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20년 주기로 돌고 돈다고 하죠. 뷔스티에, 와이드 팬츠, 크롭탑, LP, 필름 카메라 등 1990년대에나 유행했던 아이템들이 다시 유행하며, ‘흘러간 옛 밴드’ 취급을 받던 퀸의 노래들이 <보헤미안 랩소디> 덕에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는 일도 벌어졌고요. 이런 현상은 모두 ‘레트로’라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소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레트로 문화의 탄생에서 변화, 확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Social Bigdata Insight Report ‘레트로 트렌드’, 2019.01, HS애드 커뮤니케이션팀)
레트로 대세론의 중심: 잠재적 소비층 밀레니얼 세대
레트로는 회상, 회고, 추억을 뜻하는 영어단어 ‘Retrospect’의 준말로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체제,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재현하려 하는 것’을 뜻합니다. 1970년대에는 ‘Pre’의 반대 의미인 접두어로 사용되었지만, 패션과 음악 등 문화계에서 재조명되며 레트로는 하나의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최신 유행의 중심에 서게 된 레트로. 그 중심에는 ‘밀레니얼 세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975~2000년 태생을 뜻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며 경험에 대한 소비 욕구가 매우 큰 세대입니다.
우리가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알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들 역시 업계 불황이나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못할 때 레트로를 활용하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추세가 레트로 트렌드의 잠재적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 욕구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올드, 빈티지, 아날로그, 레트로… 무엇이 다를까?
▲올드, 빈티지, 아날로그, 레트로의 최근 버즈량 추이
레트로 이외에도 올드, 빈티지, 아날로그 등 ‘복고’ 유행을 뜻하는 키워드는 많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릅니다. 소셜 데이터 분석 결과, ‘올드’와 ‘빈티지’ 모두 지나간 시대를 추억하며 옛것을 즐기는 취미 문화 전반에서 많이 나타나는 키워드입니다. 올드는 주로 문화 취향, 빈티지는 패션과 인테리어와 연관돼 자주 언급되는 편입니다. 아날로그는 주로 사진, 카메라 등 ‘느린 일상의 미학’을 나타냅니다. 레트로는 이런 키워드 사이에서 최근 1년 사이 4개 키워드 중 유일하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키워드입니다. 최근에는 레트로를 넘어 ‘힙트로’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하며, ‘핫한 것’보다 나만 알고 싶은 희소한 것을 뜻하는 ‘힙’한 범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VS 뉴트로 - 레트로의 두 가지 경향성
레트로를 찾는 사람들은 세대별?성향별로 구분됩니다. 현재 30대~40대를 넘어선 세대는 레트로의 대상이 되는 옛 시절 문화를 접해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레트로 문화를 자신의 과거와 연관 지어 친근한 느낌으로 소비하게 됩니다. 반면 1020세대에게 레트로는 현대의 트렌드와 융합해 처음 만나는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입니다.
▲칠성사이다와 펩시의 SNS 버즈량 추이
레트로의 소비 경향 역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오리지널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품의 질과 편의성보다는 브랜드 스토리와 감성을 2019년에도 그대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때문에 ‘예전 그 디자인’으로 출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이 지갑을 열어젖힙니다. 펩시와 칠성사이다가 예전 디자인을 복각한 콜라와 사이다를 출시한 시기에 해당 제품들의 SNS 버즈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다른 한 경향은 ‘뉴트로’입니다. 레트로 감성에 현대 기술을 접목해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것을 ‘뉴트로’라 합니다. 뉴트로 경향은 첨단 기술을 적용한 제품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예전 필름 감성을 구현한 포토 필터 효과라도 최신 스마트폰의 1,000만 화소 고화질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아날로그 다이얼을 그대로 재현한 라디오이지만 블루투스 연결은 기본이어야 하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기계식 키보드 등 다양한 뉴트로 제품들이 이러한 트렌드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타오르는 레트로 열풍에 기름을 끼얹다
이러한 레트로 열풍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바로 인스타그램입니다. ‘내가 이렇게 힙하다’라고 자랑하는 SNS가 인스타그램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의 힙스터들을 팔로우해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는 동시에 나의 힙함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어필합니다.
▲레트로 키워드의 SNS 언급량 추이
2015년 가을부터 인스타그램에 언급된 ‘레트로’ 키워드는 서서히 블로그와 트위터, 커뮤니티 등 다른 매체들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10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로 지속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한번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에 업로드된 레트로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 지금 이 시간에도 일본 빈티지 패션 브랜드, 한남동 앤트러사이트, 에이펙스 트윈, 야시카 T3, 들국화 등 다양한 레트로 키워드가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레트로 감성은 패션, 식음료, 가전, 생활, 취미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칩니다.
레트로 문화의 탄생과 성장: 필름 카메라와 구닥의 예
레트로 트렌드가 발생하고 퍼져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스마트폰 사진 앱 ‘구닥’입니다. 2015년 지드래곤이 자신이 사용하는 콤팩트 필름 카메라 ‘콘탁스 T3’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고, 이후 이미 단종된 콘탁스 T3의 중고가는 물론 니콘 35Ti, 미놀타 TC-1 등 비슷한 콤팩트 카메라의 중고가가 폭등하며 필름 카메라의 인기가 지속해서 올라가게 됩니다.
▲ 일회용 필름 카메라의 뒷면을 재현한 스마트폰 카메라 앱 '구닥'의 실행 화면
2017년 9월에는 이러한 레트로 감성에 힘입은 스마트폰 사진 앱 ‘구닥’ 앱이 출시됩니다. 필름 한 롤로 찍을 수 있는 분량인 24장을 모두 찍고, 평균 현상/인화 시간 정도인 3일을 기다려야만 사진을 저장할 수 있는 구닥은 필름 카메라의 색감은 물론 사용 경험까지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블랙핑크 제니나 래퍼 우원재 등 셀럽들의 타임라인에 소개되면서 일반인에게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뒤를 이어 ‘Huji’나 ‘calla’ 등 다양한 레트로 앱들이 앱스토어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보편적으로 레트로 트렌드 확산은 크게 ‘촉발→변주→확산→정착→2차 변주’의 다섯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지드래곤의 T3 인스타 업로드가 ‘필름 카메라’ 트렌드를 ‘촉발’했고, 이 트렌드의 ‘변주’로 구닥 앱이 탄생했죠. 구닥은 연예인 셀러브리티의 인스타그램 업로드로 ‘확산’ 되며 일반인에게도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기를 바라본 경쟁 업체들이 단점을 개선하거나 차별화된 특징을 담아 ‘2차 변주’한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으로 이 과정은 마무리됩니다.
90년대의 레트로 타임슬립: 패션과 식음료
▲90년대와 2018년 패션 평행이론(출처: 스브스뉴스 공식 유튜브)
2016년 이슈가 된 MBC 뉴스의 클립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영상을 시발점으로, 1990년대 패션이 다시 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승마바지라 불리는 데님 진이나 상·하의 청청 패션, 멜빵바지, 와이드 팬츠, 크롭탑 등이 오랜만에 빛을 본 것이죠. 오버핏, 빅 로고가 특징이었던 챔피언, 타미힐피거, 휠라 등 90년대 인기 브랜드도 다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식음료 부문에서는 펩시콜라나 칠성사이다의 레트로 캔이나 훼미리 주스 등 옛날 패키지로 제품을 출시하거나 ‘갈아만든배’나 ‘따봉’ 등 과거에 사랑받았던 제품을 재출시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레트로를 사랑하는 ‘인싸’들은 스타벅스 등 대형 커피 체인보다는 학림다방이나 커피한약방 등 옛 정서가 가득한 핫플레이스에 방문하고 인증샷을 남기죠. 이성당이나 태극당, 코롬방 제과 등 예전의 맛과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레트로 베이커리에도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믹스매치: 공간과 가전
이제는 핫플레이스도 레트로 트렌드의 영향을 받는 시대입니다. 주로 개발이 더디거나 제한되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을지로나 익선동, 성수동이나 후암동 등은 거꾸로 이러한 핸디캡이 장점이 된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을지로의 대표적 레트로 플레이스인 '커피한약방'과 '혜민당'
요즘 핫한 레트로 플레이스에서는 건물이나 내부 인테리어에서 ‘옛날’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모던한 인테리어에 레트로 자개장, 병풍 등 한국적인 소품으로 포인트를 주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합니다. 하동관, 오구반점 등 노포들이 밀레니얼 세대에게 주목받으며, SNS에서 이러한 플레이스를 공유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새로 생기는 상점에서 일부러 옛날 느낌이 나는 상호와 간판을 채택하기도 합니다. 레트로 트렌드의 덕으로 다시 영업을 시작한 이발소나 필름사진관 등도 있습니다.
▲ 레트로 감성으로 탄생한 LG 루키 TV (출처: LG전자 홈페이지)
가전 분야에서는 LG TV 루키와 같이 현대식 편의성을 유지하면서 레트로 디자인을 채택한 상품들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나 블루투스 스피커는 물론, 세탁기, 냉장고 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스메그나 드롱기 같은 레트로 디자인 가전 브랜드의 인기 역시 식을 줄을 모릅니다.
오리지널의 재발견과 뉴트로의 탄생: 취미와 문화
지난해 이마트와 롯데마트, 토이저러스 등의 히트 상품 리스트에는 '쌍문동 오락실’ 같은 작은 복고 게임기가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화면에 수십 개의 레트로 게임을 탑재한 이런 기기들은 3~4만 원의 저렴한 가격에 레트로한 콘셉트로 아재들의 취향을 저격했죠.
▲ 이미 단종되었지만 레트로의 유행으로 중고가가 치솟은 콘탁스 필름 카메라
취미와 여가 생활 분야에도 레트로 트렌드가 등장하면서, 필름 카메라와 LP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트리밍이 대세인 시대에 LP 바에서 음악을 신청해 듣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죠. 이에 맞춰 한국 가요 시장에도 레트로한 콘셉트의 아티스트가 등장했고, 아예 뉴잭스윙이나 붐뱁 같은 올드스쿨 장르를 다루는 뮤지션도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대의 힙스터 GD가 ‘영원한 것은 절대 없어’라고 노래했지만, 레트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지금에야 레트로가 힙한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레트로가 전 국민의 유행이 되면 힙스터들은 금세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하겠죠. 하지만 트렌드를 찾아 떠난 그들의 여행 역시 언젠가 막다른 골목에 놓일 것이고, 결국 돌아올 장소는 레트로일 겁니다. 이러한 유행의 흐름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레트로’라는 트렌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