남미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드물다. 광고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동네 거리, 우리 집 거실이나 부엌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외모의 보통사람들이 등장한다. CF에 출연했다가 인기를 얻어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이른바 ‘CF여왕’ ‘CF요정’이라는 말은 당연히 없다. 이웃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평범한 광고에 사람들은 한층 공감하게 된다. 배경과 인물이 평범하다 보니 대신 광고에는 뚜렷한 메시지가 담기게 된다.
광고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특징은 스토리가 있는 광고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이 짧은 만큼 스토리는 함축적이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철저하게 광고하는 상품에 스토리의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도 철칙이다. ‘광고 영화’나 ‘광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사람은 조연일 뿐이다. 상품이 주인공이다. 이건 앞서 얘기한 평범함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인기 연예인들이 출연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 당당히 광고의 주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최대한 평범하라!’ ‘기능성을 부각해 상품을 알려라!’ ‘광고하는 상품 외에는 모두 조연이다!’ 이러한 원칙에 충실한 게 바로 아르헨티나의 광고다.
손영식(아르헨티나 통신원 한국어-스페인어 공인번역사)
흔히 미국을 광고의 천국이라고 한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 경제가 확고히 뿌리내린 데다 경제 규모까지 세계 제일이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광고산업에 대한 투자에서도 미국은 부동의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문학적인 돈이 광고산업에 몰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을 저만치 한 수 아래로 보는 나라가 있다. 바로 아르헨티나다. 물론 미국이 광고대국이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는다. 광고시장의 규모와 든든한 자금력을 앞세운 미국의 광고 투자 규모가 세계 최고라는 이야기에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광고 투자 규모에 대한 광고효율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며 아르헨티나는 여유 있게 웃음을 짓는다.
축구 강국, 탱고의 나라 등으로 알려진 아르헨티나는 정확히 한국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6시간. 세계에서 여덟째로 넓다는 376만 1,274㎢의 영토에 3,6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19세기 말 유럽에 분 이민바람을 타고 건너온 이들이 대거 뿌리를 내린 탓에 남미 어느 나라보다 백인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유럽계 혈통을 물려준 선조 덕분에 아르헨티나에는 지금도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 국적을 가진 이중 국적자가 많다. 그래서인지 문화도 유럽풍이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아르헨티나의 연방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둘러보곤 “유럽의 한복판에 온 것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남미의 파리’라고 하는 게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지리적으로 멀다 보니 아르헨티나도 한국을 모르지만 한국도 아르헨티나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나라’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라도나가 태어난 나라’ ‘아직도 에바 페론이 국모로 추앙 받는 나라’ ‘정기적으로 경제위기에 휘청거리면서도 꽤나 잘 견디어내는 나라’ 정도가 한국인이 아르헨티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닐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르헨티나가 광고 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에이전시 draftFCB 아르헨티나가 최근 낸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이른바 ‘창의력 효율’이라는 순위다. 이 순위는 각국이 얼마나 낮은 비용으로 최고의 광고를 만들어 내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이를 위해 draftFCB 아르헨티나는 광고산업 경쟁력의 세계적인 척도로 인정받는 ‘건 리포트(Gunn Report)’ 2007년 버전을 활용했다. 건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제일의 광고대국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305점을 받아 건 리포트 1위에 올랐다. 116점을 얻은 아르헨티나는 영국(2위·218점)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그런데 세계 각국이 광고산업에 1억 달러를 투자할 때 건 리포트에서 과연 몇 점을 땄는지를 따져보니 순위에는 지각변동이 생겼다. 아르헨티나가 62.70점을 얻어 당당히 세계 1위에 오른 것이다. 지난해 1,656억 달러를 광고산업에 퍼부었다는 미국은 20위에 랭크되는 데 그쳤다.
1위 아르헨티나와 2·3위의 격차도 컸다. 48.12점을 얻어 2위에 오른 싱가포르에는 약 15점, 31.36점으로 3위에 오른 스웨덴에는 무려 2배 차이로 앞섰다. 지난해 광고 투자총액 순위에서 세계 10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효과’ 광고를 생산하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인 셈이다. ‘우리가 진정한 광고 강국’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자부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광고산업의 경쟁력을 입증해낸 draftFCB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 광고산업의 수준에 비춰볼 때(실력을 100% 발휘하기에는) 내부 광고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은 편” 이라며 “광고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는 광고 투자총액
순위에서는 세계 10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지만 ‘창의력 효율’,
즉 광고산업에 1억 달러를 투자할 때의
경쟁력 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효과’ 광고를
생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진정한 광고 강국’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자부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광고산업에서 이처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언어나 화법을 보면 문화가 보인다고 한다. 흔히 광고를 창의력과 연관짓는데 아르헨티나에선 유독 더 그렇다. 광고산업을 ‘창의력 산업’, 광고수출을 ‘창의력 수출’이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마치 찰흙으로 작품을 빚어내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광고를 만드니 뛰어난 작품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아르헨티나에선 머리 나쁜 사람은 드라마도 못 본다는 얘기가 있다. 15분마다 드라마가 끊기고 광고가 나오기 때문이다.5분 정도 나오는 광고를 보고 나면 드라마의 줄거리를 잊어버린다는 의미의 우스갯소리다. 잦은 광고에 짜증이 난다는 뜻도 되겠지만 달리 보면 시청자 눈을 확 잡아끌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광고가 많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광고, 특히 TV광고는 비전문가가 보아도 “꽤나 잘 만드네”라고 감탄할 정도로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최근에 인상적으로 본 광고는 제너럴모터스(GM)의 시보레 자동차 광고다. 맥켄에릭슨 아르헨티나가 아르헨티나 지방을 돌며 아르헨티나용과 남미용 2개 버전으로 제작한 이 광고의 제목은 ‘여행’. 1970년대 팝송 ‘마이 웨이’를 배경음악으로 한 이 광고는 젊은 부부가 걸음마도 못하는 아들을 자동차 뒷좌석 베이비시트에 태우고 집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벌써 소년이 돼 있다. 이 자동차를 빨간 3도어 소형차가 추월한다. 자동차 운전석에는 이미 청년이 된 아들이 앉아 있다. 친구들이 함께 탄 자동차 안은 떠들썩한 분위기다.
또다시 장면이 바뀌면서 아들은 패밀리형 유틸리티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있다. 이젠 결혼한 아들 옆에는 며느리가 타고 있다.
시원하게 달리는 자동차와 배경이 교차하면서 며느리의 배가 불러오고, 얼마 있지 않아 뒷좌석엔 아이들이 타고 있다. 광고가 끝나갈 무렵 아들은 묵직한 중형차를 몬다. 이미 머리는 반백이 됐다.
목적지인 별장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된 그를 손자가 반긴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가치 있는 여행입니다. 시보레는 그래서 (그 여행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지금처럼 자동차를 만들고 있습니다”라는 자막이 뜨면서 광고는 막을 내린다.
‘평생을 같이하는 자동차, 인생의 변화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회사, 그게 바로 시보레’라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다. 보면 볼수록 한 편의 영화 같다.
재미있는 광고도 많다. 최근 것으로는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식기세제 광고가 기억난다. 마치 보디빌딩을 한 사람처럼 팔뚝 근육이 우람한 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팔 힘이 넘친다는 게 그녀의 고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남편을 맞아준다며 반갑게 포옹하는데 난데없이 ‘우지직’ 소리가 난다.
남편은 숨이 콱 막힌 표정이다.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진 남편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에 입원한다. 가족과 외식을 나간 그녀가 아이들 음식에 케첩을 뿌려주려 하는데 여기서도 넘치는 힘이 문제다. 케첩통을 잡으니 마치 소화기처럼 케첩이 발사(?)된다.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가 졸지에 케첩을 뒤집어쓴 아이들. 엄마의 괴력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광고의 주인공이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설거지 때문. 닦이지 않는 세제를 사용해 설거지를 하다보니 팔뚝만 굵어지고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힘이 생긴 것이다. 광고 제품을 쓰면서 그녀는 소원하던 ‘가냘픈 팔뚝’을되찾게 된다.
기발함, 감동, 재미 등이 상업광고의 기치라면 공익광고는 생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2006독일월드컵을 전후로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캠페인 광고가 진행됐다.
후안 로만 리켈메, 카를로스 테베스 등 내로라하는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이 시각장애인 선수들과 풋살(실내축구) 경기를 한다. 물론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눈을 가리고 뛴다. 시각장애인 선수들은 펄펄 나는데 월드스타들은 힘을 못 쓴다.
도대체 패스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장애인이 정상인 못지않을뿐더러 상황에 따라 훨씬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 광고의 메시지다. 이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래도 장애인을 차별하겠느냐는 질책을 받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헌혈 캠페인 광고가 잡지에 실렸다. 멀쩡하게 정장을 입은 남자가 혈액을 구걸하는 사진이 실렸다.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광고다.
상업 광고의 경우, 아르헨티나 광고의 첫째 특징은 단연 기발한 소재 선택과 기능성의 부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식기세제 광고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광고가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세제를 사용하면 ‘그릇이 빛난다’가 아니라 ‘설거지하는 여성의 팔뚝이 가늘어진다’는 사실이다.
평범함도 아르헨티나 광고의 또 다른 특징이다. 특히 TV광고가 그렇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집이나 초호화판 최고급 저택, 조각상 같은 미남미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드물다. 광고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동네 거리, 우리 집 거실이나 부엌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외모의 보통사람들이 등장한다. CF에 출연했다가 인기를 얻어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이른바 ‘CF여왕’ ‘CF요정’이라는 말은 당연히 없다. 이웃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평범한 광고에 사람들은 한층 공감하게 된다. 배경과 인물이 평범하다 보니 대신 광고에는 뚜렷한 메시지가 담기게 된다.
광고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특징은 스토리가 있는 광고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이 짧은 만큼 스토리는 함축적이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철저하게 광고하는 상품에 스토리의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도 철칙이다. ‘광고 영화’나 ‘광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사람은 조연일 뿐이다. 상품이 주인공이다. 이건 앞서 얘기한 평범함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인기 연예인들이 출연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 당당히 광고의 주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최대한 평범하라!’ ‘기능성을 부각해 상품을 알려라!’ ‘광고하는 상품 외에는 모두 조연이다!’ 이러한 원칙에 충실한 게 바로 아르헨티나의 광고다.
손영식(아르헨티나 통신원 한국어-스페인어 공인번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