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 대표와 처음 만난 건 2000년. BBDO 동방의 부사장으로 컴백할 때였다. 이 대표의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독특한 카리스마를 느끼며 광고계를 이야기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IMF를 겪고, 외국계 다국적 광고회사가 국내 광고 시장을 휩쓸고 있을 때 이동수 대표와의 연락이 끊겼다. ADFEST에서 만났을 때는 O&M 베트남의 ECD로 활동하고 있었고, 얼마 후 O&M Asia Pacific Office CD로 세계의 광고인이 되어 있었다. 인터뷰 당일도 다음날 부터 시작되는 2009 AP-ADFest 참석을 희망하는 주최 측의 요청에 급하게 일정을 잡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글 | 정종선 기자
이동수 대표는 2003년부터 시작한 해외 활동을 회상하면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며, 지난 몇 년 동안의 근황을 설명했다. “네 이번에도 AD Fest에 갑니다.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주최측에서 와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부랴부랴 준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광고제에 가면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곳은 사람을 만나는 장이거든요. 유명한 광고인 100명 정도를 한꺼번에 만날만한 장소가 광고제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빅샷들은 만날 수 있고 3일이면 근황을 알 수 있으니까요. 배우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국제적 인맥을 넓히는데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 아태지역 리저널 CD
이동수 대표가 해외 광고계에 발을 들여 놓은건 엄밀히 말하면, 1987년 D’Arcy에서 광고를 시작하면서 부터이고, 이후 덴쯔영앤루비컴, JWT, BBDO동방 등 주로 외국계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면서 그의 행보는 계속된다. “WPP가 LG애드를 인수할 당시 두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오길비의 지사 중 크리에이티브 본부인 홍콩과, 클라이언트 서비스 본부인 싱가폴 중 한 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그 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탐카이맹(당시 O&M 아시아지역 CD)에게 뽑혀 싱가폴 O&M에 취직이 될 때, 서울에 있는 LG애드에도 자리가 있는데 그곳은 어떠냐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것 보다는 국제적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이 후 이동수 대표는 O&M 호치민(베트남)에서 ECD로 일했고 이때 한국인 최초로 AD Fest 메달도 받았다. 그렇게 2년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방콕에서 한국인 최초 O&M 아태지역 리저널 CD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1년의 3분의2 이상을 출장으로 보낼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리저널 CD라는 게 각 국가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불 끄러 다니는 것이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또 2년을 보냈습니다. 집에서도 불평이 많았죠. 하지만 그나마 1년 중 3분의 1 동안은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O&M 오길비 베트남의 ECD로 일할 당시에 유명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는 제가 처음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대부분 미국, 유럽 친구들이 CD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들이 생소했고 그들도 저를 별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부하 직원이었던 CD들이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지휘체계를 무시하는 상황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현지 전문가를 채용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게 전설 같은 일이 되었죠.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CD가 사고를 쳤다고나 할까요. 그 후 최초의 베트남 CD가 탄생했고,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다국적 기업 현지화 전력이 성공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대표는 이러한 일을 우리 스스로도 만든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한국의 국제 행사 연사에 CD인 그보다, 그의 아랫사람인 외국인을 초청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광고 환경에 대해 고민해 본적이 있다고 웃음을 지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참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다국적 팀이 있었는데 플래너인 영국인을 비롯해 일본, 체코, 프랑스, 필리핀 친구들이랑 같이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좋았던 건 순수하게 실력으로 경쟁하며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해외 생활 체험기 쓴 책 발간 앞둬
이러한 해외에서의 생활을 묶어 얼마 후 ‘스승이자 친구들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과의 대화’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된다고 한다. 국외 활동 중 만난 광고인들로부터 배운 내용을 옴니버스 식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광고를 하면서 늘 경쟁의 상대로 삼았던 나라 밖의 동료들은 늘 내게 스승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로부터 배운 일부라도 나누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을 용기를 얻는다’라는 글귀가 있다. 책 내용은 이 대표가 밖에서 만났던 스승들과 함께 새로운 문화 속에서 세운 여러 가지 원칙들을 글로 푼 것이다. “광고인으로서 기준들을 스스로 정립하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구요, 그들이 우리와 문화적으로 다를 것 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닮은 게 많습니다. 결국 국경을 넘어 공통적인 것이 광고의 핵이라고 볼 수 있죠. 문화적 차이가 많다고 말 하지만, 그것을 조금만 넘어서면 문화적인 동질성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게 바로 휴머니즘이죠. 인간은 똑같다는 것. 그것을 보려고 애썼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동수 대표가 오길비에서의 맡은 마지막 파트는 레드카드라는 게릴라 마케팅 회사이다. 당시에 데이빗 메어라는 광고인이 좋아서 옮긴 조직이었지만, 에스티로더 아시아 캠페인을 마지막으로 오길비 생활을 접었다. 많은 고민 끝에 다시 태국으로 돌아와 거기서 ‘아시아 리퍼블릭’을 만들었고 유니레버의 ‘클리어’, 태국 왕족이 운영하던 리조트, ‘타이챠스’라는 캔 통조림 등의 광고를 하다가, SK가 진행하는 캠페인의 경쟁PT를 하러 2007년 2월 5일 서울로 들어와 일이 잘 성사되어 아직 못나가고 있다. 현재 방콕의 오피스는 운영을 하고 있지 않지만 다시 아시아 리퍼블릭 방콕을 필두로 진정한 로컬에이전시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 리퍼블릭을 설립한 이유는 아시아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대부분의 대형 회사들이 순위를 다투는 동네 골목대장이긴 하나 다들 자국 내에서 뿐이죠. 제 고민이 그거였습니다. 대부분 유명한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는 유럽이나 미국 회사이지 아시아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회사들은 해외로 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회사가 ‘아시아 리퍼블릭’입니다.
가상 에이전시, 미래형 광고 회사 모델 될 것
이러한 의미에서 얼마전 아시아 리퍼블릭은 로엔케이라는 회사로부터 M&A 형식으로 50억을 투자 받았다. 로엔케이는 옥션과 사업 계약을 체결한 회사이며, 온라인상의 가상광고 에이전시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신개념 광고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전 앞으로 많이 바뀔꺼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이 비즈니스가 세상을 뒤집을 것 같지도 않고요. 광고회사는 광고회사로서 존재하리라 봅니다. 대신 역할이 컨버전스(Convergence)나 디버전스(Divergence)화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버츄얼AD가 저희의 주력이 될 것 같습니다. 버추얼 광고가 아니라 버추얼 에이전시나 버추얼 코퍼레이션이 맞겠네요. 기본적인 개념은 크리에이티브 G마켓 입니다. 전통적인 광고는 여력이 있는 중형이상 광고주가 하는 것이고, 광고를 하고 싶지만 재정적 여유가 없는 곳이 버추얼AD의 타깃이 됩니다. 중 소규모의 클라이언트와 실력 있는 플래닝 회사나 크리에이티브 회사들을 묶어주는 G마켓 같은 온라인 채널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직접 전략적인 자문을 하고, PR부터 매체까지 담당해 주게 되면, 중간 유통비가 사라지고. 가격이 많이 다운되고 크리에이티브의 수준도 향상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보입니다. 결국 중소기업이나 병원처럼 전혀 다른 타깃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향후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지만 결국 그네들을 대상으로 하는 에이전시가 웹상에 존재 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는 쪽은 싸게, 제공하는 쪽은 높게 받을 수 있겠죠.”
크리에이티브에 잣대를 들이대
이 대표는 얼마 전 치러진 모 광고상 심사에서 해외 크리에이티브 심사 기준을 잣대로 들이대 수상작을 바꾸는 역할을 한 적이 있다. 결국 매체의 힘보다 크리에이티브의 힘을 굳게 믿는 뚝심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또 얼마 전 부산국제광고제의 조직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데이빗 매이어라는 광고인과의 대화 속에서 왜 광고에는 어른 밖에 없을까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오길비, 아직도 레오버넷... 그래서 늘 했던 걱정이 앞으로 어떻게 될것이냐 입니다. 나도 평생 광고로 밥을 먹었고, 앞으로도 계속 먹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입니다. 결국 에이전시의 미래가 걱정이죠. 한국에서 작은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를 하면 죽고, 대형 인하우스 에이전시 때문에 안됩니다. 슬픈 일이죠. 우리나라도 더 이상 덩치 싸움이 아니라 크리에이티브로 경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캠페인브리프 한국판을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기본적인 이유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걸 바라기 때문이며, 결국 우리나라 광고도 크리에이티브로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